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임제(林悌)

임제

[ ]

원본글 출처 저자 이명원 전서지

임제의 묘갈()
허목()
자 : 자순()
호 : 풍강(), 백호(), 벽산(), 소치(), 겸재()
국조인물고 권27 명류()

공()의 휘()는 제()이고 자()는 자순()이고 성()은 임씨()인데, 나주() 사람이다. 그의 선대는 고려에서 드러났고 조선조에 이르러 임평()이란 분이 우리 강정왕(, 성종) 때 무예로 시위군()에 선발되었다가 호남 병마우후()에 이르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고생한 끝에 성립하여 가문을 일으켜 3품의 벼슬에 이렀으니, 또한 족하다.”고 하였는데, 제사를 신중히 지내고 종족과 화목하게 지내며 집안을 가르쳤다. 그 뒤에 임붕()이란 분은 기묘 사화()를 당하여 태학()의 학생들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간쟁하여 그 사실이 ≪기묘당적()≫에 기록되어 있고 뒤에 과거에 합격하여 경주 부윤()이 되었다. 그의 아들 임진()은 위엄으로 이름이 나 영남()ㆍ호서(西)ㆍ호남()ㆍ서변(西)ㆍ북변() 등 오도()의 절도사(使)를 역임하였다. 장수로 수십 년간 있으면서 재화를 사적으로 취급하지 않아 집안에 두터운 방석이 없었고 영변()ㆍ탐라()에 모두 정사의 청백을 칭송하는 비가 세워졌는데,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남원 윤씨()는 좌참찬() 윤효손()의 4세손인데, 명 세종() 가정() 28년(1549년 명종 4년) 11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날마다 수천 마디의 말을 외웠으며 문장이 호탕하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신종() 만력() 4년이자 우리 소경 대왕(, 선조) 9년 감시()에 ‘탕음부()’와 ‘유독시()’를 지어 바쳐 진사 시험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 대과()에 제2등으로 합격하는 등 문장이 날마다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런데 이때 동서 붕당(西)의 의논이 일어나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명예를 가지고 서로 추켜세우면서 끌어당기었으나 공은 자신 멋대로 행동하고 무리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또 몸을 낮추어 사람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때 당국자가 의논을 견지하기 좋아하여 사람을 성공하게 만들거나 실패하게 만든 일이 많았는데, 공이 일찍이 그 사람의 문전을 지나가면서 찾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저 사람은 다만 사람의 얼굴을 지니고 귀신처럼 날뛰고 있으니, 곧 화를 당할 것이다.”고 하더니, 그 뒤 몇 년이 지나 과연 패망하였다.

공은 유명한 산수를 유람하기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대곡 선생(, 성운())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그 당시의 인사들이 모두 공을 법도 밖에 사람으로 보아 취한 것은 문장뿐이었으나 찬성() 이이()와 학사() 허봉(), 사군(使) 양사언() 등 몇 사람은 그 기특한 기개를 인정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고산도 찰방()에 임명되어 북관()으로 나가 양 사군, 허 학사, 봉상시 첨정() 차천로() 등과 같이 가학루()에 올라가 서로 주고받으며 지은 시가 한 권이 있다. 또 서북도 병마평사(西)와 관서 도사(西)가 되었는데, 이는 모두 소경 대왕 때 한 벼슬인데, 지금 관새()에 왕왕 시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벼슬은 예조 정랑()으로 사국(), 지제교()를 겸임한 것으로 그치었고, 나이 39세로 만력() 15년(1587년 선조 20년) 8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풍강()ㆍ백호()ㆍ벽산()ㆍ소치()는 모두 공의 별호()인데, 만년에 겸재()로 고쳤다. 풍강은 금성()의 서쪽에 있는데, 지금 임씨의 구업()이 되었고 백호는 옥과현()에 있는데, 무진장()이라 이른다고 한다.

부인은 공인() 경주 김씨()인데, 할아버지 김천령()은 강정왕 때 유명하여 직제학()이 되었고, 아버지 김만균()은 공희왕(, 중종)과 공헌왕(, 명종) 무렵에 벼슬하여 대사헌()이 되었으며, 어머니는 순흥 안씨()이다. 가정() 27년 7월 3일에 태어나 공보다 한 살 더 많고 공이 세상을 떠난 4년 뒤 12월 6일에 세상을 떠나 합장하였는데, 묘소는 나주() 회진()의 위에 있다.

아들 임지()ㆍ임준()ㆍ임탄()ㆍ임계()는 모두 호걸스러워 모두 명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임준은 중흥 초기에 덕행으로 추천되어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계는 숙부 문화 현령() 임환()의 후사가 되었는데, 천거한 사람이 있어 크게 쓰이려 하다가 호조 좌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위는 세 명을 두었는데, 병조 좌랑() 김극령(), 영의정()에 추증()된 허교(), 후릉 참봉() 양여백()이다. 지금 성()을 계승한 자손이 3세 몇 사람이다. 임탄의 아들 임강()은 젊어서 재명()이 있었고 상사()에 올라갔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임강은 임정()ㆍ임기()를 낳았다.

출처 [林悌]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淸州楊氏 양여백(楊汝栢)=  直長公派 허함(涵)의 子   許楣 의 장인. 

목록

댓글 목록

입력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거나,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 또는 단체 등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반복적 게시물, 폭력성 글등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 없이 수정·삭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하여 불법유해 정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