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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황서향의 꽃향기 [박대문], 2025.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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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황서향의 꽃향기

202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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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서향(삼지닥나무), 학명 Edgeworthia chrysantha (팥꽃나무과)

춘분이 눈앞이지만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식물원에서 만난 한 송이 꽃이 참으로 화려했습니다. 이름하여 황서향! 옆에서 보니 하얀 솜털 뭉치나 샤워기 헤드(head)처럼 보이더니만 정면에 서서 활짝 핀 꽃을 바라보니 봄기운과 향기가 화끈하고 화사하게, 폭죽 터지듯 다가오는 꽃송이였습니다.

만화방창(萬化方暢), 꽃 피는 계절이 성큼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산야의 대부분 봄꽃은 초겨울의 습설(濕雪) 피해와 입춘에 이어 우수, 경칩이 지났음에도 폭설과 차가움이 가시지 않아 꽃망울이 한창 부풀다가 추위에 상하거나 머뭇거립니다. 예년보다 개화(開花)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꽃이 필 시기가 되었음에도 이상기후에 따른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춰 살아야 하는 식물들의 어려움도 적잖아 보입니다. 하나의 생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힘겹기는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끊임없는 선택과 적응의 과정을 거치고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이번 겨울에는 식물원 몇 군데를 흥미롭게 둘러보았습니다. 최근 들어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수목원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대부분 수목원에는 학습, 볼거리, 해외 식물 소개를 위한 정원수를 심고 덧붙여 기후 조건이 다른 지역의 식물 재배를 위한 실내 식물원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국력 신장과 더불어 시민들의 자연 친화적 정서 함양과 학생들, 특히 유치원생들을 위한 야외 학습시설을 갖춘 수목원이 많아져 참 좋습니다. 가족 나들이 겸 훌륭한 자연학습장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1909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인 창경궁 대온실을 비롯하여 남산식물원, 과천 서울대공원 등 손꼽을 만큼 몇 안 되던 식물원이 최근 들어 서울 근교만 하더라도 20여 개에 이를 정도이니 국력 신장과 선진국이 되어가고 있음을 새삼 실감합니다.

금세 필 것만 같았던 봄꽃들이 이상 한파(寒波)로 꽃 피는 시기가 예년보다 늦어지고 있습니다. 필동 말동 주춤하는 봄꽃과의 눈맞춤이 그립지만 늦어지는 탓에 봄바람도 쐴 겸 한번 가보고 싶었던 여주의 황학산 식물원을 찾았습니다. 판교-여주를 잇는 전철 경강선 차창 너머로 어른대는 들판과 야산에는 봄기운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차창을 지나는 갯버들 가지와 야산의 소나무에 푸른 기운이 더욱더 돋보이고 햇살도 따사로웠습니다. 여주역에서 내려 교통이 한적한 황학산 수목원까지는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수목원 야외의 화초는 아직 피어나지 않았지만, 실내 식물원에 들어서자마자 맑고 은은한 꽃향기가 진동했습니다. 무슨 향이 이렇게 좋을까? 달콤하고 은은한 향에 흠뻑 젖는 느낌이었습니다.

식물원 안에는 다양한 봄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보춘화, 앵초, 새끼노루귀, 향설초 등 풀꽃이 피어 있었고 고개를 들어 보니 만개한 나무꽃들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동백꽃과 겹동백꽃도 화려했지만, 더욱 강하게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백서향, 서향, 황서향이었습니다. 이른 봄, 향기로운 나무꽃으로 잘 알려진 팥꽃나무과(科)의 서향 삼총사가 한 곳에서 함께 피어 있었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무더기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서향 가족 즉, 새하얀 꽃, 샛노란 꽃 그리고 홍자빛 꽃이 동시에 횃불 피워 올리듯 꽃불을 놓았으니 눈이 부셨습니다. 향기마저 온실 안에 그득하니 혼미할 만큼 곱고 아름다운 향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이른 봄 나무꽃 향기의 대표급이라 할 수 있는 백서향, 서향, 황서향이었습니다.

