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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후손들은 어떻게 퍼져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본 내용은 양천허씨대종회가 대종회에서 참여회원, 청년회 회원, 부녀회 회원을 대상으로 대종회 허찬 명예회장이 강의했던 뿌리교육 내용 중 하나 입니다. 


양천허씨 후손들은 어떻게 퍼져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세상 사람들은 예로부터 우리 양천허씨를 동방의 갑족 또는 명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양반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고찰해보면 양천허문은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적은 인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과거 등을 통해 높은 벼슬에 많이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학자나 명현, 공신, 청백리 들을 많이 배출하여 타성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데서 연유한다 하겠다.


양반이라는 말은 고려초 과거제도에 의해 문관을 동반, 무관을 서반이라 칭 한데서 유래하는데, 양반은 문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 갈수가 없었고 나라의 특권계급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조선조에 까지 계승 유지되어 왔다. 조선조는 내외(친가/외가) 4대조까지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양반으로 등용시켰으며 평민과 천민은 원칙적으로 등용을 못하도록 제도화 하였다. 양반들은 스스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족보를 만들었고, 대대로 벼슬을 이어가면서 지배 계급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조선의 성리학이 최고로 꽃피우게 되는 조선 중기부터는 양반의 개념이 조금 바뀌어 과거를 보지 않더라도 양반의 후예들을 사대부가 자손이라 칭했으며 많은 양반들이 벼슬보다는 높은 학문을 통하여 유림으로부터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고 서원에 배향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학문이 높은 양반의 후예들은 천거에 의해 과거 없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후 이러한 사대부가들은 학통관계에 따라 당색을 달리하게 되고 벼슬길에도 크게 영향을 준다. 어찌되었건 사대부가 양반들은 사회의 특권층으로 대두 되면서 벼슬이 높아지거나,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책봉되면, 나라로부터 토지를 하사 받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게 된다. 한 가지 공통된 것은 모두가 유학을 신봉하고 학문하는 것을 신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분제도는 1894 고종31년 갑오경장으로 없어졌으나 내려오는 관습으로 생각의 저변에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우리 양천허문이 명문 갑족이라는 것은 다음을 보더라도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1) 고려조에서

     작상자 11인,  관추자  6인,  학사 9인,  상주자 5인, 사원자 2인, 봉군자  14인,  재상지종 15개 성씨 중의 하나. (재상지종은 고려 왕실과 혼인을 할 수 있는 성씨를 말한다)


 2) 조선조

    가) 정승 5인,  찬성 5인,  공신 8인,  호당 6인,  청백리 2인,  봉군자 31인, 시호 24인

    나) 양천세고  7성

    다) 인구 대비 모든 면에서 월등한 양천허문은 고려의 개국과 함께 한 시조부터 많은 후손들이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이 현재의 국무총리나 장관에 이르렀지만, 10세조 문경공 공(珙) 시대에 명실공히 확고한 "명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문경공의 자손들은 어떻게 퍼져 어떤 삶을 살았을까? 


우선 당시 고려사회를 들여다보면 고려는 국교를 불교로 하고 유교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찾는다.


  ○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등용,  승과를 두어 승려 등용, 왕자출가

  ○ 신분제도 엄격해서 귀족, 평민(농, 상, 공) 천민, 노예로의 구분이 뚜렷했다. (귀족과 양반 공존)

  ○ 건국 후 250년이 지난 18대 임금 의종 대에 사회 부패 등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이 의종을 추방한 후, 명종을 임금으로 세우고 근 30년간 정권을 농락했다.

  ○ 무장 최충헌이 무신정권을 토벌하고 몽고군이 침입할 때까지 근 60년간 무신정치를 함. 

  ○ 고려는 1270년부터 공민왕 때까지 약80년 동안 중국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는데, 원의 지배 하에 들 시기인 24대 임금 원종과 25대 임금 충렬왕 시기가 문경공(1233-1291)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원나라는 몽골제국으로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나라의 이름을 대원(大元)으로 고치면서 부른 이름이다. 문경공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 벼슬이 현재의 국무총리에 이르렀으며, 충렬왕 묘정배향공신이다.)

