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돌을 읽다」
허정진
어느 시골 마을에 빈집들을 둘러본 적이 있다. 잠시 거주할 요량이었는데 ‘편리’보다 ‘운치’를 찾고 있었다. 마을 끝자락에 자그마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겉과 뼈대는 그대로 두고 실내 일부만 개량한 옛집이었다.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손바닥만 한 텃밭까지 갖춘 집구조가 아기자기하다. 더구나 집 울타리가 요즘 흔치 않는 대나무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고저늑한 풍경도 곁들었다. 바람결에 댓잎 흐르는 소리, 마당 한구석에 기울어진 오후의 볕살이 넉넉하고 느릿한 시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장독대 옆에 수돗가가 있다. 예전에는 우물터였음직한 정겨운 그림자들, 돌확과 돌 빨래판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여름철이면 수박이나 참외도 동동 띄어놓기도 하고 아이들 줄 세워 어푸어푸 등물도 켜던 곳이었으리라. 손때 묻은 공간마다 유년의 굴풋한 그리움이 숨어있는 것 같다. 두리번거리는 눈길 따라 마당 쪽 수돗가 가장자리에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숫돌이다.
거뭇하지만 미끈한 피부를 가진 쑥돌 종류이다. 한 치 폭의 날렵한 몸과 구부정하게 패인 등마루가 단단한 돌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다. 제 몸 갈아낸 나이테만큼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장들의 날을 세워왔을까. 팔뚝 길이도 안될 만큼 왜소한 모습이어서 왠지 연민마저 느껴지지만 세상 무슨 일이든 선뜻 감당하려는 듯 당당하고 강단 있는 자세이다. 맞춤옷처럼 숫돌을 에워싼 나무틀에 연륜 때문인지 마른버짐 같은 이끼가 버석거린다. 오목가슴처럼 굽은 등허리가 자꾸만 서글프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기호학 같은 슬픈 사연들이 겹겹이 웅크리고 있을 것 같다.
날 있는 것은 모두 여기 숫돌을 거쳤으리라. 시커먼 무쇠로 만든 조선낫이나 식칼, 도끼, 쇠스랑, 곡괭이, 호미, 대팻날 등등. 대장간 불내 풀풀 나는 날붙이지만 숫돌의 다스림을 거치지 않고는 제 구실을 못했으리라. 산안개 내려앉은 희뿌연 새벽녘, 오늘 사용할 농기구들 꺼내다 숫돌에다 벅벅 갈아 시퍼렇게 날을 세우면 하루 일과가 벌써 절반이나 끝난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을 테다.
세안하듯 숫돌에 물을 뿌리고 무뎌진 무쇠 낫을 슬쩍 올린다. 팔뚝에 몸을 실어 천천히 밀고 당기면 저 아래로부터 전해오는 묵직한 중량감, 등짝위에서 아무리 몸을 놀려도 흔들림 없는 든든한 무게중심이 느껴진다. 팥죽 같은 붉은 녹이 일어나고 쌀뜨물처럼 하얗게 번져가는 분비물을 보면 지금 정갈하게 벼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 마음의 한 축이 아닐까 착각이 들기도 한다. 걸쭉한 숫돌물과 함께 시큼한 쇳내가 코끝을 간질여온다. 정성스럽게 간 날을 햇빛을 향해 비춰보고 있으면 멀리서 뻐꾸기 울음이 들려오곤 했으리라.
강한 것은 여문 것을 구슬리고 여문 것은 강한 것을 구슬리는 연마의 법칙. 낫이나 칼을 숫돌에 갈아보면 안다. 차돌같이 야물고 단단하면 밀착감이 없어 갈려는 연장이 미끄러지고 겉돌게 되어있다. 한참을 씨름해도 날이 서지 않는다. 날이 선다는 것은 갈려는 연장과 숫돌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아낌없이 허용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인모양이다.
