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23세 중추부사 휘 허쟁(崝)의 묘표

* 위 사진을 클릭하면 다운로드 됩니다.


허쟁           

이칭별칭 탁보()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573년(선조 6) ~ 1663년(현종 4)
성격 무신
성별
본관양천()
대표관직(경력)부산진첨절제사, 인동도호부사(使), 동지중추부사, 장흥부사

1573(선조 6)∼1663(현종 4). 조선 후기의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양천(). 자는 탁보(). 1606년(선조 39) 무과에 급제하고 곧 선전관에 임명되었는데 영창대군()이 강화로 쫓겨갈 때 선전관으로 따라갔다.

이어 절충장군()·가을파진첨절제사(使)를 거쳐 조방장()으로 승임되어 1년 동안 함흥에 있다가 할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첨지중추부사, 이듬해 결성병마도위()를 지내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위장()으로 인조를 따라 강화에 호종하였다. 그 뒤 부산진첨절제사가 되고 1634년 인동도호부사(使)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내승 겸 선전관으로 왕과 함께 남한산성에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호종의 공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어 낙안·장흥의 부사를 역임하고, 1641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전려()로 돌아갔다.

독서하다가 고인의 격언을 얻으면 벽 위에 써놓고 반성의 자료로 삼았다. 1652년(효종 3) 자헌대부(), 1662년(현종 3) 정헌대부()에 올랐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네이버 지식백과] 허쟁 [許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허쟁[ 許崝 ]

    원본글 출처

    허쟁의 묘표(墓表)

    저자

    허목(許穆)

    본관

    양천(陽川)

    이명

    : 탁보(卓甫)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2 무변(武弁)

     

    ()의 휘()는 쟁()이고 자()는 탁보(卓甫)이며, ()은 허씨(許氏)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할아버지 허기()는 증 호조 참판(戶曹參判)이고, 아버지 허용(許容)은 증 병조 참판(兵曹參判)이며, 어머니는 풍양 조씨(豐壤趙氏)로 우리 태조의 공신 조암(趙巖)의 후손이다.

     

    공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여 선조 39(1606)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그 뒤 8년에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였다. 3년에 가을파진 첨절제사(加乙坡鎭僉節制使)로 나가서 능력을 인정받아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여 함흥(咸興)에 머물다가, 1년 만에 할머니가 세상을 마쳐서 초상을 치르러 돌아왔다.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에 위장(衛將)이 되었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으로 바뀌었다.

     

    인조 원년에 결성 병마도위(結城兵馬都尉)가 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의 금군(金軍) 침입 때에는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강화도에 가서 위장으로 있다가 부산진(釜山鎭)의 첨절제사로 나갔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에 인동 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가 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에 내승(內乘) 겸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는데, 이해 겨울에 호란(胡亂)이 있어서 이듬해 봄에 거가(車駕)가 남한산성까지 파천(播遷)하였다가 돌아와 호종한 문무 백관들에 상을 내림에 따라 공도 관례대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뒤에 연이어서 낙안 군수(樂安郡守), 장흥 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를 지냈다.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에 어머니 조 부인(趙夫人)이 몰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치고도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탄식하기를, “노모가 이미 세상을 마치었는데 다시 누구를 위하여 봉양을 구하겠는가? 전려(田廬)에서 늙는 것으로도 족하다.” 하였다. 제사를 공손히 받들고 친족과 화목을 도모하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아무 일 없이 책이나 즐겨 읽었는데, 고인들의 격언을 볼 적마다 반드시 벽에 써 붙여 놓고 성찰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80세로서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수직(壽職)을 제수받고,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90세로서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수직을 제수받았으며, 그 이듬해 정월 17일에 세상을 마치었다. 공은 평소 담박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여섯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냈음에도 재산을 불린 적이 없었다.

     

    정부인(貞夫人) 채씨(蔡氏)는 본관이 인천(仁川)이고 추밀원 사(樞密院使) 채보문(蔡寶文)의 후손이다. 공보다 23년 먼저 죽었는데, 묘는 광주(廣州) 소산(蘇山) 공과 같은 터에 서향으로 안장되어 있다. 3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허집()허숙(許埱)허육(許堉)이고, 사위는 생원(生員) 이민급(李敏及)이다. 측실의 자녀 네 사람으로 아들은 무과(武科) 허단(許壇), 허질(許垤)이고, 사위는 권관(權管)과 안호(安鎬)이다. 내외 자손이 40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쟁 [許崝]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목록

댓글 목록

입력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거나,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 또는 단체 등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반복적 게시물, 폭력성 글등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 없이 수정·삭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하여 불법유해 정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