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허씨 약사

양천허씨 약사 및 3개 대파

고려 초부터 문벌귀족(門閥貴族)으로 자리매김 한 후, 그 명성을 꾸준히 이어온 우리 양천(陽川) 허문(許門)은 고려 말, 10세조(十世祖)인 문경공(文敬公) 허공(珙)의 아들 대(代)에서 3개 파(派)로 분파를 하게된다. 공(公)은 아들 다섯을 두었으나 두 아들은 대(代)를 잇지 못했다. 따라서 양천 허씨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문경공 허공(珙)의 자손이 된다. 공(公)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용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판문점이 위치하고 있는 곳과 가까운 곳으로서 현재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양천허씨대종회는 일년에 한 번씩이라도 이곳을 방문하여 벌초(伐草: 무덤의 잡초를 베는 일)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경공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문평공(文平公) 윤극민(尹克敏)의 맏딸 파평 윤씨(坡平尹氏)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한 최징(崔澄)의 여섯째 딸 철원 최씨(鐵原崔氏) 창원군부인(昌原郡夫人) 이렇게 두 부인으로부터 아들 다섯 형제와 딸 네 명을 두었는데, 양천 허문은 첫째 아들인 동주사 허정(程)을 파조(派祖)로 하는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 셋째 아들 판도좌랑 허관(冠)을 파조로 하는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다섯째 아들 대제학 허부(富)를 파조로 하는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로 분파되어 후손들은 현재, 해외를 포함 대한민국 전국에 분포하여 번성하고 있다. 특히 중국 연길에는 1991년부터 양천 허씨 모임이 결성되어 일가(一家) 간 우애를 돈독히 하고 있으며 중국 이외의 국가들에서도 양천 허씨들의 친목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천 허씨의 상당 수가 북한에 거주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나의 직계 조상이 누구인지 그 뿌리를 알기란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문경공의 벼슬은 첨의부중찬으로 현재의 국무총리와 같으며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 묘정 배향공신이다. 공(公)의 다섯 아들 중 검교(檢校) 정승(政丞)을 지낸 둘째 아들 허숭(嵩)은 공(公)의 아들 허종(悰) 대(代)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넷째 아들 허총(寵)은 공(公)의 대(代)에서 자손을 잇지 못하고 손이 끊어졌다. 이는 곳 양자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이 덜했던 고려 시대의 풍습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할 수 있다.  

1. 동주사공파

동주사공파 종중은 문경공 허공(珙)의 첫째 아들인 11세 동주사(東州使) 허정(程)을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는 종중이다. 동주사공은 부인 행주 기씨(幸州奇氏)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막내 아들인 허소(昭)는 딸만 셋을 두어 대(代)를 잇지 못했다. 한편 공(公)의 종손계(宗孫系)는 공(公)의 5세손인 허욱(頊) 대(代)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니 공(公)의 둘째 증손자인 검교(檢校) 한성윤(漢城尹) 허호(灝)의 자손이 공(公)의 사손(嗣孫)이 되었다. 공(公)의 후손들은 고려 시대 말부터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일원에서 약 100여 년간 집성 세거하다가 조선 전기인 14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후손 일부가 그 거주지를 가깝게는 충청북도 단양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영주, 예천, 안동, 멀리는 경상남도 밀양, 고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다시 삶의 터전을 옮겨 뿌리를 내렸다. 


동주사(東州使)는 동주(東州) 지역을 맡아 다스렸던 지방관 벼슬이며 동주(東州)는 철원(鐵原)의 옛 지명으로 신라 시대 말 궁예(弓裔)가 후 고구려를 건국한 후 도읍으로 삼았던 지역이다. 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서쪽 일부, 경기도 연천군과 포천군 일부, 그리고 북한 지역으로 평강군 일부와 이천읍 일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 1개의 군과 7개의 현이 속해 있던 넓은 지역이다. 


 공(公)의 세 아들 중 첫째 아들인 허선(瑄)은 식목도감(式目都監)의 녹사(錄事)를 지냈는데 식목도감은 고려 시대 3성 6부제 하에 설치된 두 개의 회의기관 중 하나다. 식목도감은 두 회의기관 중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문제를 관장하던 도병마사(都兵馬使)와 달리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格式: 격에 어울리는 방식)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두 곳 모두 중서문하성 소속 재신(宰臣: 재상) 그리고 정3품 등, 5품 이상의 관리들이 겸직(兼職: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직무를 겸함)하며 회의 안건이 있을 때 마다 모여서 문제를 논의하던 기관이다.  

 

