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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수색공 허적(許적, 1563~1640)

 허적(許적)
ㆍ분류 : 조선 
ㆍ세수(世數) :  21
ㆍ봉군(封君) :  양릉군
ㆍ공신(功臣) :  영사1등
ㆍ문장/서화 :  
허적(許적) [적=보일 시示 + 밑둥 적啇]
=허적(적은 복적)  
21세 / 공조판서(工曹判書) / 영사공신 1등(인조조) /  봉군은 양릉군(陽陵君) / 문장가 (수색집; 水色集)
 
 
 
1563년(명종18) ~ 1640년(인조18).
시조로부터 21세손이다. 자는 자하(子賀), 호는 수색(水色). 또는 상고재(尙古齋)이다.

1588년(선조2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93년(선조26) 공직에 나가지 아니하다 1597년(선조30)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죽산(竹山) 및 양지현감을 역임하고 1607년(선조30)에 형조좌랑 사예군자감정(刑曹佐郞 司藝軍資監正)등에 재임중 1628년(인조6) 유효립(柳孝立)과 당질인 유(逌)등이 선조의 7남 인성군 공(仁城君 珙)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옹립하려는 흉계를 모의하려는 것을 알고 실행전 사전에 고변하여 그 공으로 영사공신일등(寧社功臣一等)에 봉해지고 공조판서 양릉군(工曹判書 陽陵君)에 제수되고 한성판윤을 역임하고 증좌의정(贈左議政)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77세에 별세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고 불천지묘(不遷之廟)를 지어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고 큰 소를 잡아서 성대한 장례(葬禮)를 치루게 하였다.

불천지묘(不遷之廟)는 세월이 오래되어서 없어지고 1998년도에 새로 2층으로 신축하여(尙古齋)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후손들이 모여 효위13위(孝位13位), 비위17위(妣位17위) 합 30위패를 모시고 성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수색집 문집6권이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으며 서문은 교산 허균(蛟山 許筠)이 쓰고 발문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기술하였다.

묘(墓)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의 선영하(先塋下)에 있다.
 
 
허적 초상
지정번호 : 용인시 향토유적 제25호
지정년월일 : 1992.10.12
소재지 :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436
소유자 : 양천허씨 종중
시대 : 조선 인조6년 (1628)
규모 : 견본설채 화폭75 x 125cm 
 
허적의 초상은 조선 인조(仁祖) 무진년(戊辰年:1628)에 영사원훈공신(寧社元勳功臣)에 책봉되던 당시 인각되어 공신각(功臣閣)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뒤에 가묘본(家廟本) 1본을 이모(移摸)하여 후손이 소장해 왔다. 허적의 초상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며, 학(鶴) 흉배의 녹포단령(綠袍團領)을 입은 공수(拱手)차림이다. 전신 포치의 구도에서 단구(短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노쇠함이 역력히 표출되어 있다. 초상 전체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사모부의 윗쪽이 손상되었다. 상단에 「陽陵府院君許적」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사모의 철선묘, 단령의 문양 등이 세필되었다. 이 초상을 이모(移摸)했던 화공 의 꿈에 허공이 나타나서 "내 초상을 자세히 보라. 왼쪽 눈가에 점이 빠져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이튿날 원본을 보니 정말 점 하나가 있었기로 다시 그려 넣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 유효립(柳孝立) : 본관 문화(文化). 자 행원(行源).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의 조카이다.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 공(仁城君 珙)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계획했다가 본인과 인성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
 
 [출처 : 양천허씨대종회 홈페이지, 배출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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