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三國遺事 卷 第二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매우 숭상하였는데 시조모(始祖母)540540 원문에는 世祖母로 되어 있는 데 이하 세조와 시조가 섞여 쓰이고 있다. 세조모로만 볼 경우, ‘세조(世祖)의 어머니’로 해석하여, 여기서의 ‘世祖’를 수로왕이 아니라 수로왕과 허왕후의 아들인 제2대 거증왕(居登王)으로 볼 수 있다. 그 밑의 ‘世祖 이하 9대손의 역수를 아래 자세히 기록한다.’고 한 문장에서도 세조가 곧 거등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락국기≫ 말미의 역대 왕명을 기록한 곳의 질지왕조(銍知王條)에서 수로왕을 ‘世祖’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아, 그렇게 단정하기도 어렵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2쪽). 이에 여기서의 世祖母 역시 수로왕을 세조 호칭한 채, 그 부인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닫기허황후(許皇后)541541 허왕후를 ‘王后’라고 하지 않고 ‘皇后’라고 표현하였다. ‘皇后’와 ‘王后’ 표현이 번갈아 가면서 쓰이고 있다. 이 중 ‘王后’라는 칭호는 고려시대에 와서 보편화되나, ≪삼국사기≫를 통해서 볼 때, 신라에서는 문무왕부터 경덕왕까지의 王母나 王妃에 대하여 ‘王后’ 칭호를 전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락국기≫의 왕후 사용례는 신라 중대의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5쪽).닫기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元嘉)542542 남조(南朝) 유송(劉宋) 문제(文帝)의 연호로 424년~45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9년 임진에 수로왕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543543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32 김해도호부 고적조(古跡條)에 왕후사(王后寺)의 구지는 장유산에 있다고 한다. 이를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비교해볼 때, 지금의 장유면 장유리 남쪽의 옥녀봉에 해당한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6쪽).닫기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544544 보통급의 밭.닫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545545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를 말한다.닫기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546546 이 기록은 수로왕의 수도 지정과정과 불교국의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인 것과 함께 가야에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윤석효, 「가야의 불교수용에 관한 연구」, ≪(한성대)논문집≫ 15, 1, 1991, 207쪽, 216~217쪽). 반면 이에 대하여 가야의 불교는 건국 초 일찍이 인도로부터 전래되었으나 사회적으로 수용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을 요하였고, 질지왕(銍知王)대에 와서 비로소 왕실불교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홍윤식, 「가야불교에 대한 제문제와 그 사적 고찰」, ≪가야고고학논총≫ 1, 가야문화연구소, 1992, 235쪽). 이에 더해 가락국이 신라보다 앞서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해도 가락국의 전반적 사회발전 수준이 신라에 못미치고 있었던 만큼, 불교의 유포는 제한적이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2쪽).닫기
이 절이 생긴 지 500년547547 원문에서는 五百 뒤에 年 또는 歲가 생략되었다.닫기 후에 장유사(長遊寺)548548 오늘날의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일대에 있었던 절로 추정된다.닫기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549549 사찰의 관리와 운영의 임무를 맡은 세 가지 승직을 말한다. 상좌·사주·유나 또는 승정(僧正)·승도(僧都)·율사(律師)이다.닫기은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표(標)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註 540
원문에는 世祖母로 되어 있는 데 이하 세조와 시조가 섞여 쓰이고 있다. 세조모로만 볼 경우, ‘세조(世祖)의 어머니’로 해석하여, 여기서의 ‘世祖’를 수로왕이 아니라 수로왕과 허왕후의 아들인 제2대 거증왕(居登王)으로 볼 수 있다. 그 밑의 ‘世祖 이하 9대손의 역수를 아래 자세히 기록한다.’고 한 문장에서도 세조가 곧 거등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락국기≫ 말미의 역대 왕명을 기록한 곳의 질지왕조(銍知王條)에서 수로왕을 ‘世祖’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아, 그렇게 단정하기도 어렵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2쪽). 이에 여기서의 世祖母 역시 수로왕을 세조 호칭한 채, 그 부인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註 541
허왕후를 ‘王后’라고 하지 않고 ‘皇后’라고 표현하였다. ‘皇后’와 ‘王后’ 표현이 번갈아 가면서 쓰이고 있다. 이 중 ‘王后’라는 칭호는 고려시대에 와서 보편화되나, ≪삼국사기≫를 통해서 볼 때, 신라에서는 문무왕부터 경덕왕까지의 王母나 王妃에 대하여 ‘王后’ 칭호를 전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락국기≫의 왕후 사용례는 신라 중대의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5쪽).
註 542
남조(南朝) 유송(劉宋) 문제(文帝)의 연호로 424년~453년에 사용하였다.
註 543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32 김해도호부 고적조(古跡條)에 왕후사(王后寺)의 구지는 장유산에 있다고 한다. 이를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비교해볼 때, 지금의 장유면 장유리 남쪽의 옥녀봉에 해당한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6쪽).
註 544
보통급의 밭.
註 545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를 말한다.
註 546
이 기록은 수로왕의 수도 지정과정과 불교국의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인 것과 함께 가야에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윤석효, 「가야의 불교수용에 관한 연구」, ≪(한성대)논문집≫ 15, 1, 1991, 207쪽, 216~217쪽). 반면 이에 대하여 가야의 불교는 건국 초 일찍이 인도로부터 전래되었으나 사회적으로 수용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을 요하였고, 질지왕(銍知王)대에 와서 비로소 왕실불교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홍윤식, 「가야불교에 대한 제문제와 그 사적 고찰」, ≪가야고고학논총≫ 1, 가야문화연구소, 1992, 235쪽). 이에 더해 가락국이 신라보다 앞서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해도 가락국의 전반적 사회발전 수준이 신라에 못미치고 있었던 만큼, 불교의 유포는 제한적이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1998, 32쪽).
註 547
원문에서는 五百 뒤에 年 또는 歲가 생략되었다.
註 548
오늘날의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일대에 있었던 절로 추정된다.
註 549
사찰의 관리와 운영의 임무를 맡은 세 가지 승직을 말한다. 상좌·사주·유나 또는 승정(僧正)·승도(僧都)·율사(律師)이다.

