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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공파 36세 허찬국 박사의 칼럼,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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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를 홀로 건넌 카약

2024.04.23

2022년 10월 중국 동남부 지역의 저장성(浙江省) 원링(溫岭)시 인근 바닷가에 사람 손을 탄 지 오래된 카약(kayak) 한 척이 떠밀려온 것을 지역의 카약동호회 사람들이 발견했습니다. 흔치 않고 꽤 비싼 장비라 SNS 등을 통해 주인을 찾았으나 허사였죠. 그도 그럴 것이 배의 주인은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600km 넘게 떨어진 제주도 서귀포시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혈 카야커(kayaker, 카약 타는 사람)인 선주는 2017년 10월 말 북서풍이 심히 부는 날 제주도 서남부 끝단에 있는 사계해안 가까이에서 이 서프스키 카약(파도 타기용 카약)으로 큰 파도를 타다가 배가 넘어지자 탈출 했습니다. 보통 이 종류 카약을 탈 때는 사람과 배를 연결하는 결박줄을 차지만 그날 선주는 이를 잊었던 탓에 빠르게 배와 멀어졌지요. 부력이 좋은 빈 카약은 강풍에 나뭇가지 날리듯 떼굴떼굴 먼바다로 날라 갔습니다. 유령 카약은 5년가량 해류를 타고 동중국해를 떠다니다 중국 원링시 바닷가에 상륙했지요.

이 카약의 오랫동안 외롭게 멀리도 떠다녔습니다. 어쩌면 이어도를 지나쳤을지 모릅니다. 제주도 해녀들의 구전민요 ‘이어도 사나’에 등장하는 ‘이어도’가 현재 해양과학기지가 위치한 동명(同名)의 암초섬과 달리 사람이 사는 세상임을 보여주는 작은 희망의 증표인지 모릅니다. 이 구전민요는 여자들이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정들이 어디엔가 살고 있을 거라고 자신들을,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되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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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사진1) 내린천의 필자. 우측(사진 2) 서귀포 앞바다의 필자.

필자는 60대 중반에 퇴임한 후 타기 시작한 늦깎이 카야커입니다. 카약타기(kayaking)는 물에 뜨는 재료로 만들어진 배(카약)를 카야커가 노(패들)를 저어 조정하는 레저 스포츠입니다. 전문적 분류는 더 다양하지만 내가 타는 카약을 기준해서 보면 두 종류입니다. 천(川), 강과 같이 흐르는 물에서 타는 급류 카약(whitewater Kayak, 배의 크기가 짧고 넓음)과 호수, 강, 바다와 같이 평수에서 타는 씨 카약(Sea Kayak, 배가 길고 가늠)입니다. (사진1)은 필자가 강원도 인제 내린천에서 급류 카약을, (사진2)는 제주도 서귀포 앞바다에서 씨 카약을 타는 모습입니다. 노를 저어 동력을 얻기 때문에 매우 환경 친화적이며, 카야커의 능력이나 취향에 적합하게 장소와 운동량을 정할 수 있는 매력적인 스포츠입니다.

카약을 타려면 물과 친해야 합니다. 물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니 당연한 요건이지요. 제주도에서 넓고 파란 해안선을 보며 자란 나는 수영도 꽤 하는 편이고 물과 친한 편입니다. 물론 바다나 강이 무섭게 변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기에 움직이는 물에 들어갈 때는 항상 긴장합니다. 카약이 더 보급된, 대개 고소득 선진국에서는 어릴 때 카약이나 카누를 접하는 기회가 많은 편이라 빨리 시작한 카야커들이 많습니다. 올림픽에도 카약 종목이 여럿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도 비교적 생소해 동호인이 많지 않은 편이고, 보통 40대 이상입니다. 골프보다는 저렴하지만 장비 마련, 제대로 안전하게 타기 위한 교육과정 등의 경제적 부담이 한 가지 이유일 듯합니다.

우기(雨期) 외에는 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급류 카약보다는 씨 카약이 더 흔합니다. 큰 강, 호(湖), 긴 해안선과 섬이 많지요. 씨 카약을 이용해 호수나 바다의 섬에 가 캠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배에 짐을 실을 공간이 있어 사람의 흔적이 드문 자연을 찾아 캠핑 다니는 카야커들이 주를 이루는 동호회도 여럿 됩니다. 필자는 날씨가 온화한 때에는 주로 내린천을 찾아 다른 카약 동호인들과 어울립니다. 그곳은 연중 수량이 많은 편이어서 일종의 급류 카약의 메카이죠. 또 거기에는 한국에서 카약 스포츠가 자리 잡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한 박영석(카약계 별명 거북이)씨가 운영하는 송강카누학교가 있어 카야커들의 교육, 장비, 숙박 등을 다 해결해줍니다. 젊은 시절부터 카약에 꽂힌 거북이님은 1980년대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카약 선진국에서 쓰는 장비를 도입해 국내 카약 스포츠 수준을 높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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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사진3)은 떠나간 카약과 선주(우측 끝)의 2017년 서귀포 해안 모습. 우측 (사진4)은 같은 카약이 서귀포에서 약 600km 넘게 떨어진 중국 윈링시 해안가에 임시로 수리되어있는 2024년 모습. 배 앞부분에 그려진 “olekayak club” 로고가 양국의 카약 동호인들이 연락이 닿도록 고리 역할을 함.

이어도 카약의 주인공은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 본거지(클럽하우스)가 있는 올레카약클럽을 시작한 허재성(별명 올카)씨입니다. 생업보다는 해양스포츠가 우선인 올카님은 서울에서 주요 일간지 사진기자·작가로 활동하다 귀향하여 지역에서 카약 활동을 활발히 벌여오고 있지요. 필자도 이 클럽에 가입해 틈틈이 제주바다에서 카약을 타고 있습니다. 카약이 중국으로 간 것은 이번 달 중순에 한 회원이 카약을 발견하여 건사하고 있는 중국 카약커와 SNS에서 연락이 닿아 알게 되었지요. 선주뿐 아니라 클럽 회원들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국의 동호인들도 무척 신기해하고 있지요. 올카님이 중국 카야커에게 배를 수리해서 쓰라고 했고, 중국 동호회에서 이 이야기를 중국 내 SNS에서 알리자 카약 제작사에서 수리를 일체 무상으로 해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올레카약 회원들에게 원링시에 오면 장비 일체를 제공할 테니 같이 카약을 타자고 합니다. 올카님은 실종 사건 이후 해양 스포츠의 안전 문제에 생각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세상이 넓은 듯 좁습니다. 넓은 바다를 이곳저곳 떠다닌 그 카약은 이어도를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바다는 수도 없이 많은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바다가 보기에 뭍의 사람들은 너무 아옹다옹, 생명의 귀함을 무시하면서 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원혼을 포함해 이어도로 간 사람들, 대양 곳곳에서 안타까운 연유로 생을 마감한 넋들이 편안하길 빕니다.

본문에서 다룬 카약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다음 누리집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송강카누학교(http://www.paddler.co.kr)

올레카약클럽(https://cafe.naver.com/ollekayak)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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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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