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곡 이달과 허초희 허균의 만남 〓◑손곡 이달의 문학사랑
1. 허균. 이달을 스승으로 모시다
허균이 처음 손곡(蓀谷) 이 달(李 達)을 만났을 때 천재로 자부하던 그의 눈
으로도 이 달의 진면목을 간파하지 못했다. 허균의 높디 높은 자존심으로 다른
사람의 실력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 달의 꾀죄죄한 모
습이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홍만종(洪萬宗)이 전
하는 두 사람 사이의 첫 대면 모습은 참 상징적이다.
원래 이달은 허균의 둘째 형 하곡(荷谷) 허봉(許●)과 절친한 사이였다. 이
달이 이렇게 허균 집안에 무시로 드나들게 된 것은 순전히 허봉과의 교분 때문
이다. 이달이 젊었던 시절, 하루는 허봉을 만나러 그의 집에 들렀다. 마침 허
균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처음 만나는 처지인데다 자기 형의 절친한 친구임에
도 전혀 예우하지도 않았고, 태연하게 시에 대해서 마구 이야기하였다. 허봉은
민망하기도 했을 법하고, 동생 허균의 태도가 방자하게도 보였을 법도 하다.
순간, 허봉은 이렇게 말한다. “시인이 자리에 계시는데, 우리 아우는 소문도
못 들으셨는가? 아우를 위해 내 한 번 시험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운자
(韻字)를 불렀는데 순식간에 시 한 편을 짓는 것이었다. 그 중 한 구절이 바로
“담 모퉁이 작은 매화 피었다 지는 것 다 마치자, 봄 마음은 살구꽃 가지로
옮겨 갔구나(墻角小梅開落盡, 春心移上杏花枝).” 허균은 깜짝 놀라 자신의 무
례를 사죄하고는 `시의 벗(詩伴)'이 되었다고 한다.
이달의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또는 서담(西潭)이다. 교리(校理)
벼슬을 지낸 홍주인(洪州人) 이수함(李秀咸)의 아들로 어머니는 기생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외모는 잘 생기지 못했지만 글씨를 잘 썼으며 술을 즐겼고 고금
의 역사와 산수(山水)에 해박하였다. 그의 생몰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
지만, 1539년(중34)에 태어나 1612년(광해4)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관기(官妓)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 달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미천한 출신에 더하여 가난한 살림살이는 이달의
평생을 방랑과 시주(詩酒)로 일관되게 하였다. 오죽하면 초기 국학자였던 김태
준은 그를 `김삿갓'에 비유했을까.
이달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자세한 글은 허균이 쓴 `손곡산인전(蓀谷山人
傳)'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생애는 대부분 허균의 글에 의한 것이다. 앞
서 인용한 일화에서는 `시의 벗'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이 어찌 요즘 우리
가 말하는 `친구' 수준이겠는가. 허균이 이달을 자신의 시 스승으로 모셨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 조선 중기 당시풍(唐詩風)을 주도하다
우리 문학사는 이달을 삼당시인(三唐詩人)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고죽
(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더불어 조선 중기 시단
의 흐름을 송시풍(宋詩風)에서 당시풍(唐詩風)으로 바꿔놓은 주인공으로 언급
한다. 일반적으로 송시는 서사적이고 이지적인 시풍을 보였고, 당시는 감성적
이고 묘사적인 풍모를 보였다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시풍은 소동파
(蘇東坡)나 황산곡(黃山谷), 진사도(陳師道) 등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 창작을
했다. 이전과는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는 옛것을
숭상한다는 기치 아래 한시의 평측(平仄)을 의도적으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감
성을 표현한다든지, 자주 사용하지 않는 험벽한 운자를 사용한다든지, 남들이
잘 모르는 궁벽한 곳에서 전거를 빌려와 표현을 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낸
다. 특히 이들 시풍은 과거 시험에서의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너도나도 배우는
모델로 작용한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문단의 분위기가 당시풍으로 전이된 사건은 그 자체로
문학사적 중요성을 가진다. 그 중심에 이달이 위치한다.
이달이 애초부터 당시풍에 젖었던 것은 아니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소동
파의 시법을 본받아서, 한 번 붓을 잡으면 수백 편을 지었는데 하나같이 읊조
리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당시 재상을 지낸 사람(思菴) 박순(朴
淳)을 만나서 이런 충고를 듣는다.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나라 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하오. 소동파의 시가 호
방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격조는 한 등급 떨어지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이달은 예전의 시법(詩法)을 완전히 버리고 원주의 손곡(이달
의 호가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으로 들어가 새로운 시를 익히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성당(盛唐) 시기의 유명한 시인과 유장경(劉長卿),
위응물(韋應物) 등의 시집을 읽으며 손곡에 묻혀 산 지 5년이 되자 홀연 구사
하는 시어(詩語)가 자신도 모르게 맑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시인
으로서의 명성이 더욱 높아간다.
현재 전하는 이달의 시는 허균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 허균은 이달이 죽자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한시 200수와 홍유형이 소장하고 있던 130여 편, 이재영
이 가지고 있던 시 원고를 모아서 `손곡집'을 편찬한다.
3. 시세계에 자신의 현실 모습을 담아
이 달의 시는 전반적으로 음울한 빛을 띤다. 신분적 한계에서 오는 절망은
젊은 이 달의 기상을 꺾었고, 현실적 궁핍에서 오는 삶의 어려움은 그를 끝없
는 방랑의 길로 몰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심한 절망과 좌절에 휩싸인
그의 방랑은 한 시인의 어두운 시세계를 만든다. 현실의 거대한 힘은 나약한
한 개인의 삶을 무력하게 만들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은 부득이 유
목인으로서의 문제적 개인을 만들어낸다. 다음과 같은 시에서 그러한 모습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밤 비에 가을 연못 넘치고, 가을 연꽃 대부분 죽어버렸네. 잎 위의 쓸쓸한
빗방울 소리, 놀라 일어나는 잠든 원앙새(秋雨漲秋池, 秋荷太多死. 蕭蕭葉上
聲, 驚起鴛鴦睡).” -연당의 밤비 `蓮塘夜雨'-
그림같은 묘사와 가을의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정서적 흥기는 당시의 경지
에 근접한다. 각각의 구절마다 하나의 그림같은 이미지가 숨어있고, 그것은 모
두 잠에서 놀라 깨어나는 원앙새를 향해 구성된다. 다정하고 안온한 이미지의
전형인 원앙이 놀라 일어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간고한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가 여기서 머물렀다면 문학사적 평가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
신의 힘든 현실을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으로 넘어선다. 현실의 질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얽어맸지만, 그는 시 속에서 자유로웠다. 고독한 지상의 이달은 언
제나 은하수 반짝이는 선계(仙界)를 꿈꾼다. 지상에서 꿈꾸는 선계는 언제나
슬픈 정조를 동반한다.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은 때때로 절망과 동의어가 아닌
가. 그의 시가 슬픔 가득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 역시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
지만, 그의 아름다운 시 세계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
직인다.
허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달의 생애는 이러했을 것이다. “그의 몸이야 곤
궁했어도 불후의 시 작품을 남겼으니, 한 때의 부귀로 어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
- 김풍기(강원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 -
[출처:쌍매당 이첨. 손곡 이달 학슬연구사업회 카페, 2019.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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