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현충사비(會寧顯忠祠碑).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8명의 공적을 기려 조선. 순조 33년(1833년) 회령군(會寧郡) 회녕읍 현충사(顯忠祠)에 세워진 비(碑).
당시 형조판서 였던 정원용(鄭元容)이 저술(撰)하였다.
아래 탁본은 1906년에 제작되었고 현재 일본 경도(京都)대학도서관 소장품 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근세조선 영토와 관련하여 회령(會寧)이 만주의 회령인지, 현재와 같은 위치의 회령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중의 하나이다.
사부분류 :史部 金石類
서 명 :會寧顯忠祠碑
저작사항 :鄭元容(朝鮮)撰
판 사 항 :拓本
발행사항 :[會寧郡(咸鏡北道)] [拓者不明] [191-]
형태사항 :2枚. 第1紙(164×58.8) 第2紙(161.7×79.5).
주기사항 :所在地 : 咸鏡北道會寧郡會寧面一洞
建立年代 : 朝鮮純祖33年(1833)
소장처 분류기호: 829.1-イ7-109②
소 장 처 :日本 天理大 圖書館
(정보출처 : 해외소장 한국전적문화재 서지정보)
현충사비명(顯忠祠碑銘) 전문.
옛날 당(唐)나라 하북(河北)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현종(玄宗)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십사군(二十四郡) 중에서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 때 안진경(顔眞卿)의 편지가 이르자, 현종이 기뻐하며 말하길, “몰랐구나.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와 같을 수 있다니. 희(噫)라. 의사(義士)를 얻기 어려운 것은 옛날부터 그렇지 않은 일인가.”라고 하였다.
원용(元容)은 북쪽이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을 때 회령부(會寧府)의 부사가 되었다. 부의 서쪽에 사우가 있었는데 여덟 의사(義士)를 모시고 있었고 모두 고을 사람들이었다. 사우에 가서 경건하게 알현하고 엄숙히 일어난 뒤에 말하기를, “하북 24군 중에 겨우 한 사람만이 있는데 어떻게 한 고을에서 여덟 사람씩이나 있는가.”라고 고을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적을 물으니 인사들이 사지(祠誌)를 바치고 또 말하기를, “고을의 인사들이 돌에 새기기를 결의 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오랫동안 글을 지어줄 것을 청하나 나는 사양하며 자신이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고을의 인사들이 말하기를, “공(公)은 임명받은 관리이므로 마땅히 사람들에게 의(義)로써 권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지를 살펴보니 사정은 이러하였다. 만력(萬曆) 임진(壬辰)년 왜구가 왕경(王京)을 핍박하여 상의 수레가 서쪽 지방으로 순수하셨을 때, 재상(宰相)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은 임해(臨海), 순화(順和) 두 왕자를 받들어 북으로 피해 들어갔다. 왜장인 행장(行長)은 서쪽으로 갔고 청정(淸正)이 북쪽으로 올라갔다. 북쪽 지방의 여러 군들이 와해되어서 성을 지키는 자가 없었다. 이에 앞서 나주(羅州)의 적민(謫民) 국경인(鞠景仁)은 회녕리(會寧吏)였는데 성품이 본래 사납고 악하였다. 그는 그의 아저씨인 경성리(鏡城吏) 세필(世必) 및 명천노(明川奴) 말수(末守) 등과 짜고 아아 왜적에게 위조된 서압이 있는 판형(判刑)의 고신을 받고 병권을 할애 받아서 장리(長吏)를 좇아 부사(府使)를 자칭하였다. 군관(軍官) 이함(李涵) 등과 부속(府屬) 중에서 원한이 있는 자 5~6인은 그 당인 김세언(金世彦) 등을 시켜서 밤에 왕자(王子) 재신(宰臣) 들을 포박하여 왜의 진영에 보내고 장차 왜적을 맞아들이고자 하였다. 성으로 들어갔을 때 왜적은 부녕(富寧)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심이 무너져서 변은 장차 예측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고을 사람인 오윤적(吳允迪), 최언영(崔彦英), 허관(許灌), 정여경(鄭餘慶), 이희백(李希白), 윤립(尹岦), 오준례(吳遵禮)은 모두 배우기를 좋아하고 수행하고 강개 있고 기절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풍패(豊沛) 어찌 이렇게 전화에 싸였는가. 윤리와 강상이 땅에 떨어졌으니 장차 어찌 여덟 사람의 몸을 쓸 수 있겠는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반적들과 더불어 살수 없다”라고 하며 드디어 약조하고 원산(黿山)에서 수렵하였다. 산 계곡에서 몰래 계책을 수립하여 마침내 성묘를 쇄소하는 것은 부탁하고 뜻을 같이 하는 자에게 몰래 알리었다. 마침내 교궁(校宮)의 무리들이 모두 이르렀을 때, 립(岦)이 말하기를, “용기 있고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면 거사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신세준(申世俊)은 그 사람들이 이르자 말하기를, “바로 내가 믿을 사람들이다.”라고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국경인은 여러 선비들이 모두 모였다는 것을 듣고 의심하여 윤적(允迪)을 불렀다. 윤적이 알려서 말하기를, “시급하오. 여러 군들은 자기 이유를 대지 마시오. 빨리 하고자 하는 바를 하시오”라고 하였다. 경인(景仁)은 윤적(允迪)을 위협하였지만 굽히지 않았다.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의 어머니가 힘껏 말렸다.
