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최공 비명 譯(역)
내가 소싯적에 선배들에게서 들으니, 성종(成宗)의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밝으셨음을 칭찬하여 말하면서, “최공(崔公) 아무개란 이가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로 있으면서 순후(醇厚) 하고 근신함으로써 권우(眷遇)를 입었는데, 승지 임사홍(任士洪)이 그를 시기하여 아뢰기를 ‘최모(崔某)는 연로하여 시독관(侍讀官)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자, 성종께서 답하지 않고 어필(御筆)로 공의 이름을 적어 사간원 대사간으로 특진(特進) 시켰다. 이에 임사홍은 황공하여 어쩔 줄 모르고 사림(士林)은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었다. 그런데 금상(今上)의 조정에 이르러 창산(昌山) 성희안(成希顔)이 재상이 되어 입대(入對) 하면서 위 사실을 들어 성종의 덕을 찬탄하고 또 공의 어짊을 칭찬하였으니, 오호라, 공은 살아서 나 죽어서 나 영광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41년 후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른 뒤 그 고자(孤子)가 공의 행장(行狀)을 엮어 가지고 와서 묘표(墓表)로 삼을 글을 나에게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비록 후진(後進)이지만 장자(長者)의 풍모를 들은 지 오래이니, 감히 기꺼이 그 선(善)을 말하여 후세에 징험할 자료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최한정(漢禎)이고 자는 자경(子慶)이며 보계(譜系)는 전라도 화순현(和順縣)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휘 최영유(永濡)란 분이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으면서 그 고을에서 죽자,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여 총인(塚人)을 두어서 땔나무 채벌과 가축 방목을 금하였으며 매양 기일(忌日)에는 향사(享祀)를 끊이지 않고 지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현조(玄祖)이다. 증조 휘 최자하(自河)는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이고, 조부 휘 최 안선(安善)은 증(贈) 사복시 정(司僕寺正)이다. 부친 휘 사로(士老)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또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였으며, 세조조(世祖朝)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들었고 벼슬은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모친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휘 순(循)의 따님이고 고려 시중(侍中) 권보(權溥)의 현손이다.
공은 어려서 외고(外姑) 나씨(羅氏)의 손에 자랐으니, 집현전 직제학 배윤(裵潤)의 처(妻)이다. 직제학이 죽자 나씨는 단발(斷髮) 하고 꼬박 3년 동안 묘소를 지키며 살았고, 그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旌閭)를 하사받았다. 공은 이렇게 세가(世家)에서 태어나고 예문(禮門)에서 자랐기에 보고 들어서 평소 함양(涵養) 한 바가 있었으며, 게다가 능히 힘써 배우고 게으르지 않아 경태(景泰) 병자년(1456, 세조2)의 생원 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처음 제릉 전직(齊陵殿直)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천순(天順) 기묘년(1459, 세조5)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주부에 제수되었고 사헌부로 자리를 옮겼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 왔다. 그리고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고 봉상시 판관과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기축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그 2년 후 신묘년에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고 예문관에 들어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이 되었으며, 순차를 뛰어넘어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정유년에 이조 참의로 있으면서 부친상을 당하였고, 상기(喪期)가 끝나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기용되었으며, 형조 참의를 거쳐 예조로 자리를 옮겼다가 관직에 있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開城府留守) 신석조(辛碩祖)의 따님으로 일찍 죽었고, 후부인(後선부인(先夫人) 영산 신씨(靈山辛氏)는 개성부 유수(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증조 휘 유(䇕)는 가선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이고 조부 휘 영적(寧迪)은 가선대부 공조 참판이며 부친 휘 익(翊)은 통정대부 병조 참의이다. 모친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공조 판서 정진(鄭鎭)의 따님이다.
공은 품성이 관후(寬厚)하고 행동이 화평하며 청간(淸簡)하고 검약한 생활 자세를 지녔다. 게다가 성종의 지우(知遇)까지 입었으니, 현달(顯達)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도 지위가 덕에 차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하늘이 그 자신에게는 베풂을 아껴서 그 후손을 창성케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부인(李夫人)은 천성이 매우 민첩하여 여공(女功)에 부지런하였으며, 아들들이 처음 학문할 때 모두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매양 자식들에게 경계하기를, “너희의 재행(才行)으로는 현달한 자리는 바랄 바 아니니, 다만 선대인(先大人)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족하다.” 하니, 아들들이 저마다 근칙(謹飭) 하여 세상에 입신양명(立身揚名) 할 수 있었다. 비록 공의 여경(餘慶)이 이러한 결과를 이룰 수 있었지만, 또한 부인이 그 뜻을 잘 받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은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 7월 28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태어난 해인 정미년으로부터 계산하여 60세이다. 이 부인은 가정(嘉靖) 병술년(1526, 중종21)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태어난 해인 갑자년으로부터 계산하여 83세이다. 공의 장지(葬地)는 장단부(長湍府) 치소(治所) 남쪽 산리동(酸梨洞)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산기슭에 있는데, 이 부인과는 묘역(墓域)이 같고 신 부인(辛夫人)의 묘소는 북쪽으로 50여 보(步) 거리에 있다.
