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가문
우리 선대는 야당(野堂) 선생 후로는 두 대를 이어서 과거에 오른 분이 없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 때에 와서 형제분들이 과거에 뽑혔으니 계씨(季氏) 분은 사간(司諫)에 그쳤고, 고조께서는 벼슬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사간의 아들 집(輯)은 벼슬이 지사였으며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다. 우리 증조는 과거를 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으며, 위(渭)는 지평(持平), 온(溫)은 승지였다. 조부는 문장에 능했으나 일찍 돌아가셨고 , 선대부 대에 와서 비로소 드러났다. 우리 삼 형제가 함께 문과에 올랐는데, 큰 형은 육경이고 둘째형은 학사, 나도 당상관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큰형님의 아들 실(實)이 문과에 올라 정언(正言)이 되었고, 여러 조카들도 모두 성품이 맑고 글로써 이름이 있다. 이것은 모두 선조께서 공덕을 쌓은 효과로 대개 오래될수록 더욱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허균 가문의 문장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을 사림에서 높게 쳤다. 큰 형(악록 허성)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작은 형(하곡 허봉)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하여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난설헌 허초희)의 시는 더욱 맑으면서 장하며 높고 고와서 개원(開元:당 현종의 연호), 대력(大歷:당 대종의 연호) 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까지 전파되어 천신사부(薦神士夫)가 모두 칭찬한다. 재종형 체씨는 고문을 공부해 시격이 매우 높고 굳세며 부는 더욱 뛰어나 국조 이래 그 짝이 드물다. 나도 불초하나 또한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들어가고, 중국 사람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네 부자가 함께 제고(制誥)를 맡았다. 아버님(초당 허엽)이 작고하자 형이 또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으며, 삼 형제가 모두 사필(史筆)을 잡기도 하였다. 작은 형과 나는 함께 과거에 장원했으며, 나는 또 세번이나 원접사(遠接史)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시에 문헌하는 집으로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첫째로 꼽았다. 옛날에 유효작(劉孝綽) 일가에 부자와 자매가 문장에 능했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허사(許史는 한 나라 선제 때 외척이었던 허씨와 사씨) 부귀와 왕사(王謝는 진나라 王坦之와 謝安의 일족)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 문헌에는 미치지 못했다,"라고 했는데, 나도 우리 집 또한 그렇다고 말하겠노라.
[출처: 국역 성소부부고 3,(卷 24 說部3) 허경진 장정룡 역, 난설헌출판사 2018년 12월 14일 발행]
작성자 : 허세광
작성일 : 2019-10-06
교 산공께서 남기신 성소부부고 외 국역사업은 절반을 하였으나 3000여만원의 예산확보문제로 아직 100% 완료하지 못하였으나 장정룡 강릉원주대 교수님이 강원학연구센터장으로 있어 지난 교산.난설헌 문화제시 학술대회를행사 마치고 곧 바로 강원학연구회의주재 시 참석한 확회회원들의 긍정적인 공감대를 받아 내년도 시,도비 등 예산이 확보되면 국역사업을 마무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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