동주사공의 증손자인 허조(操)는 고려 32대 임금 우왕 3(1377)년 판관(判官)의 직책으로 정사방 과거에 합격한 후 전라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동주사공의 손자 허유(儒)는 고려 시대 제사에 관한 업무를 맡아 보던 관청인 도제고(都祭庫)에서 부사(副使, 6품관 이상)를 역임했으며 허유(儒)의 첫째 아들 허염(濂)은 사헌부의 규정(糾正, 종6품)을 역임했는데 고려 시대 명문 집안으로서 500년 동안 대대로 벼슬을 해 온 귀족 집안, 그리고 고려 최고의 관직을 역임한 공(公)의 아버지 문경공 허공(珙)의 가세(家勢: 집안 형편)로 보아 첫째 아들인 동주사공과 그 후손들은 당연히 공(公)의 동기(同氣: 형제와 자매)와 그 후손들 처럼 수도인 개성(開城) 또는 그 인근에 세거(世居)하며 벼슬길에 나가거나, 아니면 조상의 뿌리가 깊게 드리워진 양천 허문의 세거지, 양천현(현재의 서울시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세거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동주사공의 증손자인 14세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 허호(灝)부터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에 묘를 조성한 것으로 보아 1300년대 중·후반 광혜원으로 이주한 후, 후손들은 그 일대에서 집성 세거하며 묘역을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별한 교통 수단이 없던 시절, 동주사공의 후손들이 어떤 연유에서 고려의 수도 개성으로부터 약 150km, 서울로부터는 약 100km 떨어진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는지 현재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광혜원의 이 묘역은 불행하게도 수백 년 동안 실전되었었다. 이에 충청북도 단양에 거주하던 36세 허유(鍮) 옹이 이 묘역을 찾기 위해 수년 동안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 일대를 답사한 결과 1925년에 광혜원면 광혜원리(재궁동) 및 금곡리 그 일대에서 동주사공의 증손자인 허호(灝)이하 17세 허탁(倬) 4대 7위의 묘를 찾았다. 이후 동주사공 후손들은 광혜원면에 모여 성역수호(聖域守護) 결의와 함께 재궁동에 제각(祭閣)을 짓고 위토(位土)를 마련하여 시향(時享)을 받들어 왔으나 흐르는 세월 속에 제각이 낡아 후손들은 1965년 다시 힘을 합쳐 낡은 제각을 보수하였다. 1972년에는 재궁동에 위치한 17세 고성현령공(固城縣令公) 허건(健)의 묘 위쪽에 동주사공 허정(程), 공(公)의 아들 허선(瑄)과 손자 허유(儒)  3대 6위를 설단(設壇)하고, 이후 시향을 받들어 모셔왔는데, 1989년 이곳이 지방 공업단지로 편입되어 이곳에 위치해 있던 모든 묘를 현재의 금곡선영(金谷先塋)으로 이장하여 동주사공파 묘역을 조성했다. 한편 2003년에는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장기2길 14에 위치한 3층 건물을 매입, 동주사공파 종중의 회관 겸 재실, 진경재(鎭敬齋)로 지금까지 활용해 오고 있다. 2007년에는 동주사공 하계 종중들의 결의로 11월 4일 금곡선영에서 동주사공 이하 3세, 허정(程)·허선(瑄)·허유(儒)의 숭모비를 제막하였으며 또 동주사공파 종중 재실인 진경재(鎭敬齋)를 증축 보수하고 연혁기를 완성하는 한편 동주사공 종중의 발자취를 담은 《진경재 80년사》를 발간했다.   


한편 2010년에는 동주사공의 둘째 아들 허기(琪)의 손자, 범매당(泛梅堂) 허균(筠)의 후손들이 범매당공을 비롯, 범매당공의 아버지 허승(昇)과 할아버지 허기(琪) 이렇게 세 분의 숭모비를 동주사공 묘역에 세우고 동주사공과 함께 시향을 모시니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금곡리의 동주사공파 묘역은 동주사공파 종중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범매당공 후손들은 평안북도 구성(龜城)을 중심으로 세거해 왔으나 현재 이 곳이 북한 지역이기에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그곳에 위치한 조상의 묘를 방문할 수 없는 실정이다. 범매당공의 후손들에 의하면 범매당공의 할아버지인 허기(琪)와 공(公)의 아버지 허승(昇)의 묘는 현재 실전 했으나 허균(筠)의 묘는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염잠동에 위치하고 있다 한다.  


동주사공파 종중은 하계로 21세 허방(邦: 동주사공의 장손계)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낭천공파(狼川公派), 18세 허천익(天益)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참의공파(參議公派), 18세 허천적(天迪)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참판공파(參判公派), 17세 허작(作)을 파조로 모시는 현감공파(縣監公派), 16세 허양(讓)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사직공파(司直公派), 16세 허간(幹)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도사공파(都事公派), 15세 허계(季)를 파조로 모시고 있는 판관공파(判官公派), 20세 제학공 허관(灌)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제학공파(提學公派), 14세 허균(筠)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범매당공파(泛梅堂公派), 이렇게 9개 파로 현재 분파되어 있으며 후손들은 지난 500년간 주로 충청북도 진천, 단양, 경상북도 영주, 예천, 경상남도 밀양, 고성, 그리고 평안북도 구성(龜城) 등을 중심으로 세거해 왔으나 현재는 대한민국 전역에 분포하여 거주하고 있다. (동주사공파 파계도 참조) 11세 동주사공 허정(程)의 시제는 매해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금곡리 산 6-3에 위치한 동주사공파 종중 묘역에서 거행된다. 