    27 충숙왕, 28 충혜왕  원에 공여


장자  정(程)


 정 배위  행주 기씨

  ○ 공여 기씨  순제의 제2황후  기황후

  ○ 태자 소제  기철의 전횡

  ○ 공민왕 5년 1359 기철 권겸  일당 주살  이시기가 백,  선,   

     선 → 진천

     기 → 평북 구성 

  ○ 그 후 진천에서 수대 은거타가 밀고 등 두려워 각지로 이산



    낭천공파 (방)  영주

    참의공파, 통정공파   고성

    참판공파 (천적)  단양

    사직공파 (양)    예천

    판관공파 (계)    밀양

    제학공파 (경)    함북 회령

    범매당공파 (기)  평북 구성

    등지로 퍼져 세거지를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차자인 숭과 4자인 총은 자손이 이어지지 않아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당시 

    종사적인 입장에서 고려사회를 고찰해 보면 


   종사적인 입장에서 고려를 고찰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 사회

     ○ 이승과 저승의 사생관  완전단절

     ○ 현재(성리학의 개념) 같은 조사숭배 산소  제사  사상 무 

     ○ 사람이 죽으면 화장 또는 매장하면 그것으로 끝  절에서 극락왕생 제 

     ○ 성리학에 의한 죽은 영혼을 현세로 모셔다 제사, 산소수호 관념 무

     ○ 양자로 가계를 잇는 제도자체 무  남녀평등  여자 제 올림  출가 시

    

2남, 4남.  자손 계승 없고


3자  관(冠)

   

   자손들은 개경에서 고려조가 멸망할 때까지 과거 등을 통해 벼슬 이어감.  고려가 망하면서  장자 양천군 백 후손들은 장단에 근거지를 두고, 조선조에도 계속 출사를 함. 경의 자손들은 불사이군의 정신에 따라 용진공 후예는 함경도로 아우 손(송암) 후예들은 제주도로, 매헌공 기의 장손계통은 가솔이 늘어가고 한양이 도읍이다 보니 경기일원으로 퍼져 경기도 광주, 양주, 포천, 연천, 파주, 용인, 원주, 강릉 등지로 세거지를 넓히고, 관의 차자 찬성사 선의 후예들은 안성, 천안, 아산, 홍성, 김포, 포항, 3자 개성윤 교의 후손들은 강원도 이천, 안협 등에 집성을 하면서 양천허문의 주류를 이루는 한편, 조선조 내내 크게 활동을 했다. 


   매헌공 후예

    충정공, 문정공 ⇒장단 – 광주(둔촌동, 공지암).  

      제양군 ⇒포천, 진도, 부여, 가덕도

      교위공 ⇒파주

    합천공 ⇒연천 –청주, 창령, 동두천, 의령, 부여, 구례

      영월공 – 파주 –해주

      전부공 – 충주, 산청, 부천, 나주

    자산공 후예

      봉례 – 황해, 예산

      전적 – 용인, 광주, 포천, 원주, 강릉, 횡성 – 서천

      정간 – 뿔뿔이


5자 부  대제학


     자손들은 양천허문의 본거 세거지인 김포, 서울 강서구 목동 일대 세거함. 서울이 개발되면서 본동일대의 묘  양안공 형손, 강서현령 효순, 윤관, 도 - 4대는 파주(일성재 묘역)로, 윤관 2자  도사공 규 후손은 남원(남원양씨), 임실, 보성으로, 윤굉의 후손들은 당진, 안성으로 이주하여 집성함. 

     부의 2자 순 – 광주, 안성

          6자 완 → 해 – 문경공 묘역 – 안성

                    질 – 서울 연건방, 광주

                      질 → 의 – 담양, 경기, 여주

                            예 – 연산폭정에 순천 (형) 세수재



  양천허씨 후예들은 전국 각지로 퍼져 살게 되지만 모두가 명문의 후예답게, 비록 벼슬길로부터 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학문을 닦으며 양반으로서의 긍지를 지니며 어느 지방에 살건 주위로부터 존경받으며 살아왔다. 


   비록 현대에 귀천의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우리 양천허문 각자의 피 속에는 이 같은 훌륭하신 조상님들의 DNA가 흐르고 있다. 우리들은 물론 자라나는 어린 세대, 또 앞으로 태어날 차후 세대에 까지 우리허문의 위상과 조상님들의 업적을 널리 알려 이들이 긍지를 가지고 세상을 떳떳하고 자신 있게 그리고 일족 간에 친화돈목 하면서 살아나가게 하는데 본 뿌리교육의 목적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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