이윽고 세준(世俊)은 여러 사람들과 관문 위에서 모여 뿔 나팔을 불어 군졸이 다다르자, “판형령을 제거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검을 뽑자. 목을 베기 위하여 가는 자가 많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이끌고 가서 경인(景仁)의 집을 둘러싸고 소리쳐 말하기를, “윤적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마침내 풀어주자 윤적은 나왔는데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더욱 분격하여 둘러싸서 상황이 더욱 급박해졌다. 경인을 꾸짖었다. 경인이 항복하였지만 들어주지 않고 사살하였고 또 그 무리 들인 박림(朴林) 등 6인을 참수하였다. 관(灌)이 함에다 담아 의병대장(義兵大將) 정문부(鄭文孚)에게 보냈다.
이때 경성(鏡城)의 사인(士人) 이붕수(李鵬壽) 등이 창의(倡義)하여 평사(評事) 문부(文孚)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았던 터라 문부는 사람을 시켜 사이 길을 통해 이 일을 행조(行朝)에 아뢰었다. 상이 그를 가상하게 여겨서 세준(世俊)을 절충장군으로 제수하였고, 윤적(允迪), 관(灌), 언영(彦英)은 주부(主簿)로, 립(岦)과 여경(餘慶)은 봉사(奉事)로, 희백(希白), 준례(遵禮)는 수문장(守門將)으로 제수하였다. 숙묘(肅廟) 계미(癸未)년 마을 사람들은 학궁 곁에 사우를 세우고 “수의지(首義地)”라고 기록하고 정공(鄭公)을 주향으로 모시고 팔의사(八義士)를 그곳에 배향시켰다. 정해(丁亥)년 진휼어사 박필명(朴弼明)이 연석에서 이 사우에 현충(顯忠)이라고 사액하기를 건의하였다.
정공(鄭公)은 전에 이미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고 시호 충의(忠毅)를 주었다. 영종(英宗) 을묘(乙卯)에 순찰사(巡察使) 이기진(李箕鎭)가 올린 장계에서 세준(世俊)에게 병조참의(兵曹叅議)를 추증하고 나머지 일곱 사람에게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증직할 것을 청하였다. 오호(嗚呼)라. 당시 교활한 오랑캐는 서북 지방을 공격하여 더욱 북로(北路)에 힘을 기울였으니 함락되었고 서경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적의 기세는 불꽃처럼 한 순간이라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숨는 자가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안으로는 독전갈 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안에서는 개미만큼의 도움도 없었다. 위태로워서 망하는 것이 조석지간이었으며 한사람이라도 믿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저 여덟 사람은 모두 포의서생(布衣書生)일 뿐으로 조정(朝廷)에게 명을 받지 않았는데도 또 병기와 군량미가 모자란 상황에서 보탬이 될 수 있었고 의기 하나만으로 격려하여 빈 활을 당기고 칼날을 무릅쓰고 안의 넝쿨들을 제거하고 밖의 위협을 막아서 경성(鏡城)의 의병(義兵)들로 하여금 그 기세를 떨치게 하여 마침내 명쌍포(溟雙浦)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올리게 되었다. 수립한 것이 이와 같이 우뚝한데 그 은전을 받아서 조두(爼豆)를 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예(禮)에 이르기를, “대난(大難)에 저항하면 그를 제사지내야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덟 분과 같은 이는 진실로 의란 이름에 부끄러워 할만한 일이 없으니 온 고을 사람들 중에 비록 한 둘은 있어 역시 국중에 드러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물며 여덟 분씩이나 됨에랴. 또한 우리 열성조께서 덕으로 가르치고 배양하였던 힘이고 아울러 북쪽 인사들의 용감하고 강하고 의를 숭상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 윗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도를 강구함에 본디부터 그러함이 있는 것인가. 여덟 의사들은 그 선조가 모두 잠영(簪纓) 망족(望族)으로 국초에 북에서는 다만 부인(府人)에 불과하였다. 지금 향중(鄕中)에서 (儒武)를 업으로 하여 재행(才行)을 드러내는 자들이 모두 그 후손들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치솟은 저 자라봉에 우뚝한 사옥이 있구나.