2. 판도좌랑공파

판도좌랑공파 종중은 10세 문경공 허공(珙)의 셋째 아들인 11세 판도좌랑(版圖佐郞) 허관(冠)을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는 종중이다. 판도사의 좌랑(佐郎)은 정6품 관직으로 고려 시대 상서6부(尙書六部) 등에서 업무를 보았던 중견 실무자인데 상서6부는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 1(1275)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가 개편될 때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 네 개로 개편된 중앙 정무기관 중 하나이다. 판도사는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돈과 곡식)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상서호부(尙書戶部)의 새로운 이름이다. 고려 시대의 상서6부는 고려 제34대 임금이자 고려 시대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1(1389)년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이렇게 육조(六曹)로 개편된 후 조선 시대에도 이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다. 육조의 기능이나 권한은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조선의 새로운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어 시행에 들어가는 1485년까지 약 90년 동안 조선 왕조 시대 별로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으나 큰 틀에서 고려 시대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판도좌랑공은 송분(宋玢)의 딸인 여산 송씨(礪山宋氏)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인 문정공(文正公) 허백(伯)은 고려 제27대 임금 충숙왕 때 정사방 을(乙)과 3위로 문과 급제한 후, 31대 임금 공민왕 5(1356)년 7월, 그 벼슬이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현재의 부총리)에 이르렀으며, 둘째 허선(僐)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에, 넷째 허교(僑)는 개성윤(開城尹)을 지냈다. 셋째인 딸은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천선(李千善)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천선(李千善)은 민부전서(民部典書) 를 역임한 이윤온(李允蒀)의 아들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등의 관직을 지냈다. 조선 시대 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판도좌랑공의 후손들은 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 현재는 양천 허씨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판도좌랑공 후손들은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상신(相臣,정승) 5명, 공신(功臣) 8명, 청백리(淸白吏) 7명, 호당(湖堂) 6명, 등 많은 명현(名賢)과 상경(相卿: 장관 이상의 벼슬)을 배출하며 명실공히 양천 허문의 중심축(中心軸)으로 종족(宗族: 동성동본의 일가)을 이끌어 왔는데 고려 왕조가 멸망한 후 고려의 수도 개성을 떠나 경기도 장단과 그 일원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0세조 문경공 허공(珙)의 묘가 경기도 장단군 어룡리에 위치한 것과 달리 판도좌랑공의 묘는 보(譜: 족보)상에 개성부(開城府) 삼수리(森樹里)에 위치해 있다 하고,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역임한 판도좌랑공의 첫째 아들 허백(伯)은 개성 서쪽 전포(錢浦)에 묘를 썼으며, 전리사판서를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되기 4년 전에 돌아가신 판도좌랑공의 증손자 야당공(埜堂公) 허금(錦) 또한 개성 남쪽 수우리(修隅里)에 묘를 쓴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 말기, 당시 과거를 거쳐 대부분 높은 벼슬을 역임한 판도좌좌랑공과 공(公)의 가족 및 자손들은 등청(登廳, 관청에 출근함)을 하기 위해서라도 할아버지, 아들, 손자 등 여러 대(代)가 개성의 도성 안 또는 개성 인근에서 한 집 또는 이웃하여 함께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판도좌랑공의 묘가 위치한 삼수리가 현재의 어느 곳인지 정확한 지명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으나 개성 서쪽에 위치한 전포(錢浦)와 개성 사이라는 말이 전한다.  


장단현 고지도에는 문경공 허공(珙)의 묘가 위치한 장단군의 어룡포(魚龍浦, 어룡리)가 지도 좌측 중간에 표시되어 있는데 어룡포 지명 바로 옆에 허산(許山)이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이 어떤 연유에서 허산(許山)이라 불리워졌는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나 문경공이 잠들어 계신 곳의 산을 허산(許山)이라 부르는 것은 아닌지 문경공이 잠들어 계신 산이 아니라면 양천 허씨와 어떤 연관이 있는 산인지 궁금증을 만들어내는 이름이다. 어룡포는 개성으로부터 약 8.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진서면에 속해 있었으나 1972년 12월 28일 대한민국에 속한 장단, 진동, 진서면이 함께 파주군에 편입되었다. 어룡포는 외부의 출입이 차단된 비무장 지대 안의 마을, 대성동 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곳이다. 이 마을에는 2015년 4월 기준으로 49세대 20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1년에 최소 8개월 이상 의무적으로 마을에 거주해야만 한다. 주 수입원은 농업이다. 


반면 조선이 개국된 후 돌아가신 야당공의 첫째 아들 15세 매헌공(梅軒公) 허기(愭)는 장단군 판부리(현재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에 묘를 썼는데 이후 매헌공의 후손들은 6.25 한국전쟁 전까지 근 520년 동안 장단군 일원에 집성 세거하며 묘를 조성했다. 장단군 북동쪽에 경계를 이루고 있는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는 미수 허목(穆)의 고조인 18세 허원(瑗)의 묘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 6(1511)년 쓰여진 이래 현재까지 500년 동안 미수 허목(穆)의 종손계가 묘역을 수호해 오는 한편 현재까지도 종손계의 묘를 지속적으로 조성해 오고 있다. 물론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 4(1498)년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 중종 14(1519)년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 등 각종 변란 등으로 인해 일부 후손들은 집성 세거지 였던 경기도 장단을 떠나 충청북도 충주 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으며 다른 일부 후손들 또한 1650년대를 지나며 경기도 용인, 광주, 등 새로운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판도좌랑공의 첫째 아들 문정공(文正公) 허백(伯)은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인 딸은 여흥군(驪興君) 민변(閔抃)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민변(閔抃)의 첫째 아들 민제(閔霽)의 따님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니 원경왕후의 할머니가 바로 문정공 허백(伯)의 따님이다. 원경왕후는 태종과의 사이에서 8남매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양녕대군이고, 둘째 아들이 효령대군, 셋째 아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이다. 문정공의 외손 민제(閔霽)는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 7(1398)년 여흥백(驪興伯)으로 봉해졌는데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종의 스승이며 장인이었던 공(公)을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으로 다시 봉했다. 


세종대왕의 큰 형님인 양녕대군의 증손녀는 조선 중기 남인(南人: 조선 중기 사색(四色) 당파(黨派)의 하나)의 영수 미수(眉叟) 허목(穆)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미수공은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錙)의 현손(玄孫, 4세손)으로 14대 임금 선조조(宣祖朝)부터 16대 임금 인조조(仁祖朝)까지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손녀 사위이다. 또한 1392년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없애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운 후 자신이 조선의 임금으로 등극하자 고려조에 충성하던 신하가 어찌 한 하늘 아래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있느냐며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을 지켜 『두문동 72현』에 이름을 올린 판도좌랑공의 증손자 야당공(埜堂公) 허금(錦)은 부인 원주 원씨(原州元氏)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인 매헌공 허기(愭)만이 대(代)를 잇고 나머지 세 아들은 모두 대(代)를 잇지 못했다. 첫째 딸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李嵒)의 손자이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고려 제32대 임금 우왕 11(1385)년 문과에 급제한 이원(李原)과 혼인을 하였는데 이원(李原)은 고려 말부터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때는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공(公)의 둘째 딸은 민대생(閔大生)과 혼인을 하였는데 민대생(閔大生)의 셋째 딸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와 혼인을 하니 허금(錦)의 둘째 딸은 한명회(韓明澮)의 장모가 된다. 이렇듯 양천 허씨는 비록 그 수가 적지만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왕가 및 명문 벌족(閥族) 집안들과 지속적인 혼인 관계를 맺는 한편 학문도 게을리하지 않아 조선 시대에만 9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무과(武科)와 사마시(司馬試: 진사 및 생원시험)까지 포함하면 양천 허씨의 급제자 수는 아마 두 배 이상이 될 것으로 생각되나 무과와 사마시 방목(榜目, 합격자 명단)이 모두 전하지 않아 안타깝게 생각한다.   

