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절 두문동 72인
허흠의 둘째 아들은 허손(許愻)이다.대제학 허흠(許欽)은 고려가 망하자 부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켰다.
허흠(許欽)의 큰 아들 허징(許徵, 1344~ )은 고려 충정왕의 사위[駙馬]로 공암군(孔岩君)에 봉해졌고, 병마단련판관(兵馬團練判官) 겸 북도순검사(北道巡檢使)를 지냈다.
허징(許徵)은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킨 72인 가운데 다시 32인의 수장(首長)이었다.
이들 72인은 송도(松都) 동남현(東南峴)에 모여 관복을 벗어 소각한 다음 헤진 옷과 찢어진 삿갓을 쓰고 망국의 한을 목 놓아 울고는 정처 없이 가다가 북도(北道)에 은둔하였고, 그 뒤를 따라가던 아버지 허흠 부부는 북도목우장(北道牧牛場)에 이르러 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이에 후세의 사람들이 이들이 살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칭하고 이들을 두문동 72인 절사(節士)라 불렀다.
오늘날 세상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는 것을 두문불출(杜門不出)라고 하는 것의 어원인 셈이다.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은 절개를 지키거나 죽음으로 충절을 이룬 고려충신들의 관직과 이름을 적은 책이다. 두문동 72인 중 예판봉사(禮判奉使) 김주(金澍)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따르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는 말을 남기고 중국 절강성에서 살다 죽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충절을 말할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근원이 김주(金澍)로부터인 것이다.
72인의 벼슬이나 다른 기록은 생략하고 명단만 보면
鄭夢周, 金澍. 李存吾, 鄭樞, 崔瀁, 吉再, 南乙珍, 林先味, 元天錫, 曹義生, 孟裕, 都膺, 李思之, 陶東明, 金自粹, 張安世, 程廣, 韓哲沖, 羅天瑞, 李明成, 李穡, 鄭地, 河自宗, 李養中, 金震陽 , 安省, 李思敬, 趙忠, 許徵, 崔文漢, 申德隣, 孟希德, 裴尙志, 李繹, 李行, 邊肅, 金光致, 李種學, 李陽昭, 閔楡, 文益漸, 林貴椽, 曹希直, 金士廉, 金承吉, 趙瑜, 金濟, 趙鐵山, 范世東, 具鴻, 尹忠輔, 成思齊, 金沖漢, 朴門壽, 閔安富, 蔡王澤, 宋皎, 崔七夕, 金子進, 趙胤, 金若時, 鄭溫, 李涓, 宋寅, 郭樞, 蔡貴河 등이다.
▲허손의 제주입도
1392년(태조1) 8월 부모를 불귀의 객으로, 형을 북도로 떠나보낸 허손은 천호(千戶)였던 아들 허천우(許天雨)와 함께 조선에 불복한 죄로 제주에 유배 오게 되었고, 구좌읍 종달리에서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그때 남긴 허손의 시는 형제 간 이별의 정한(情恨)이 가득 차 있다. 허손은 1354년 공민왕 때 송도에서 출생했다.
천성이 따뜻하고 강직하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이다.
1376년 전시문과(殿試文科)로 제학에 임명된 후 다시 대제학의 벼슬에 올랐으나 그 벼슬을 마다하고 황량한 남쪽 섬으로 온 연유가 오죽했으랴.
부모는 울분 때문에 돌아가시고 형은 앞날을 기약 없는 가시밭길을 갔는데 자신만 임금을 바꿔 부귀영달(富貴榮達)을 누릴 수는 없던 까닭이었다.
허손은 제주도에 은거하던 1419년에 세종은 다시 허손에게 좌찬성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조선에 입조(入朝)하지 않고, 1423년 7월 ‘충효를 가문의 전통으로 삼고 세상에 대해서 청렴결백(淸白) 하라’는 선조들의 교훈을 엄수하라는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71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출처:김해김씨 삼현파(판도서공 휘 관파) 카페, 2020.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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