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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공파 17세 허유례(許惟禮)의 묘갈명(墓碣銘)

                           허유례[許惟禮]의 묘갈명(墓碣銘)

 

吉城君許公墓碣銘

 

허씨(許氏)의 족보는 허선문(許宣文)을 비조(鼻祖)로 삼는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토벌할 적에 군량이 떨어진 것을 공이 수천 석(石)의 곡물을 내놓아 도왔는데, 태조가 견훤(甄萱)을 섬멸하고 나서 공암 촌주(孔巖村主, 공암은 양천의 옛이름)로 삼으므로, 드디어 양천(陽川) 사람이 되었다. 4대를 내려와서 허재(許載)는 벼슬이 사도(司徒)에 이르고 공훈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사도의 5대손 허공(許珙)은 첨의 중찬(僉議中贊) 겸 태학사(太學士)로서 충렬왕의 사당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문경의 증손 허징(許徵)은 고려 말에 용진 현령(龍津縣令)이 되었으나, 국세(國勢)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 물러나 은둔할 뜻이 있어서, 순검(巡檢)으로 길주(吉州) 다신촌(多信村)에 나갔다가 지역이 외지고 토양이 비옥한 것을 보고 이에 가족을 데리고 북으로 와서 이 곳에 살았다. 이분이 증 호조 참판 허숭도(許崇道)를 낳았고, 참판이 아들 넷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허유례(許惟禮)이다.

 

공은 자질이 어질고 소신이 확고하여 소싯적에 효친(孝親)에 독실하고 의열(義烈)로 자부하였다. 우리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켜 본 고을을 점거하고 장차 서울을 침범하려 하는데, 소문과 위세가 굉장하여 열읍(列邑)이 와해된 채 감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자가 없었다. 조정에서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으나, 적이 험준한 산을 등지고 굳게 지키어서 그 선봉을 쉽사리 꺾을 수 없었다. 이때에 공이 막 사옹원 별좌(司饔院別坐)로 있다가 참판공이 적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탑전(榻前)에 나아가 앞장서서 떠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 충용(忠勇)을 장하게 여기어 허락하였다. 공이 적진으로 달려가서 가능한 속임수를 써서 경성(鏡城) 운위원(雲委院)에 이르러 기이한 계책을 세워 이시애가 술에 취하여 잠을 자고 있을 때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니 잔당들이 짐승처럼 흩어졌다. 이에 적병을 달래어 귀순하도록 하니, 인심이 기꺼이 심복하여 큰 반란이 진정되었다. 승전보를 올리자 임금이 그 전공(戰功)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정충 적개 공신(精忠敵愾功臣)을 하사하고 관질(官秩)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진시키고 길성군(吉城君)에 봉하였으며, 새서(璽書)로 표창하기를, “죽게 된 아버지를 탈출시키고 나서 또 내가 분개하던 적을 죽였으니, 난을 평정한 하나의 절의(節義)는 충과 효를 둘 다 온전히 하였다. 관례에 따라 3대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자손들은 승습을 하여 대대로 녹봉을 받도록 한다.” 하니, 북방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우러러보며 고무되었다.

 

공이 하나의 미관(微官)으로 천릿길을 달려가서 죄가 하늘에 닿은 거구(巨寇)를 섬멸하여 난을 평정함으로써 공을 세우고 아버지를 보위함으로써 효성을 드러내었다. 그 빛나는 공렬(功烈)로 드디어 봉읍(封邑)까지 하사받고 위로 3대에게 증직의 영광을 받아 주어 수와 녹을 누리게 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세상을 마치자 다초사(多初社) 재궁동(齋宮洞) 계좌(癸坐) 터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석동(石洞)의 오향(午向) 터에 따로 장례 지냈다.