 

판도좌랑공의 첫째 아들 문정공(文正公) 허백(伯)의 두 아들 중 첫째 아들인 허경(絅)은 고려 27대 임금 충숙왕 5(1336)년 병자방 을(乙)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으며 공(公)의 둘째 아들 허강(綱)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허강(綱)의 손자 용진공(龍津公) 허징(徵)과 송암공(松菴公) 허손(愻) 형제 또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마음으로 고려의 수도였고 또, 당시 조선의 수도이던 개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함경북도 길주와 제주도로 은둔(隱遁: 세상일을 피하여 숨음)하여 그 뿌리를 내렸다 한다. 용진공 허징(徵)은 후일 『두문동 72현』에 추가로 이름을 올렸는데 현재 중국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양천 허씨 중 많은 수의 선대(先代: 조상)가 함경북도 길주 및 그 주변 지역에서 살았다 하니 이들은 아마도 용진공 허징(徵)의 후손일 것으로 추측된다. 


허경(絅)의 외아들인 야당공(埜堂公) 허금(錦)은 고려 제31대 임금 공민왕 6(1357)년 18세의 나이로 정유방 병(丙)과에 5위로 합격한 후 벼슬이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는데 학문이 높아 당시 학문을 연구하고 임금을 시종케하던 진현관(조선 시대 집현전의 전신)의 제학(提學)을 역임하기도 했다. 


판도좌랑공의 둘째 아들 허선(僐)의 후손들은 경기도 김포를 비롯 안성, 용인, 충청남도 홍성 등지에, 셋째 아들 허교(僑)의 후손들은 강원도 이천군을 중심으로 각각 묘역을 조성하고 집성을 이루며 살았다. (이천군은 현재 북한에 속해 있다.) 


판도좌랑공의 장손계는 광주목사와 종묘·제향 등의 업무를 관장한 봉상시(奉常寺)의 장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한 15세 매헌공(梅軒公) 허기(愭)의 아들 대(代)와 손자, 그리고 증손자 대(代)에서 분파를 하게 되는데 매헌공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으며, 공(公)의 첫째 아들 양양도호부사 허비(扉)가 전의 이씨(全義李氏)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둘째 아들 자산군사 허추(樞)가 전주 최씨(全州崔氏)와의 사이에서 3남 6녀를 두었다. 조선 시대 양천 허문의 정승과 판서는 모두 매헌공 허기(愭)의 후손이다.    


매헌공 허기(愭)는 고려 32대 임금 우왕 6(1380)년 16세의 나이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했으며 3년 후인 우왕 9(1383)년 19세의 나이로 다시 왕승(王昇) 방(榜)에 급제했는데 어려서부터 글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다. 그러나 공(公)의 나이 28세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은둔을 하는데 조선은 공(公)을 중용하려고 여러 벼슬을 내리나 번번히 사양했다. 제3대 임금 태종 때 다시 광주목사 벼슬을 내리니 공(公)의 사양이 자칫 조선 왕조에 반대하는 것으로 비추어져 후손들에게 해가 미칠까 봐 공(公)은 마지못해 부임을 했다 한다. 


공(公)의 첫째 아들 허비(扉)는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를 지냈으며 증손인 허종(琮), 허침(琛) 형제의 벼슬과 지위가 정승에 이르자 공(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허종(琮), 허침(琛) 형제를 비롯하여 미수 허목(穆, 우의정), 묵제 허적(積, 영의정), 양평군 허준(浚) 등 공(公)의 후손 대부분은 경기도 장단, 연천, 광주, 충주 등을 중심으로 인근에 묘역을 조성하며 집성 세거해 왔다. 둘째 아들 허추(樞)는 지자산군사(知慈山郡事)를 지냈는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20세 초당공(草堂公) 허엽(曄),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던 공(公)의 첫째 아들 허성(筬), 둘째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동인(東人)의 선봉에 섰던 허봉(篈)과 그의 동생으로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蛟山) 허균(筠), 허균(筠)의 누나인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리고 조선 말기 벼슬이 이조판서에 오른 성재(性齋) 허전(傳) 등이 허추(樞)의 후손이다. 지자산군사를 지낸 16세 자산공(慈山公) 허추(樞)의 후손들은 주로 경기도 용인, 청주, 강릉, 포천 등지에 터전을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판도좌랑공의 후손들은 현재 크게 10개의 지파로 나뉘어져 있는데 16세 허비(扉)의 첫째 아들로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지낸 허손(蓀)의 두 아들 모두가 정승을 지냄으로 해서 우의정을 지낸 허손(蓀)의 첫째 아들 충정공(忠貞公) 허종(琮)이 충정공파(忠貞公派)의 파조로, 좌의정을 지낸 둘째 아들 허침(琛)이 문정공파(文貞公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허비(扉)의 둘째 아들인 합천군수(陜川郡守) 허훈(薰)이 합천공파(陜川公派)의 파조로, 셋째 아들인 영월군수(寧越郡守) 허지(芝)가 영월공파(寧越公派)의 파조로, 넷째인 전부(典簿) 허형(蘅)이 전부공파(典簿公派)의 파조로, 지자산군사(知慈山郡事) 허추(樞)가 자산공파(慈山公派)의 파조로, 그리고 15세 용진공(龍津公) 허징(徴)은 용진공파(龍津公派)의 파조로, 15세 송암공(松菴公) 허손(愻)은 송암공파(松菴公派)의 파조로, 사재시(司宰寺)의 최고 책임자인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정3품)를 지낸 12세 허선(僐)은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의 파조로, 개성윤(開城尹)을 지낸 12세 허교(僑)는 개성윤공파(開城尹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매헌공(梅軒公)의 증손이며 형제 정승으로 유명한 충정공 허종(琮)과 문정공 허침(琛), 형님인 허종(琮)의 후손들은 주로 경기도 장단면 우근리를 중심으로 세거했으며, 동생 허침(琛)의 후손들은 경기도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세거했다. 임진왜란 때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굳게 지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우고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른 부훤당(負暄堂) 허욱(頊)은 충정공 허종(琮)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17세 합천공(陜川公) 허훈(薰)의 후손들은 경기도 연천을 중심으로 세거했으며 후손으로는 강직한 성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19세 동애공(東崖公) 허자(磁), 남인(南人)의 영수로 정치보다는 학자로 유명했으며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대왕으로부터 노년(老年: 늙은 나이)에 살 집을 하사받은 22세 우의정(右議政) 미수(眉叟) 허목(穆), 학문이 높아 유림(儒林: 유교의 가르침을 배우는 학자들)으로부터 추앙받던 22세 관설(觀雪) 허후(厚)와 31세 심석(心石) 허헌(憲) 등이 있다. 