팥꽃나무과(科)의 서향 삼총사 즉, 백서향은 맑고 순결한 하얀 꽃, 황서향은 새하얀 털북숭이 화관에 샛노란 꽃, 서향은 홍자빛 화관에 야들야들한 속살 같은 연분홍 꽃을 피웁니다. 이중 특히나 저의 눈길을 사로잡는 꽃은 바로 황서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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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황서향의 꽃향기

황서향은 크기가 높이 1~2m인 낙엽성 활엽관목입니다. 서향, 백서향과 함께 팥꽃나무과에 속하며 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서향을 닮은 노란 꽃이 핀다고 하여 황서향이라고 부릅니다. 정명(正名)은 삼지닥나무입니다. 황색을 띤 굵은 가지가 마디마다 3갈래로 갈라져 자란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잎이 나기 전인 이른 봄에 잎겨드랑이나 가지 끝에서 공 모양의 두상꽃차례에 황색의 꽃을 피웁니다. 수줍음에 고개 숙인 듯한, 하얀 솜털로 덮인 꽃망울이 몽실몽실 부드럽게 생겼는데, 그 모양이 마치 샤워장의 헤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삼지닥나무, 황서향은 각각의 꽃 길이가 1cm 정도의 긴 통 모양으로 끝은 네 갈래로 갈라지고, 바깥쪽에는 흰 털이 빽빽하게 나 있습니다. 옆이나 뒤에서 보면 하얀 털북숭이처럼 보이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안쪽에 샛노란 꽃판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훅하고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얄따랗고 보들보들한, 하얀 솜털에 덮인 꽃부리의 화통(花筒)이 더없이 귀엽고 앙증맞습니다. 그 하얀 털북숭이 화통의 안쪽을 보면 샛노란 색깔의 화사한 꽃잎이 깜찍해 보입니다. 아직은 차가운 봄 날씨 속에서 짙은 색도 아닌, 여린 듯 강렬한 노란 꽃잎이 따스하게 가슴에 와닿는 꽃입니다.

중국 원산으로 추위에 약해 중부지방에서는 월동이 어렵습니다.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등 남부지방과 제주도에 심어 왔습니다. 나무껍질의 섬유질이 곧고 견고하여 고급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심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귀한 종이 재료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지폐를 만드는 데 이 나무껍질로 만든 펄프를 넣었다고 합니다. 한때는 전남 고흥 지역에서 집단 재배하여 전량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으나 일본 조폐공사에서 재료를 바꾸면서 수출이 중단되고 고흥 지역의 삼지닥나무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관상용으로 많이 심습니다. 현재 고흥 등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야생화한 나무가 산야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고흥의 금탑사를 비롯한 남부지방의 일부 사찰과 남해안 및 제주도 지역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향기가 좋아 천리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향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마치 난처럼 은은한 향을 풍기는데 약간 달콤한, 감미로운 향입니다. 샤워기 헤드처럼 생긴 꽃망울 밑에 서니 감미롭고 은은한 향으로 샤워를 한 듯 온몸이 향에 젖는 느낌입니다. 고운 향에 꽃 모양 또한 큼직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데도 꽃망울은 얌전히 고개 숙여 꽃이 핍니다. 다소곳한 새색시처럼 부끄럼 많고 겸손한 봄꽃입니다. 그렇지만 낙엽 지는 가을부터 꽃망울을 부풀려 찬바람과 차가운 눈 속에서는 강인하게 버텨내는 식물입니다. 다부지게 불끈 쥔 어린아이의 주먹처럼 보이는 솜털 꽃망울은 찬바람을 이겨내고자 하는 다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크지도 않은 자그마한 나무에 옹기종기 매달린, 햇병아리 같은 노란 꽃송이가 따스한 봄소식을 살포시 귀띔이라도 하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여린 듯 강하게 다가오는, 하얀 솜털 같은 화통(花筒)에 숨겨온 샛노란 꽃잎! 번쩍이는 섬광처럼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솜털에 싸여 수줍은 듯 고개 숙인 꽃망울에 피어난 샛노란 꽃판과 여린 듯 진한 꽃 향이 휘몰아치는 꽃바람 태풍처럼 가슴에 와닿습니다.

이른 봄 황서향 꽃향기

한겨울 여린 주먹 불끈 쥐고
하얀 솜털 속에 고이 키운 꽃망울,
이른 봄 살포시 꽃잎을 연다.

수줍은 듯 고개 숙인
몽실몽실 고운 꽃,
열고 나니 환상이다.
번쩍이는 폭발이다.

샛노란 봄기운이 섬광처럼 뻗치고
은근스레 감미로운 꽃 향은
샤워기 물줄기처럼 사방을 적신다.
일순에 내리쏟는 봄기운과 꽃 향,
솜털 속에 숨겨온 꽃향기 태풍이다.

(2025. 3월 황서향 꽃 향 아래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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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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