밀고 당기면서 쓱싹거리는 소리. 돌과 쇠가 만나 부딪치는데도 결코 불쾌감이나 이질감이 들지 않는, 조금은 가슴을 명징하고 확장하게 만드는 소리다. 억지로 맞부딪쳐서 나오는 불협화음이 아니라 스스로 들이쉬고 토해내는 염화시중 같은 소리라고 할까. 겨울바람에 제 몸을 허공에 풀어내는 억새들이거나 넓은 백사장을 끊임없이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파도소리 같기도 한 중저음이 저벅저벅 다가온다.
결코 음정을 높여 외치는 법 없이 낮고 느린 그 소리에는 삶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지 않았나싶다. 아프고 슬픈 일에 혼자 속으로 삭혀가며 우는 소리이거나 지치고 힘든 일에 뼛심을 다하느라 서느런 바람이 들락거리는 소리는 또 아니었을까. 짐 진 삶의 무게가 마냥 아래로 침하하는 것 같은 느낌 속에는 은결든 삶에서 나오는 울음은 아닐지라도 가만한 한숨 같은 것들이 숫돌 가는 소리에 뒤섞인다.
때로는 그 숫돌에 내 모난 마음을 부드럽게 다듬어보기도 했으리라. 다잡지 못한 일상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분노와 원망의 상처투성이도 그 숫돌에 아낌없이 맡겨보았으리라. 고운소리 한 마디 못해 토라진 아내에게 신산한 마음도, 더 하고 싶은 공부도 가난 때문에 말려야만 하는 자식에게 면목 없는 마음도 그 숫돌을 방편삼아 헛기침으로 갈아보았으리라. 세상은 변해 가는데 자꾸만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지는 내 자신도 숫돌을 갈며 다시금 추스르고 다짐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리라.
녹슨 쇠를 갈아 빛나게 해주는 숫돌은 결코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제 몸이 닳아 없어지는 대신 무뎌진 날을 세우는 대척점에 있었다. 처음부터 옴폭 패여 굽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제 몸이 깎여져나가는 아픔을 견뎌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등골이 휜다거나, 누군가의 등받이가 된다는 것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 희생의 원천이었으리라.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을 견뎌내고 살얼음 같은 좌절과 비애를 참아내는 원동력이 그것이었다. 세상 앞에 마냥 움츠려든 어깨나, 땅만 보고 걷는 구부정한 허리나 모두 누군가를 위해 갖은 노고와 인고의 세월을 거쳤다는 증거이다. 한포기 감자 꽃을 피우거나 누군가의 열매를 위한 자양분이 되려면 내 몸이 썩어 문드러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사라져간다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눈부신 산화일지도 모른다. 비록 내 몸이 부서져 없어지지만 날을 갈아 세상에 나가 제 용도와 쓸모를 다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 내일의 준비고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입신양명이든 부귀영화든 세상을 살아갈 제 밥벌이를 하라는 뜻이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못 다한 내 꿈, 가문의 영광을 빛내라는 주문이다.
칼날은 숫돌에서 다시 태어난다. 숫돌 없이는 누구도 반짝반짝 빛나는 날붙이가 될 수 없다. 그 세워진 날로 세상 겁 없이 내달리며 자기 길을 내고 자기 뜻을 세상에 꽃피웠다. 나를 위해 거친 세상에 몸으로 막아섰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그 결과로 성장하고 성공도 하였지만 닳고 닳아 초승달 같이 변한 숫돌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살아온 것이 아닌지 부끄럽기만 하다.
돌에도 향기가 있다면 숫돌이야말로 석향(石香)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제 몸을 허물고 비우느라 작고 볼품없게 변한 숫돌이지만 헌거한 삶의 무게감이 묵묵히 느껴진다. 이제는 제 역할도 끝난 듯 모두 떠난 자리에 홀로 남겨진 저 숫돌, 평생을 여백으로만 살아낸 아버지를 만난 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
<선수필/2019 가을호>
[출처 : 선수필작가회 카페, 2019.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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