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 본관(관향)

허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 5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것은 세거지(世居地) 뿐이며 현존하는 본관은 양천(陽川태인(泰仁하양(河陽김해(金海) 4본이 관향으로 되어 있다. 


양천허씨는 조선조에서 20 명족(名族)으로 손꼽혔으며 비록 많지 않은 인구로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혀왔다. 


인천이씨(仁川李氏) 허씨에서 갈려나온 성씨이다. 신라 경덕왕(756) 허기(許奇)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마침 안녹산(安祿山) 난이 일어나자 현종(玄宗) 호종하여 공으로 당나라 황실의 ()인〈李氏〉를 사성받고 소성백(邵城伯:소백성은 지금의 仁川) 봉해져 인천이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 

◈ 양천허씨(陽川許氏) ◈ 시조 : 허선문(許宣文) 

한국의 허씨는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 왕비로부터 비롯되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인도의 야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때 큰 배에다 파사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 부인당(夫人塘)으로 들어와 정박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을 갖추고 맞이해 비(妃)로 삼았다' 한다.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는 허선문(許宣文)이다. 공(公)은 공암현(孔巖縣)에서 대부호(大富豪)로써 살았다. 후삼국이 대립을 하던 시기, 고려의 태조 왕건이 견훤군을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중 군량미가 떨어지고 병마(兵馬: 병사와 말)가 매우 피로하여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공()이 식량을 내어 주니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마침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왕건은 공(公)의 충의에 감동하여 (公)을 의부(義父: 수양 아버지)로 모시는 한편, 공암촌주로 봉하여 공암현을 식향(食鄕)으로 하사(賜)하니 (公)은 이로 말미암아 관적(본적)을 공암허씨(孔巖許氏)로 했다. 고려 말에 지명 '공암'이 '양천'으로 변경됨에 '공암허씨'들은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불려지게 되었다. 

양천(陽川)의 지명 변천을 보면 현재의 한강유역 인근으로서 신라시대에는 '제차파의'로 불렸다. 이 지역은 한강의 범람으로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던 지역이었다. 이곳은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가 번갈아 가며 다스렸는데, 고구려 전성기때에는 장수왕이 다스렸으며 삼국통일후인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전국을 9주5경으로 나눌 때 이전의 양동(陽東) 양서(陽書)가 공암현(孔巖縣)이 되었다. 

고려 현종9년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충선왕 2년에 양천으로 명명 되었다. 이후 많은 지명의 변화를 거치며 조선의 고종 32년에 양천현은 양천군으로 개칭되면서 5개면을 두었고 일제 치하인 1914년 3월 행정구역 재편시 양천,통진을 합해 김포군이라 하고 9개면을 두었다. 양천현(양천군)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 경기도 김포 일부에 걸쳐 있었다. 양천 허씨 시조인 허선문의 묘를 포함, 9세조까지의 묘는 현재 실전(묘지가 어느 곳인지 현재 알지 못함)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대종회는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풍곡리 산87-3번지에 시조 설단지를 조성하고 매해 양력 4월 둘째 주 일요일에 전국에서 모인 양천 허씨가 시제를 성대히 모신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선문(宣文)의 손자(孫子) 원(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지제고(知制誥)·태자사의(太子司議)등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정(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후 태자재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정(正)의 아들 재(載)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 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다. 후손 공(珙)은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여 원 부(元 傅) 등과 함께「고금록(古今錄)」을 찬술(撰述)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재령 군수(載寧郡守) 손(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종(琮)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침(琛) 형제가 뛰어났다. 허종과 허침은 형제 정승으로 유명하다.

한편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욱(頊)은 종(琮)의 현손(玄孫)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능창군(綾昌君) 추대사건에 관련, 원주에 유배된 후 배소(配所)에서 임종하였으나 인조 반정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허씨가문(許氏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빼놓을 수 없다. 엽(曄)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선조(宣祖) 때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효원과 함께 동인(東人)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그의 슬하에 성(筬)·봉(篈)·균(筠)·난설헌(蘭雪軒) 4 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나 이들 모두를 공()과 함께 '허씨 5문장가'라 부른다.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목(穆)은 한강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퇴계 이황->한강 정구->미수 허목->성호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루고 있는데, 영남의 학문을 근기지방으로 들여와 근기학파를 형성했다. 당대의 석유(碩儒)인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던 학자로 남인의 영수였으며 학문(學問)이 높았고, 문장(文章)·그림·서예(書藝)에 뛰어났다.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東方)의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일컬어졌다. 공()은 과거를 보지 않았음에도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숙종대왕으로부터 집을 하사 받았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 받은 대신은 황희 정승, 이원익 정승, 그리고 미수공 이렇게 세 분이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른 허적(許積)은 1678년(숙종 4)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이를 사용하게 했으며,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조(宣祖) 때 명의(名醫)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오른 준(浚)은 16년의 긴 세월 동안의 연구 끝에 25 권의 방대한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여 한의학(韓醫學)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현대까지 의성(醫聖)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 배출인물 ] 편을 참고 하세요. 