공은 모두 7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중청(重淸)은 생원(生員)으로 광흥창 수(廣興倉守)였고 중온(重溫)은 장사랑(將仕郞)이었는데, 모두 죽었다. 이들은 신씨(辛氏) 소생이다. 중홍(重洪)은 병진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위계가 가선대부에 올랐으니, 공과 조부 사복시 정(司僕寺正)의 증직은 모두 이 때문이다. 중심(重深)은 진사(進士)인데 요절하였다. 중연(重演)은 정묘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가 되었고, 중순(重淳)은 진사로 순릉 참봉(順陵參奉)이며, 중윤(重潤)은 역시 요절하였다. 딸은, 맏이는 참봉 최봉손(崔奉孫)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관찰사 이자화(李自華)에게 출가하였다. 동지중추부사 이하는 모두 이 부인 소생이다. 광흥창 수는 유수(留守) 이계전(李繼專)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기(基)와 해(垓)이고, 딸의 맏이는 김순의(金順義)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장(柳璋)에게 출가하였다. 장사랑은 홍상(洪祥)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2남을 낳았으니, 은(垠)과 곤(坤)이다. 동지중추부사는 판관(判官) 곽치희(郭致禧)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4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 훈(壎)은 교하 현감(交河縣監)이고, 언(堰)은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이고, 다음은 호(壕)와 식(植)이며, 딸의 맏이는 감찰(監察) 정치(鄭錙)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종실(宗室)인 이성 수(尼城守) 이존광(李存光)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별좌(別坐) 권유(權鍒)에게 출가하였고, 넷째는 이희적(李希籍)에게 출가하였다. 진사는 참판 권경우(權景祐)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감(堪)이고, 딸의 맏이는 박응(朴譍)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종실인 시령영(始寧令) 이현동(李賢童)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권완(權琬)에게 출가하였다. 판교는 부사(府使) 심순도(沈順道)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탄(坦)이고, 딸의 맏이는 생원 김예손(金禮孫)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구준(具準)에게 출가하였다. 참봉은 군수 목철경(睦哲卿)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3남을 낳았으니, 첫째 우(堣)는 진사이고, 둘째는 지(址)이고, 셋째는 지(墀)이다. 관찰사는 딸을 두어, 노홍(盧鴻)에게 출가시켰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성묘 시절엔 어진 덕화로 태평하였지 저 수다스러운 소인 싫어하고 이 순후한 선비 좋아하셨네
무엇으로 대우해 주셨던가 아침저녁 경연에의 입시였지 간사한 말이 매우 공교해도 임금의 귀는 속이기 어려워 사간원의 장관으로 뽑아 주시니
그 은총 참으로 남다른 것일세 우리 공 개인의 일만이 아니라 이로써 아첨하는 자들을 경계했지 성상께서 새로 즉위하셔서는
대신이 공의 사적 아뢰었으니 공은 죽은 지 비록 오래지만 그 유풍은 변치 않고 남았어라 공만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신 셈 여기 이동의 산기슭이 바로 공의 무덤 있는 곳 공이 먼저 이곳에
묻히었고
부인 뒤이어 함께 묻혔도다 후인들아 여기 보시라 나의 글은 과장이 아니라오
조선조 연산(燕山), 중종(中宗) 대의 문호 容齋(용재) 李荇이 찬(글을 쓰다)한 시도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李荇 容齋集(이행 용재집) 卷之十 散文(권지십 산문)에 기록]
[출처] (세종 문화재) 화순최씨 참판공 재실 금남 모인당|작성자 세상을이롭게
1. 참조*최영유 (永濡): 10세조 문경공 휘 허공(珙) 長子 동주사공 11세 휘 허정(程)의 큰 아드님 12세 추봉 봉익대부 밀직부사 행 식목도감 휘 허선(瑄)의 사위.
2* 신석조(申碩祖) 판도좌랑공 11세 휘 허관(冠)의 次子 文 찬성사 12세 휘 허선(僐)의 5대손 14세 평해군수 휘 허항(恒)의 孫子 16세 휘 허주(柱)의 室 영산신씨 父 進士 신영희 祖 신수담 曾祖 .신석조(申碩祖). 일부 편집 문헌 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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