합천공의 첫째 동생인 영월공(寧越公) 허지(芝)의 후손들 또한 경기도 장단을 중심으로 살아왔는데 《동의보감》의 저자 20세 양평군(陽平君) 허준(浚)이 영월공의 증손자다. 영월공의 자손은 많이 번성하지 못했는데 이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였던 영월공의 장손(長孫: 맏손자) 19세 허반(磐)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류되어 화(禍: 재앙)를 입은 것도 큰 이유라 생각된다. 조선 말기 《동의보감》의 저자 양평군(陽平君) 허준(浚)의 9대손 허도(堵)가 경기도 장단으로부터 황해도 해주(海州)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지역이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허도(堵)와 그 일족들 대부분이 해주 또는 그 인근 지역에, 아니면 북한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다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영월공의 후손들은 현재 그 수가 아주 적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합천공의 둘째 동생인 전부공(典簿公) 허형(蘅)의 후손들은 충청북도 충주(忠州)를 중심으로 묘역을 조성하며 집성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는 전부공의 손자인 19세 허초(礎)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집성 세거지였던 경기도 장단군을 떠나 처가 집이 있던 충청북도 충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후손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20세 한천공(寒泉公) 허잠(潛),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 12(1671)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묵재공(默齋公) 허적(積) 등이 있다.

 

이렇듯 양천 허문의 정승과 판서, 그리고 지방관 대부분이 15세 매헌공 허기(愭)의 후손들 중에서 배출되니, 이 후손들이 양천 허문의 중심축이 되어 족보 간행은 물론 일족(一族: 조상이 같은 겨례붙이) 전체의 종사(宗事: 종중 일)를 이끌어 갔다. 중종 24(1529)년 발간된 양천 허씨 최초의 족보인 기축보(己丑譜), 제18대 임금 현종 12(1671)년에 발간된 두 번째 족보 신해보(辛亥譜) 등, 족보 간행과 관련된 많은 재원 조달과 노력은 모두 주요 관직을 지냈거나 관직에 있던 매헌공 후손들이 사재를 거출하고 또 시간과 정성을 쏟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11세 판도좌랑공 허관(冠)의 후손들은 장손계를 포함 대부분이 경기도 장단군 일원에서 명문벌족(名門閥族)의 지위를 유지하며 고려 후기부터 약 300여년간 집성으로 모여 살다가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 3(1498)년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 중종 14(1519)년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을 포함 일본과의 전쟁인 임진왜란(1592년), 후금(後金)과의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그리고 청나라와의 전쟁인 병자호란(1636년 12월) 등 혼란했던 중앙 정치와 난리를 피해 일부 후손들이 가깝게는 충청도 멀리는 경상도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그 지역에서 묘역을 조성하며 정착했다. 그러나 장단, 연천, 포천 등의 지역에서 선조들의 묘를 관리 수호하며 세거해 왔던 장손계와 그 일족들은 왜란이나 호란 등의 혼란기 동안 잠시 고향을 떠나 피신을 하기도 했으나 다시 조상 곁으로 돌아와 길게는 700여년, 짧게는 500여년 동안 꿋꿋하게 조상의 묘역을 수호하며 살았다. 양천 허씨 족보에 수록된 판도좌랑공과 그 자손들의 묘소를 고찰해 볼 때 판도좌랑공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 4세손)인 매헌공 허기(愭)가 개성으로부터 현재의 장단에 처음으로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한민족은 일본의 패망으로 36년간 지속되어 온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당시 승전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사회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위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나누어 관할하기 시작했는데 남과 북이 합쳐지지 못한 채 남쪽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북쪽에서는 9월 9일 각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과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선포되어 두 개의 정부가 탄생했다. 고려가 936년 후 삼국을 통일한 이후 천 년만에 한반도가 다시 두 개로 나뉘어져 ‘한반도 분단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로 인해 장단과 연천 포천 등지에 살던 판도좌랑공 후손들 중 일부는 북한에 편입되어 대한민국으로 편입된 지역에 살던 가족들과 서로 왕래를 할 수 없는 비극의 이산 가족이 되었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1953년 7월까지 약 3년 동안 펼쳐진 6.25 한국전쟁은 휴전선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계선으로 남과 북을 다시 한번 나누어 놓았는데, 남쪽에 있던 경기도 장단 및 개성은 북한으로 편입되었으며, 과거 북한에 편입되어 있던 경기도 연천과 포천 일부가 남쪽으로 편입되니 또 다른 형태의 가슴 아픈 이산 가족을 만들어 냈다. 한국전쟁 전, 장단에 거주하며 15세 매헌공 허기(愭) 등 선대의 묘소와 위토(位土)를 일족으로터 위임받아 관리해 왔던 종손 허영(永)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현재 그 생사(生死: 삶과 죽음)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경기도 장단에 거주했던 일족들 중 일부가 한국전쟁 중 남쪽으로 내려와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었는데, 이 일족들은 현재 당시 장단에 남았던 일가 친척들과 왕래(往來)는 물론 서로의 안부(安否)조차 알 길이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18세 충정공 허종(琮)의 현손 청산공(靑山公) 허주(晭)의 후손들인데 고향 장단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1975년 ‘장단종친회’라는 종회 조직을 만들고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가월리에 ‘재북 선조 영단’을 조성, 장단 선영에 모셔져 있는 선조들에 대한 제사를 지금까지 모셔오고 있다. 장단종친회는 이후, 청산공의 후손 이외에도 충정공과 충정공의 동생 문정공 허침(琛), 그리고 개성윤공 허교(僑)의 후손들을 종원으로 받아들여 현재 종원간의 교류는 물론 종사활동을 활발하게 해 오고 있다. 한편 1984년, ‘서울 올림픽’ 경기장 조성과 관련 서울시의 강동구청은 강동구 둔천동에서 방치되어 있던 충정공 후손, 26세 선략장군(宣略將軍) 허성(晟)의 묘를 강제철거 하려하였는데 이 소식을 접한 장단총친회 종원들이 공(公)을 파주시 적성면 ‘장단종친회’ 묘역으로 이장 모시기도 했다. 