☞ 집성촌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독정리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지전리, 퇴탄리 
경기도 파주군 고하면 일원 
평북 구성군 동산면 남산동 
충북 청원군 부용면 일원 
평북 구성군 사기면. 방현면 창동 
전북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 

전남 승주군 해충면 일원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일원 
함북 학성군 학서리 일원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1리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상삼리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쌍동리 
함북 길주군 덕산면. 장백면. 양사면 일원 


* 태자태보(太子太保) : 동궁의 종1품 벼슬 
* 수국사(修國史) : 사관의 벼슬(감수국사의 다음으로 2품이상이 겸임) 
* 첨의중찬(僉議中贊) : 첨의부와 도첨의사사의 종1품 벼슬 (현재의 국무총리)
* 궤장(궤杖) : 나라에서 국가에 공이 있는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 
* 기로소(耆老所) :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위해 마련한 경로당 
* 신원(伸寃) : 원통한 것을 풀어줌 
* 능창군(綾昌君) :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아들 
◈ 태인허씨(泰仁許氏) ◈ 시조 : 허사문[許士文] 

태인(泰仁)은 전라북도 정읍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태산현과 인의현의 합명이다. 태산현은 본래 백제의 대시산현을 신라 경덕왕이 태산으로 고쳐 대산, 태산등으로 불렀고, 인의현은 백제때 빈굴, 빈성, 부성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때 무성으로 고쳤고, 고려조에 인의로 고쳤다가 1411년에 태산과 합하여 태인현이 되었다. 
  
태인허씨 세보에 의하면 태인허씨(泰仁許氏)의 시조 허사문(許士文)이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이라 기록하고, 고려 태조 왕건의 부마(駙馬)였으며 시산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사문의 후손 포(褒)가 고려때 기천 현령, 풍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후 태산군에 봉해졌으며, 병부시랑을 역임한 엄(儼)과 그의 아들로 이부시랑을 지냈고 시산부원군에 봉해진 벽(壁)이 유명했다.   

한편 숙종과 예종때 문학이 뛰어났고 청렴 충직하기로 이름난 경(慶)은 여러 관직을 거쳐 중서문하 평장사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그의 아들 6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는데, 둘째 아들 사문(斯文)이 낙안군수를, 넷째 사행(斯行)은 사헌부 감찰을, 막내 사제(斯悌)는 사평(司評)을 지내 태인허씨 가문을 빛냈다. 


☞ 집성촌 
전북 정읍군 정우면 일원 
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 가정리 
전북 부안군 보안면 일원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리, 운곡리 
전북 부안군 행안면 신기리 
전남 화순군 북면 일원 
◈ 하양허씨(河陽許氏) ◈ 시조 : 허강안[許康安]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군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으며,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하양허씨(河陽許氏)는 고려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에 호장을 지냈고 하주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으로 개관하였으며 그후 하양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강안의 손자 허작린(許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허신(許愼)은 호부주사, 동정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귀룡(貴龍)의 아들 주(周)는 우왕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고, 조선이 개국한후 한성부윤,·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개성유후사유후,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허주(許周)의 동생 허조(許稠))는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두루 역임한후 조선세종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에 밝았던 허성(許誠)은 한성부 판윤 주(周)의 아들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재냈다. 허조(許稠)의 아들 허후(許珝)는 문종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단종때 좌찬성이 되어 황보 인, 김종서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외 중추원 부사 허척(許倜)의 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 집성촌 
경북 경산군 하양읍 금호동 
전북 고창군. 정주시 일원 
경북 경산군 와촌면 용전리 
전북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경남 합천군 일원 
◈ 김해허씨(金海許氏) ◈ 시조 : 허 염[許 琰] 

김해(金海)는 경상남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서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국이 되었다. 그후 금관소경으로, 680년에는 김해로 개칭하여 소경을 두었다. 고려 때에는 김해부, 995년(성종14)에는 김해도호부, 1000년(목종3)에는 안동대도호부, 1270년(원종11) 
에는 금녕도호부의 일부가 되었다가 1895년(고종32)에 군이 되었고 1981년에 김해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 허염(許琰)은 가락국 수로왕비인 허황후(許黃后)의 35세손으로 전하며,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그는 고려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의 세거지인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가락군 인전파(駕洛君仁全派), 호은공기파(湖隱公麒派), 중승공린파(中承公麟派), 전직공인부파(典直公仁副派), 증성군구년파(甑城君龜年派), 판서공언룡파(判書公彦龍派), 상서공상파(尙書公相派) 등 크게 7파로 분파되었다. 

