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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허백 묘갈음기(文正公 許伯 墓碣陰記), 2020. 3. 13.


                    문정공(文正公) 허백(許伯) 묘갈음기(墓碣陰記)


 허 문정공(許文正公) 휘 백(伯)은 본관이 공암(孔巖)이다. 문정공의 황조고(皇祖考)는 문경공(文敬公) 휘 공(珙)이고, 황고(皇考)는 판도 좌랑(版圖佐郞) 휘 관(冠)이다. 사적(事蹟)이 《고려사(高麗史)》 본전(本傳)에 실려 있다.
우리 문정공은 고려 숙왕(肅王) 4년(1317)에 급제하여 이미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혜왕(惠王) 후 5년 봄에 양천군(陽川君)으로서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여름에 왕이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설치하자, 공이 동지밀직(同知密直)에서 서연 시독(書筵侍讀)이 되었으며, 겨울에 밀직사사(密直司使)에 제수되었다. 정왕(定王) 1년(1349) 겨울에 찬성사(贊成事)에 제수되었고, 공민왕(恭愍王) 2년(1353)에 이르러 다시 서연 시독이 되었다. 그 후 16년에 관제가 개편되면서 공이 다시 찬성사에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다. 그해 겨울에 왕이 마산(馬山)의 역사를 일으키고 삼공 대신을 방축(放逐)하였는데, 이때 공이 윤환(尹桓), 유탁(柳濯)과 함께 유배되었고, 이듬해 7월 기해일에 운명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자손으로 먼 자는 지금 12세와 13세이니, 모두 계보첩(系譜牒)에 실려 있다. 계보첩에 이르기를,

“분묘는 개성(開城) 서쪽 웅곡(熊谷) 전포(錢浦)에 있다. 대광(大匡) 민변(閔抃)의 묘와 같은 언덕이고,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정씨(鄭氏)의 묘가 오른쪽 언덕에 있다.”

하였는데, 혹은 삼수리(森樹里)라고도 한다. 대광은 문정공의 사위이며, 우리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조부이다.
전포 감로사(甘露寺)에서 동쪽으로 몇 리쯤에 묘 3기(基)가 있는데, 뒤쪽으로 묘 2기와 계단 하나, 앞쪽으로 묘 1기와 계단 하나가 있다. 부로들이 전하는 말로 허 상국(許相國)의 무덤이라고만 할 뿐 모두 알아볼 만한 표석(標石)이 없다. 금상 3년 임인년(1662, 현종3) 봄에 11세손 배천 군수(白川郡守) 륜(崙)이 뒤 묘의 앞 계단 아래를 파서 잘린 비석을 찾았다. 그 비석에 ‘대광 여흥군 민변(大匡驪興君閔抃)’이라는 일곱 글자가 있고, 왼쪽 옆면에 또 ‘양천현부인 허(陽川縣夫人許)’라는 여섯 글자가 있는데, 3분의 1은 잘려 나갔다. 그러나 계단 위의 석부(石趺)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고 또 잘려진 부분도 찾았다. 글자가 비록 이지러지기는 했으나 계단 위에 있는 석부와 맞추어 보니 어긋남이 없었다. 이런 뒤에야 대광의 묘가 뒤에 있고 문정공의 묘가 앞에 있으며, 현부인의 묘가 가장 뒤에 있음을 알았다.
문정공의 묘는 지금 286년이 지나 군수 륜이 석갈(石碣)을 준비하였으나 미처 세우지 못하고 떠났고, 13세손 평산 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 정(珽)이 묘 앞에 세웠는데, 이때는 청나라 군주 강희(康煕) 4년 을사년(1665, 현종6)이라고 한다.

[출처 :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카페, 2020.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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