11세 판도좌랑공 허관(冠)의 묘는 양천 허씨 족보상에 그 위치가 개성시(開城市) 삼수리(森樹里)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현재 북한에 편입되어 있어 묘소를 방문하고 싶어도 방문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연유로 1994년, 공(公)의 후손들이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에 위치한 20세 습(襲) 제양군(齊陽君) 허순(淳) 묘역(墓域) 옆쪽 건너편에 11세 판도좌랑공 허관(冠), 공(公)의 첫째 아들 문정공(文正公) 허백(伯), 셋째 아들 개성윤공(開城尹公) 허교(僑), 공(公)의 손자 지신사공(知申事公) 허경(絅), 공(公)의 증손자 야당공(埜堂公) 허금(錦), 공(公)의 현손 매헌공(梅軒公) 허기(愭), 공(公)의 5세손 양양공(襄陽公) 허비(扉), 공(公)의 6세손 재령공(載寧公) 허손(蓀), 7분의 숭모단(崇慕壇)을 설단(設壇)하고 매해 10월 첫째 일요일 많은 후손들이 모여 제향(祭享)을 정성스럽게 받들고 있다.  


판도좌랑공 후손들은 공(公)의 제일 큰 형님인 동주사공 허정(程)의 후손들과 제일 막내 남 동생인 대제학공 허부(富)의 후손들이 이미 각각 『동주사공파 중앙종회』, 『대제학공파 종회』 대종중(大宗中)을 만들어 운영 해 온데 반해 2006년부터 ‘판도좌랑공 숭모회’라는 조직으로 판도좌랑공 시제 등 종중 행사를 주관해 왔다. 


판도좌랑공 후손들이 종회를 구성하지 않고 숭모회라는 작은 조직을 만들어 운영해 온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 처럼 공(公)의 묘가 현재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후손들이 묘소 관리 및 수호 등을 할 필요가 없는 형편이고, 더하여 판도좌랑공 하계의 10개 종중이 각각 해당 문중을 잘 이끌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이 문중들의 옥상옥(屋上屋)이 될 수 있는 거대한 조직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데 기인한다. 


수입이 없는 ‘판도좌랑공 숭모회’는 판도좌랑공의 시제를 모시기 위한 재원 모두를 판도좌랑공 하계 10개 문중의 분담금으로 충당하고 있는데 『판도좌랑공파 종회』가 만들어지면 종회 운영과 관련된 새로운 직책은 물론 회의 등과 관련한 각종 경비가 증가할 것은 자명(自明: 확실)한 일이었다. 이 증가분 또한 고스란히 10개 문중에게 전가(轉嫁: 책임 등을 넘김)될 것이기에 원로들은 『판도좌랑공파 종중』 보다 1년에 한 번씩 시제를 주관하고 결산할 수 있는 작은 조직체의 숭모회를 운영하며, 필요시 10개 회장단이 모여 협의하는 것이 비용 절감 등 바람직하다 생각하여 『판도좌랑공파 종회』 구성에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13년, 판도좌랑공의 현손인 15세 매헌공 허기(愭)의 묘(비무장 지대에 위치) 주변 종중 토지가 국가로 귀속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관련 문중들은 이곳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장단 종친회를 대표로 내세워 이 토지를 국가로 부터 되찾기 위한 소송을 진행했었다. 그러나 18세 허종(琮)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충정공파 종회의 일부 종원들이 이 토지는 매헌공의 장손인 충정공파 종회가 찾아 충정공파 종회 명의로만 등기를 해야 한다 주장하며 충정공파 종회의 명의로 원고(原告)인 장단 종친회에 대항하여 피고 보조참가(被告補助參加)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장단 종친회는 그 모임의 성격이 종중이 아닌 하나의 친목 단체라고 증언하여 결국 장단종친회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토지 반환소송’에서 패소하는데 일조(一助, 도움을 줌)를 했다. 장단 종친회 및 관련 종중 대표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물론 대종회 및 매헌공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관련 종중 대표들이 양천 허씨끼리 법원에서 싸우면 안된다며 이들에게 피고 보조참가 신청을 철회해 달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 등으로 인해 2014년 판도좌랑공 시제 때 판도좌랑공파 총회를 개최하고 ‘판도좌랑공 숭모회’명칭을 『판도좌랑공파 종회』로 변경하는 한편 관련 정관 등 일체를 새로 만드니 이것이 판도좌랑공파 종회의 탄생이었다.

