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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공파보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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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공파보 간행

 

허찬 대종회장이 용진공파의 숙원이었던 용진공파보를 간행했다.

양천허씨 15세 용진공 허징(徵)은 판도좌랑공 허관(冠)의 첫째아들 문화평장사 허백(佰)과 진한국 부인 동래정씨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아들인 대제학 허강(綱)의 손자다.

허강은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밀직부사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아들인 허흠은 중량장을 지냈다. 용진공은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조선조 출사를 거부하고 가솔을 이끌고 벽지인 함경북도 길주로 은둔했다.

이후 공의 후손들은 길주와 명천을 중심으로 단천, 이원, 종성, 무산 등 함경북도 일원으로 퍼져 번성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자 용진공의 후손 일부는 만주 또는 연해주로 생활의 터전을 옮겼으며 항일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3년 여에 걸친 6.25 전쟁은 용진공의 많은 후손들을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이주시켰다. 동북삼성이란 랴오닝성(요녕성), 지린성(길림성),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을 일컫는다.

또 연해주 등 러시아 땅으로 이주했던 용진공파 후손들은 소련 연방 서기장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정책(1937-1939)으로 카자흐스탄, 우즈베기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로 이주되기도 하였다. 용진공파 후손 대부분은 북한에 살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에도 많이 분포되어 있다. 

용진공파의 명조인 17세 길성군 유례는 1467년,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고 길성군에 봉해져 가선대부 중추부첨지사에 임명되고 훗날 공조판서에 추증되어 효장이라는 시호와 함께 명천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현재 중국 연길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양천 허씨 대부분은 용진공의 후손들이며 연변 양천 허씨 종친회를 결성하고 상호 친목활동을 활발하게 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용진공파 후손들은 북한의 종파 와해정책 또는 중국의 문화혁명 등으로 인해 족보를 간진하지 못하고 뿌리의 상계를 알지 못하는 실정에 이르게 되어 1917년 허순영에 의해 길주에서 간행된 용진공파 세보(총 11권)를 기초로 오류를 바로잡고 그 후의 변동사항을 보완하고 정리하여 용진공파보를 새로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 용진공 파보는 2책(1질)에 10만원에 반질중이다. 

                         

2021년 1월 22일   

양천허씨 대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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