 

부인은 선산 김씨(善山金氏) 사인(士人) 김사후(金士後)의 딸이다.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허귀손(許貴孫)ㆍ허경손(許敬孫)ㆍ허공손(許恭孫)ㆍ허말손(許末孫)ㆍ허종손(許終孫)이다. 증손자 허진(許珍)과 5대손 허대성(許大成)은 임진왜란 때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공으로 대첩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고, 현손 허구(許球)와 5대손 허성일(許誠一) 및 허변(許汴)은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에 해성군(海城君) 오박(吳博)을 따라 역적을 토벌한 공을 세웠으며, 7대손 허척(許滌)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무려 4백여 명에 이른다. 후손 허극(許極)이 멀리서 찾아와 묘비명을 부탁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어떤 역적이 북방에 있었네. 여러 진(鎭)들이 바람결에 쓰러져서 화가 나라를 삼키기 직전이었네. 용감한 허공이 있어 난을 맞아 몸을 내던지어 앞장섰네. 기이한 꾀를 내어 승리를 이끄니 바로 경성의 들판이었네. 흉악한 괴수가 목을 내놓으니 적군의 기세가 여지없이 꺾이었네.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탈출시키고 망하여가던 나라를 구제하였어라. 왕이 이에 가상히 여기니 효도를 하고 나서 충성을 하였네. 공의 공로를 책훈(策勳)하여 토지를 하사하고 봉작을 내렸네. 아름다운 기풍과 위대한 업적이 동방을 찬란히 빛내었네. 자손들도 많고 많아 선조의 큰 업적을 계승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이괄을 토벌하여 대마다 공훈을 세웠네. 내가 비명을 지어 놓았으니 이 세상 영원히 계승할 사람 있겠지.

 

 

吉城君許公墓碣銘

許氏譜。以諱宣文爲鼻祖。高麗太祖伐後百濟。軍餉乏絶。公出穀數千石。以助麗祖。討滅甄氏。封爲孔巖村主。遂爲陽川人。四世載。官至司徒。以功伐顯名。司徒之五世珙。僉議中贊。兼太學士。配食忠烈王廟庭。諡文敬。文敬曾孫徵。麗末爲龍津縣令。見國勢阽危。有退藏之志。以巡檢至吉州之多信村。見地僻而壤肥。乃挈家而北。因居焉。是生贈戶曹參判崇道。參判有子四人。第三曰惟禮。質仁而操確。自少篤於孝親。常以義烈自許。我世祖朝。李施愛叛據本州。將犯京。聲生勢張。列邑瓦解。無敢當其鋒。朝廷遣魚有沼等。將兵以禦之。賊負險固守。未易折首。時公方爲司饔別坐。聞參判公陷賊。進搨前挺身請行。上壯其忠勇許之。公馳赴賊陣。欺之以方。至鏡城雲委院。用奇計。乘其醉睡。斬首以殉。餘黨獸散。乃招諭群醜。俾令歸順。人心悅服。大亂乃定。捷奏。上嘉其功。特賜精忠敵愾功臣。陞秩同知中樞府事封吉城君。璽書褒美曰。旣脫父於將亡。且敵予之所愾。夷險一節。忠孝兩全。貤贈三世爵秩如例。子孫仍襲世祿。北方士庶莫不觀感而聳動焉。公以一介微官。千里赴敵。殲厥滔天之巨寇。功存戡亂。誠著衛親。其聲烈焯奕。遂膺茅土之封。錫榮祖考。享有壽祿。豈不偉哉。卒葬于多初社齋宮洞枕癸原。夫人別葬石洞向午原。夫人善山金氏。士人士俊之女。生男五人。曰貴孫,敬孫,恭孫,末孫,終孫也。曾孫珍,五世孫大成。壬辰倭亂。從鄭評事文孚。倡義膞賊。勒名於大捷碑。玄孫球,五世孫誠一及汴。甲子适變。從海城君吳博。討逆著功。七代孫滌登文科。官監察。雲仍多至四百餘人。後孫極遠來乞銘。銘曰。

光廟御世。有寇在北。列鎭風靡。禍迫荐食。有洸許公。臨難挺身。出奇制勝。于鏡之原。凶魁授首。賊勢披攘。脫父綦危。存國垂亡。王用嘉乃。旣孝而忠。策公之功。胙土開封。英風偉烈。震耀東表。雲來祁祁。纘戎祖武。嘬倭翳适。世有勳伐。我作銘詩。百代有述。

[출처 :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카페, 2020.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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