3. 대제학공파

대제학공파 종중은 10세 문경공(文敬公) 허공(珙)의 다섯째 아들인 허부(富)를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는 종중으로 공(公)의 벼슬은 고려 제26대 임금 충숙왕 때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이르렀다. 


고려 왕조가 퇴색해지면서 정치·사회가 불안하던 고려 말기부터 새로운 왕조 조선이 개국하는 1392년을 전·후하여 일부 양천 허씨들은 주 거주지였던 고려의 수도 개성과 양천 허씨의 발원지인 공암현(孔巖縣, 현재 서울 강서구 일원)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정착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정든 터전을 떠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당시의 왕조 시대 속에서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수선했던 시절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사연은 각 문중마다 다르리라 생각된다.  


대제학공의 첫째 형님인 동주사 허정(程)의 후손, 그리고 셋째 형님인 판도좌랑 허관(冠)의 후손 대부분이 고려말 과 조선 초에 개성과 양천현을 떠났는데 동주사공의 후손들은 개성과 양천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으로, 판도좌랑공의 후손들은 인근 지역인 경기도 장단, 연천, 용인, 안성 등지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제학공의 자손 대부분은 공(公)의 두 형님 자손과 달리 양천 허씨의 발원지이며 세거지였던 공암(孔巖) 땅의 허상곡(許相谷,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을 중심으로 공(公)의 5대 손(孫)인 허린(磷: 15세 이천공 허장손의 아들), 허효순(孝舜: 15세 양안공 허형손의 아들), 16세 허형(亨: 승지공파 파조) 등의 가계(家系)가 조선 시대 전기인 1500년대까지 한양(漢陽: 서울의 옛 이름)을 포함 허상곡 일원에 계속해서 집성으로 세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 시대의 개성과 마찬가지로 왕궁(王宮)이 위치했던 것은 물론 당시 정치·경제·교육 등 모든 업무의 중심지였던 한양(현재의 서울)은 양천 허씨들이 수백년 동안 집성 세거했던 공암현으로부터 약 15km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한양에는 대제학공의 후손 뿐 아니라 동주사공과 판도좌랑공의 후손으로 중앙 관청에 관직을 갖고 있거나 새롭게 정착하여 거주해 온 양천 허문이 이웃 또는 인근에 살면서 항상 서로 가깝게 왕래햇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조선이 개국할 시점에서의 양천 허씨 중심 세수(世數)는 15세 전·후이다. 물론 양천 허씨의 제일 막내 집인 대제학공 후손들의 경우는 13세 전·후가 될 것이다. 생몰년이 명확한 판도좌랑공의 현손 15세 허기(愭)는 1365년에 출생하여 고려 제32대 임금 우왕 9(1383)년 왕승방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한 후 1431년에 돌아가셨는데 양천 허씨의 대파(大派)가 형성되는 11세를 기준으로 보면 동주사공과 대제학공 후손들을 막론하고 공(公)의 세대 중 가장 먼 친척이 10촌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1959년 간행된 《기해보(己亥譜)》를 토대로 양천 허씨 15세의 숫자를 세어보면 남자가 51명, 여자가 36명이다. 《기해보》를 근거로 당시에 4대(代)가 함께 살았다 가정해도 조선 초기 한반도 전역에 거주했던 양천 허씨 남자의 수는 총 200명이 넘지 않으며 분가(分家) 등을 감안한 가구 수로 따져도 50가구 내외이기에 어느 곳에 살고 있던 서로 의지하며 가깝게 지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제학공 후손들이 집성 세거했던 허상곡(許相谷)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 지역으로 대제학공의 후손 15세 양안공(襄安公) 허형손(亨孫)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양안공 종중의 종산 약 89,256m2(약 27,000평)이 위치했던 그 일대를 부르는 이름인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 말부터 이렇게 불리워진 것으로 전해진다’고 허주(炷) 전 양천군파(陽川君派) 회장을 비롯 양안공 종중의 원로들은 말하고 있다. 고려 시대 말부터 이 일대를 허상곡이라 불러왔다 하나 서울의 도시 개발이 끝난 지금 이러한 별칭 이름을 기억해 부르는 노옹(老翁: 늙은 남자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 추축된다. 


고려 개국 이전부터 공암현(양천현)에서 부농으로서 삶을 영위해 왔던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宣文)이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하여 고려 태조가 식읍(食邑)으로 하사한 양천현, 현재의 국무총리 직을 역임한 10세조 문경공 허공(珙)의 첫째 부인,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장례가 양천현에서 치러졌다는 고려사의 기록 등 여러 자료를 고찰해 볼 때 양천 허씨는 양안공 종중의 종산이 위치했던 허상곡(서울시 등촌동) 뿐만이 아닌 양천현(지금의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 일대를 소유한 권문 세가로서 삶을 영위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제학공의 두 형님 후손들이 수백년 동안 뿌리를 내려왔던 양천현을 주 세거지로 만들지 않은 것에는 여러 사연들이 있었겠지만 대제학공 후손들은 공(公)의 두 형님 후손들과 달리 허상곡이 위치한 양천현에서 “세업충효(世業忠孝)하고 여력문장(餘力文章)”하라는 대제학공의 가르침을 받들며 1500년대까지 집성 세거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묘역을 조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제학공은 부인 교하 노씨(交河盧氏)와의 사이에서 허신(信), 허순(順), 허유(猷), 허저(褚), 허저(貯), 허완(完) 여섯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장손계인 공(公)의 첫째 아들 허신(信)의 후손들은 증손자 대(代)에서 첫째 증손자로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지낸 15세 허장손(長孫)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이천공파(伊川公派)와 허장손(長孫)의 첫째 동생인 양안공(襄安公) 허형손(亨孫)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양안공파(襄安公派)로 분파했다. 허장손(長孫)의 막내 동생인 허종손(從孫)은 손자 대에서 대(代)를 잇지 못했다. 장손계인 이천공 허장손(長孫)의 후손들은 번성하지 못하여 아주 소수의 후손들 만이 현재 서울을 포함,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반면 양안공 허형손(亨孫)의 후손들은 현재 대제학공의 후손들 중 자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대제학공 종중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허상곡에서 대(代)를 이어 세거해 왔던 양안공 후손들은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사회가 혼란했던 조선 중기에 개인적인 형벌 문제까지 겹쳐 양천현의 허상곡을 떠나 가깝게는 경기도 용인으로 부터 멀리는 전라북도 전주 등 타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양안공 후손들은 하계로 내려 오며 지속적으로 분파를 하는데 양안공의 셋째 손자로 강서현령을 지낸 허윤굉(允宏) 후손들은 현령공파(縣令公派)로, 장사랑을 지낸 다섯째 손자인 허윤문(允文) 후손들은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로 분파했다. 물론 현령공 후손들과 장사랑공 후손들 또한 하계 대(代)에서 여러 문중으로 다시 분파를 하여 오늘날까지 가계를 잇고 있다. 