누가 흠향하는 것일까 여덟 의사가 머무시는 곳이라네.
북쪽 사람들이 전하는 말 있으니 공들이 아니었다면 오랑캐가 되었을 것일세.
공은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라면 의는 나라에 있는 것이네.
옛날 임진년에 싹 쓸렸을 적에 교활한 오랑캐가 북쪽을 깨물었으니
미친 병화가 들판을 태우며 그 오랑캐들이 강역에 가득찼고
사나운 아전놈들 분수를 잊고서 귀한 분 묶어다가 왜적과 팔려하니
그 누가 그의 목을 누르고서 그 화를 끌 것인가?
달과 별이 홀연히 밝아지며 횡궁(黌宮)이 고요해졌네.
푸르고 푸른 그대들의 옷깃이여 끓어오는 배 속의 피들이여
한 손으로 무엇을 잡을까 도끼가 아니면 창이라네.
의를 가졌다면 어디를 향한들 이기지 못할까?
반란군을 섬멸하고 예봉을 꺾으니 적의 장군 혼비백산
풍성을 울리니 바다가 뒤집히고 산악이 꺾이는 듯
경성의 군대들은 이내 떨쳐 일어나 구진이 다 회복되었고
선비들이여 저토록 씩씩하고 우뚝한지요.
무엇으로 그 공을 갚을까 좌우에서 제사를 바칠 것이니
왕께서 말하기를 이곳을 현과 충으로 사액하노라.
후세에 오는 사람들은 너희 조상들을 본받고
백성들아 선비들아 의사들을 모범으로 삼거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계사년(순조 33, 1833년) 8월 일에 비를 세우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형조판서(行刑曹判書) 겸(兼) 지경연의금부성균관사(知經筵義禁府成均館事) 세손좌부빈객(世孫左副賓客)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정원용(鄭元容)이 찬술하다.
해석문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가져간 뒤 야스쿠니 신사 보관 하였다가
2005년 10월 20일 북관대첩비 일본에서 100년 만에 환국
2006년 03월 01일 북한 개성에서 인도인수식
2006년 03월 23일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리에 복원
*.북한 제193호 국보유적으로 등록
2006년 04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 앞마당에 북관대첩비 복제비 건립 하였음
출처: 염대장 블로그
20세 휘 허관(灌) 明宗14년 己未(1559)生 宣祖 壬辰 오윤적(吳允迪)等 八士 倡義誅賊 鞫景
仁 以淸北道 丙戌十月十九日 卒 贈 戶正兵議 庚戌特 提學有錄券 肅宗 33년 丁亥(1707) 立祠
會寧 贈 額顯忠 配 金海裵氏 父 배원국(元國)有一女 配 宜寧南氏 父 南延運 墓 小浦洞 丑原
合窆.아버지는 靑松僉事 허억(億)이다. 할아버지 大護軍 허경(璟)께서 中宗5년 庚午(1510 )에
외구 外舅(장인) 판서 鄭順이 以罪하여 귀향길에 오르자 장인과 함께 회령에 入居 하였다.
순조실록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로 나오고 純祖는 특별히 從2품 규장각 부제학으로 추증하라
명하다.
작성자 : 허현강
작성일 : 2020-02-05
유익한 자료를 계속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속적인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앞으로도 많은 자료 부탁드립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거나,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 또는 단체 등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반복적 게시물, 폭력성 글등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 없이 수정·삭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하여 불법유해 정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