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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김수종], 2021.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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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2021.03.26

얼마 전 일요일 우연히 운현궁(雲峴宮)에 들렀습니다. 인사동에서 12시30분에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만 약속시간을 12시로 잘못 알고 일찍 식당에 도착했던 겁니다. 남는 시간에 주변이나 한 바퀴 돌기로 했습니다.
천도교회관 앞을 걷다가 무심코 운현궁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스마트 폰의 큐알(QR)코드 인증을 받고 경내로 들어갔습니다. 코로나 여파인 듯 고즈넉했습니다. 육중한 카메라를 두 개씩 둘러멘 사람이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사랑채였다는 노안당 기와 앞뜰에 매화꽃이 피고 난간에는 봄볕이 내려앉았습니다. 그야말로 '운현궁의 봄'이었습니다. 대원군이 없는 집 난간에 앉으니 안온했습니다. 파락호의 신세로 '상갓집 개'라는 욕을 먹고 울분을 삭였던 곳도,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호령했던 곳도 이 운현궁이었으니 파란만장한 장소입니다. 역사책에서 보았던 대원군을 운현궁 난간에 앉아서 상상하니 더욱 실감났습니다.

귀가 길에 도서관에서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을 빌렸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뇌에 입력된 소설, 그러나 전편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옛날 국어 교재에선가, 단편 분량으로 발췌된 것을 보았던 기억이 아주 어렴풋합니다.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족답지 않은 기행을 하고 다닌 대원군의 행적을 문학적 기법으로 풀어놓은 '운현궁의 봄'이니 후대 사람들에게 대원군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운현궁 노안당의 봄

기여했겠구나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아무튼 점심 시간 착각, 시간 때우기 산책, 운현궁 구경 그리고 '운현궁의 봄' 대출로 이어진 흥미로운 봄날 하루였습니다.

책 한 권 잡으면 한두 달 걸리는데 일주일 만에 읽었습니다. 대원군이란 인물이 극적 요소를 갖춘 캐릭터이긴 하지만, '운현궁의 봄'은 권력이 무엇인지, 또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그 반전을 적나라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냈습니다.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음모도 없고 부패도 없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민주주의 사회라면 시민들이 살기는 좋겠지만 소설가나 희곡작가들은 다이내믹한 문학적 소재를 찾지 못해 애먹을 것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1900년에 태어난 김동인이 이 소설을 1933년에 출판했으니, 구전(口傳)의 소통방식이 요즘 카톡과 같았을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의 일화가 사람들 사이에 참 많이 회자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당시 권력 주류 세력들이 권력을 얻고 권력을 휘둘렀던 시대상이 요즘 한국 권력 주류 세력의 양태와 머릿속에 오버랩되었습니다.

그 소설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씨 사백 년간, 그동안에 한양은 망하였다.
어떤 사람이 있어서 한양 사람에게,
'너희는 돈 버는 방법을 아느냐?'
는 질문을 던질 것 같으면, 그들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리라.
'안다. 먼저 벼슬을 해야 한다. 그 뒤에 토색을 하면 저절로 돈이 생긴다.'
시민들이 꾸는 꿈은 이런 것이다."

요즘 그 벼슬이란 게 LH 임직원만일까요. 정보를 슬쩍 보고 땅을 사면 되는 것이니.

안동 김씨 세도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강화도령 철종을 왕위에 앉혀 놓고 자기네 문중의 딸로 왕비를 삼게 해서 권력을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거액의 뇌물을 내놓고 청탁하는 사람에게 군수나 수령 자리를 즉석에서 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관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부임하자마자 토색질에 착수합니다. 안동 김씨 세도가들이 재물만 받으면 언제고 군수와 수령을 갈아치우기 때문입니다. 원래 출세의 길이 한정된 왕조사회에서 특정 가문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니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은 가문이 파당으로 바뀌었을 뿐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지 않을까요.
권력의 맛은 달콤한 것, 그러나 그 김씨의 권력에도 위기가 왔습니다. 철종이 맛난 진수성찬과 아름다운 궁녀에 둘러싸여 시름시름 앓기만 하고 왕자를 낳지 못한 것입니다. 김씨 일파는 철종을 세울 때처럼 가족회의를 열어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합니다. 왕위 계승 서열에 있는 왕족 중에 똑똑하고 김씨 가문에 녹록하게 굴지 않은 사람 명단을 올려놓고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대원군도 거명됐으나 상갓집 개 노릇을 한다며 한바탕 웃고 넘깁니다.
그러나 이 음모에 대원군의 육촌 이하전이 걸려듭니다. 그는 왕위 계승권자를 지명할 권한을 가진 대왕대비 조씨(헌종의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던 왕족이었습니다. 김씨 세도가들은 역모사건을 조작하여 철종의 입으로 이하전에게 사약을 내리게 합니다.
후사가 없는 아들 헌종의 후계자로 이하전을 찍었던 대왕대비 조씨는 이 음모의 실상을 알고 김씨 세도에 대한 원한이 사무칩니다. 이 틈새를 파고 들어가 대왕대비의 마음을 얻고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권력쟁취에 성공한 것이 흥선 대원군입니다.

150여 년 전 이야기지만 '운현궁의 봄'은 오늘날 한국의 권력 세계와 공직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권력이 강화될수록 부패도 심하다는 것,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주류 세력 안에서도 파당을 지어 음모와 암투를 벌이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인 오늘날이나 왕조였던 옛날이나 체제만 다를 뿐 행태는 비슷해 보입니다. 권력의 세습이 없는 오늘날 권력 승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대왕대비는 누구일까요.

단재 신채호가 썼다는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에 임진왜란 전야의 당파싸움을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당론이 조야에 불일어 상하가 사의(私意)에 골몰하여 배제비부(排擠比附:맞는 조례가 없을 때는 비슷한 조문이나 전례를 끌어다 죄를 씌움)에 급급한 소인들이 담장 안에 간과(干戈)로 살육을 날로 일으킴에, 어느 겨를에 정무를 의논하며, 어느 겨를에 국위를 근심하며, 어느 겨를에 외교를 강구하며, 어느 겨를에 군비를 닦으리오. 공(公)이니 경(卿)이니 장(將)이니 상(相)이니 하는 이들이 기껏 한 수라상에 지나지 않는 데 서서 각기 자기 집 사사(私事)싸움으로 눈을 부릅뜨고 질시하며 팔을 뽐내며 크게 고함지르는 때라..."
새삼 이 시대를 조명하는 경종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투쟁이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획득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세계 10위 경제력을 가진 한국 정치권이 균형, 견제, 절제가 없이 막가는 행태를 보이니 보통 사람들이 정치에서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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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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