*1987 경향신문 이용기자의 기고문을 인용하면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수로왕이 서기48년 음력7월27일 붉은 돛을 단 배를타고 가락국에 상륙하여 자신을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소개하는 허황옥을 왕비로 삼았다고 전하고있으나 어떠한 경로로 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한다.고고학자 김병모교수와 김원룡교수는 정년퇴임 논문 가락국 허황옥의 출자라는 논문을 통해 허황옥은 인도에서 망명한 선조들과 함께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살다가 한족의 박해로 무한으로 이주 다시 양자강 황해 남해 김해로 이어지는 해로를 따라 가락국에 도착 수로왕에게 시집 왔다고 주장하고있다.이같은 사실은 김교수가 중국에서 입수한 중국역대지명요람과 중국변강민족사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밝혀졌다한다.안악현은 양자강 상류 여러지주중의 하나인 가능강유역이며 파주라는 옛지명임을 입증하였다. 허황옥이 온 서기1세기전후 가능강 일대에는 씨족과 갑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파인or파씨라고 불렸다고 김교수는 설명한다.서기47년 파군의 남부에 속해있는 도산족의 뇌천등이 반란을 일으켜 백성들을 약탈하므로 중앙정부에서는 무위장군으로 하여금 병력1만명을 건느리고 반란을 토벌하고 반란을 일으킨 종족7천여가구를 강하(현재의무한지방)으로 이주 시켰다고 적혀있다.54년뒤 그지방에서는 반란이 다시 일어나는데 주동세력은 지난번 반란의 핵심인 허씨성을 쓰는 사람이었다.김교수는 당시 무한으로 강제 이주당한 허씨세력들은 가난한 딸자식 하나만이라도 가락국에 시집을 보내 평생을 살도록 배려 했을것이라 말했다.파족은 원래 배를 잘부리는 종족으로 삼국유사에도 신보,조광등 뱃사공과면수능라 금은주옥 의상필단 경민복완 등 한반도인들에게는

희귀한 보물을 가득실고 온것으로 기록되있다. 김교수는 가야시대 유물중 큰뱀이 장식된 토기(지산동고분출토)나 허황옥이 결혼행사때 지나간 명월사 불상조각에 뱀이 부처를 감싸고 있는 유물들이 보이는것은 보주지방과 한국문화의 공통점이라고 지적하였다.허씨일족이 서기47년 반란 실패후 고향에서 내쫓겨 다음해인 48년 김해에 도착한것은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시집오게된 사실을 그대로 증명해준다고한다. 더구나 아요디아는 기원전186년에 숭가왕조가도읍으로 정하고 있던곳으로 그후 서북쪽 대월지가 침입.왕조가 남하하는 바람에 무정부 상태에 있었다는게 김교수의 설명이다.따라서 당시 주민들중 상당수가 집단 이주를 하였는데 그중 일파가 사천의 가릉강유역에 정착했다는 것이다.결국 인도에서 망명집단인 파인들은 한족의 학정에 반란을 자주 일으키는데 그중 주동자가 허씨세력이었으며 서기47년 반란에 실패 강하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가 또 다시 양자강을 따라동쪽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중 한여인인 허황옥으로 다음해인 48년 수로왕과 결혼 하기에 이르렀다는것이다 김교수는 우연히 입수한 중국측 지방사료에서 베일에 쌓인 수로왕비 허황옥의 행적을 알게 되었다며 앞으로 변방기록들을 수집 검토하여 더많은 사실들을 입증 하겠다고 말했다.....출처 이용(李傭) 기자

*우리가 밝히지 못한 역사들이 고고학자님들의 노고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와 같은 귀한고서의 서로의 보완점을 살려서 약탈당한 고서들을 다시 조명하였으면한다.다시 한번 머리숙여 고고학자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목록

댓글 목록

입력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거나,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 또는 단체 등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반복적 게시물, 폭력성 글등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 없이 수정·삭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하여 불법유해 정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