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사업본부는 7월 30일 인도 우정청과 함께 ‘허황후’를 소재로 한국-인도 공동우표 2종을 발행했다. 한국은 허황후의 영정과 수로왕비릉도를, 인도는 허황후의 공주 시절과 파사석탑을 담았다.
인도에는 허황후 공원이 있다. 김해시와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아요디아시는 2001년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아요디아는 시내의 사류강변에 허황후 기념공원(2430㎡)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인도 정부는 2018년 허황후 공원을 한국식으로 리모델링하고 있다. 이곳에 허황후릉도 조성된다. 올해 말 완공 예정이다. 공원부지는 20배 이상 커졌다(5만5765㎡). 특히 한국이 설계와 디자인을 맡았다. 한·인도 간 긴밀한 역사적 관계와 한국의 정보통신기술(IT)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사업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모디 총리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허황후가 한·인도의 역사적 인연과 문화교류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황후는 누구인가.
허황후는 가락국의 창업주인 김수로왕의 왕비다. 시호는 ‘보주태후’다. 김수로왕은 김해 김씨의 시조다. 허황후는 김해 김씨와 함께 김해 허씨 시조모다.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이인 거등은 가락국의 왕통을 이었다. 일곱 명의 아들은 불가에 귀의했다. 나머지 두 아들에게는 모계인 허씨 성을 물려줬다. 오늘날 김해 허씨는 허황후의 자손인 셈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모계성이다.
허황후는 본래 고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다. 이름은 ‘수리라트나’다. 서기 48년 배를 타고 금관가야로 건너와 김수로왕과 혼인했다. 그가 머나먼 타향으로 시집온 것은 아유타국 왕과 왕후의 꿈 때문이다. 꿈에 옥황상제가 나타나 수리라트나를 김수로왕에게 시집 보내라는 명령을 했다고 한다. 그는 오빠 장유화상과 부왕의 신하 수십 명, 노비, 그리고 넉넉한 재물을 싣고 가락국 도두촌에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가져온 물건 중에는 천도복숭아와 파사석탑이 있었다. 천도복숭아는 도교, 파사석탑은 불교를 각각 상징한다. 그의 도래와 함께 가락국에는 도교와 불교가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그의 출신지와 관련한 의문이 적지 않았다. 도교는 중국, 불교는 인도 지역 출신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은 허황후의 출신지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불교 발상지인 인도로부터 허황후가 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불교의 역사적 정통성을 만들었다는 설, 야유타국이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이라는 설, 기원전 1세기 인도 야요디아 왕국이 태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아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 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허씨족이 옮겨왔다는 설 등이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런데 한 고고학자의 집요한 탐구에 의해 궁금증이 풀렸다. 김해 김씨의 후손인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가 주인공이다. 그는 김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물고기 한 쌍(쌍어신앙)과 왕비 능비에 새겨진 글자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에 주목했다. 무려 46년간 허황후 도래 경로를 추적했다. 추적과정은 그의 저서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아유타국은 기원전 7세기경 아리아족이 세운 인도 코살국의 중심도시 아요디아다. 중국에서 일어난 한나라와 흉노의 대립에 영향을 받아 아요디아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해 지금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보주)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태어난 허황후가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왔다.”
< 김경은 기획위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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