고려 충렬왕때 지공거(知貢擧:시험관)를 지낸 유전(有全)이 충숙왕때 가락군에 봉해지고 첨의찬성사에 이어 정승이 되었으며 옹(邕)은 전리판서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렴강직했다. 조선조에 와서는 동지중추부사 백기(伯琦)와 목사 수겸(守謙)이 유명했고, 한말의 의병장 허위(許蔿)는 3백명의 선발대로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려다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외 독립운동가인 겸(兼), 빈(斌), 병률(秉律), 형(炯) 등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 집성촌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모평리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봉수면 죽전리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야시대리 
경남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오도리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갈산동 
강원도 홍천군 동면 속초리, 후동리 
경북 포항시 일원 
경기도 용인군 일원 
◈ 인천이씨(仁川李氏) ◈ 시조 : 허 기[許 奇] 

신라 35대 경덕왕 때 아찬(阿餐) 벼슬을 하던 허기(奇)가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이듬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다. 도의(道義: 도덕상의 의리)로써 귀국하지 못하고 당(唐) 현종을 따라 촉(蜀) 땅에 가서 위험을 함께하며 지냈다. 서기 757년에 난이 평정되니 현종은 허기(奇)의 노고를 가상히 여겨 상를 주고 또 황제의 성인 이(李)씨를 사성(賜姓: 임금이 공신에게 성을 내려주는 것)하였다.


다음해인 758년에 신라로 귀국하니 경덕왕은 4년 만에 돌아온 허기(奇)에게 “그간의 공이 크고 노고가 많았다” 하여 특별히 소성백(邵城伯)으로 봉하고 소성(邵城, 지금의 인천)을 식읍(食邑: 왕족, 공신, 대신들에게 공로에 대한 특별 보상으로 주는 영지)으로 내리니 호수(戶數, 집 숫자)가 1천5백호나 되었다. 그 후 대대로 신라 대신이 되어 소성백에 습봉(襲封: 제후가 윗대의 영지를 물려 받는 것)되고 모두 ‘이허(李許)’ 두 개의 성을 함께 사용하다가 10세인 이허겸(李許謙) 때에 와서 두 개의 성을 버리고 이(李)씨만 사용하게 되어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인천 이씨는 인주 이씨(仁州李氏) 또는 경원 이씨(慶源李氏)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고려 시대의 인천 지명이 인주(仁州)와 경원군(慶源郡)으로 불리웠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시조인 이허겸(李許謙)의 손자 이자연(李子淵)은 세 명의 딸을 고려 제11대 임금인 문종에게 모두 시집을 보냈으며 문종의 제2비인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소생에서 장남은 고려 제12대 임금 순종, 차남은 제13대 임금 선종, 삼남은 제15대 임금 숙종, 4남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니 왕실의 외척으로서 그 권세가 높았던 것은 물론 귀족 가문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다. 문종의 어머니 김씨 또한 공주 절도사였던 김은부(金殷傅)의 딸이자 이허겸(李許謙)의 외손녀 이기도 했다. 한편 숙종의 아들로 제16대 임금이었던 예종 또한 이자겸(李資謙)의 딸을 왕비로 맞아, 인천 이씨는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7대(代) 동안 다섯 명의 왕비를 탄생시킨 고려 왕실의 막강한 외척 가문이었다. 이자겸(李資謙)은 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다.


인천 이씨는 양천 허씨와 더불어 고려의 권문세족(權門世族)으로서 고려 제26대 임금 충선왕이 1308년 복위하여 발표한 교서에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가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재상지종 가문은 총 15개 가문이다. 귀족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이 가문들은 고려 후기 과거시험 등을 통해 더 높은 고위직에 올라 고려의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참여하여 고려를 지배했다. 한편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대토지의 농장 경영이었는데 일부 가문들은 더 많은 토지를 모으기 위해 부정과 수탈(收奪: 강제로 빼앗음)을 일삼기도 했다. 


이렇듯 김해 김씨, 허씨 - (양천 허씨·태인 허씨·하양 허씨·김해 허씨) 그리고 인천 이씨는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후손으로 한 뿌리에서 나온 자손이라 하여 예로부터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관습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