 

대제학공의 둘째 아들 양천군 허순(順)은 양천군파(陽川君派)의 파조가 되었는데 공(公)의 후손들은 고려의 멸망과 함께 한강 중류인 경기도 여주 지방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정착했으며 셋째 아들 허유(猷)와 넷째 아들 허저(褚), 다섯째 아들 허저(貯)는 후손이 끊어졌다. 막내 아들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허완(完)의 후손들은 공(公)의 손자 대(代)에서 부정(副正)을 지낸 공(公)의 첫째 손자 14세 허면(綿)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부정공파(副正公派), 참의(參議)를 지낸 허의(義)를 파조로 모시고 있는 참의공파(參議公派), 만호(萬戶) 벼슬을 지낸 허예(禮)의 손자, 16세 허형(亨)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승지공파(承旨公派) 이렇게 분파했는데 부정공파 후손들은 소(小) 집단으로 분산했고, 참의공과 승지공 후손들은 전라남도 순천과 무안 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집성 번창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대제학공 후손들 또한 타 문중과 마찬가지로 2001년 대제학공파 종회가 정식으로 만들어지기 전까지 시제를 비롯한 선조에 대한 위선사업과 종중의 현안 문제 등은 필요에 따라 각 소파 별 모임에서 논의하여 조치해 왔을 뿐 대제학공 하계 문중 간 상호 방문이나 왕래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대종회 회장이었던 허찬(燦) 회장은 양천허씨대종회 회관 장만 모금 운동과 관련하여 대제학공 하계 각 소파 모임을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니 대제학공 후손들 또한 그동안 소원(疏遠)했던 관계를 뒤로하고 타 문중과 서로 빈번하게 소통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999년 7월 7일 양천허씨대종회가 서울특별시 강동구 성내로6길 42에 대종회 회관 건물을 장만하고 입주하게 되니 대제학공 하계 다수의 자손들 또한 각각 소(小) 종중을 새롭게 결성하게 되었다.  


대제학공 후손들의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허찬(燦) 대종회 회장은 대제학공 소파 모임 원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안이 있을 때 마다 일회성 모임을 갖는 것 보다 대제학공파 종중을 구성하여 후손들 모두가 서로 왕래하며 정기적인 모임도 갖고 또 종원들끼리 서로 친화돈목(親和敦睦)하는 것이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라도 서로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니 원로들 모두가 동감하는 한편 이것이 불씨가 되어 허동기(東基, 31세 순천)가 주관했던 부안 모임, 허현(炫, 33세 양천군파)이 주관했던 평택 모임, 허운(橒, 32세 현령공파)이 주관했던 당진 모임의 대표와 임원들이 수 차례 모임을 거듭한 끝에 허운(橒)의 주관으로 2001년 2월 27일 충청남도 아산 온양에 위치한 장원식당에서 대제학공 하계 20여 소파 대표 종친 모임을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이날 허운(橒)을 임시 의장으로 선출한 후, 그동안의 경과 보고를 들었으며 대제학공파 초대 회장으로 허창욱(昌旭, 32세 강서공파)을 선출하니 허창욱(昌旭)은 이날 모임에서 대제학공파 종회 정관 제정을 주도하고 또 참석자들과 함께 초대 임원을 선출했다. 이것이 대제학공파 종회의 첫 탄생이었다. 


대제학공파 종중은 현재 매년 3월 중순 대의원 정기총회를 개최하며, 양력 4월 15일 대제학공 허부(富), 공(公)의 아들 허신(信), 공(公)의 손자 허도(衟), 공(公)의 증손자 허균(稛) 4대에 대한 시향을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일성재(一誠齋)에서 봉행하는데 대제학공 후손들은 물론, 대종회 임원들을 비롯하여 동주사공, 판도좌랑공 후손 또한 함께 참여하니 11세 대제학공 허부(富)의 시제는 명실 공히 양천 허문의 큰 행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대제학공파 종회가 창립되기 이전, 대제학공파 종중의 큰 뿌리이며 큰집 격인 15세 양안공 허형손(亨孫)의 후손들이 1968년 종중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서울시가 실시한 도시 개발의 일환으로 목동에 위치했던 양안공파 문중의 종산이 수용되면서 이와 관련된 보상금 수령 및 연관된 각종 종사 업무를 담당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양안공파 종회는 대제학공파 종회가 출범하기 이전까지 대제학공 후손들을 대표하여 11세 대제학공 허부(富)의 시제를 주관해 왔으나 양안공 후손들을 제외한 타 문중 후손의 참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제학공파 종중은 하계로 여러 소파들이 구성되어 있으나 양안공파(襄安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양천군파(陽川君派), 승지공파(承旨公派)이렇게 5개 중파(中派) 종중이 현재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들 5개파 하계로 20여개의 소파(小派) 문중 또한 조상에 대한 위선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대제학공파 파계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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