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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로 그린 그림, 미수 허목의 매(매), 2024. 1. 26.

글씨로 그린 그림, 미수 허목의 매(槑)

 

< 번역문 >

청악매(靑萼梅) 중 둥치와 가지가 밑으로 굽고 묵은 것을 대년고매(大年古梅)라 하고, 누자(樓子, 누자산다樓子山茶) 중 누런 좁쌀 같은 꽃밥의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대년누자라고 한다. 누자는 용주공(龍洲公, 조경趙絅)이 뜰에 심었던 좋은 품종이고, 고매는 한산옹(寒山翁, 송석우宋錫祐)에게서 나온 것이다. 용주공은 여든네 살을 살았고, 한산옹은 여든일곱까지 살았다. 지금은 두 노인 모두 세상을 떠나고 그들이 준 식물만이 석록암거(石鹿巖居)에 전하는데, 암거노인(허목 자신을 지칭) 또한 여든을 바라보니, 가히 식물의 고사라 할 만하다. ‘대년’이란 오래 살았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태령노인(台嶺老人)이 불여묵사(不如默社)에서 씀.

 

< 원문 >

古梅樓子大年說 

有靑萼梅, 樛幹老査, 謂之大年古梅. 樓子, 黃粟紅花, 謂之大年樓子. 樓子, 龍洲公庭植佳品. 古梅, 出於寒山翁. 龍洲公八十四, 寒山翁八十七, 今二老皆亡, 其植物留傳石鹿巖居. 巖居老人且八十, 可謂植物古事. 大年者, 識壽也. 台嶺老人書于不如默社.

 

- 허목(許穆, 1595~1682), 『기언(記言)』 권14 원집(原集) 중편(中篇) 전원거(田園居) 일(一) 「고매누자대년설(古梅樓子大年說): 오래 산 매화나무와 누자산다(樓子山茶) 이야기」

 

 < 해설 >

미수(眉叟) 허목은 17세기 남인(南人)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현종조에 장령, 삼척부사 등을 지냈으며 숙종 초 우의정에 오르는 등 남인 집권기에 정치적 역할을 적지 않게 수행했으나, 기실 그가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조일전쟁 및 조청전쟁의 험난한 시기에 강원도와 영남 남부의 각지를 전전하며 청장년 시절을 보낸 그는, 짧았던 출사(出仕)를 뒤로 하고 68세였던 1662년(현종 3) 근거지였던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온 후 80세 때 숙종이 즉위하며 다시 등용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원림을 경영하고 승경을 유람하는 등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을 영위했다. 그의 문집인 『기언』은 크게 생전에 자편(自編)한 원집과 속집(續集), 그리고 사후에 문인들이 편성한 별집(別集)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원집과 속집은 주제에 따른 독자적 체재에 따라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문체별로 글을 모아 사후에 편성하곤 했던 문집의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다. 위의 글이 속한 ‘전원거 1’ 편은 『기언』 원집에 속하는데, 이 원집의 구상과 편찬이 삼척부사 파직 후 연천에서 은거하던 기간에 이루어졌다. ‘전원거 1’ 편의 주제가 바로 이 연천 생활의 정경에 해당한다. 유랑과 유람, 은거와 독서로 점철된 남다른 인생 역정, 그리고 자신만의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기언』으로 집약된 문필 활동 등, 여러 면에서 미수 허목의 본령은 정치가 아닌 학문과 문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고매누자대년설」은 허목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글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허목의 글은 난삽하기로 악명이 높다. 간오(簡奧)함 즉 간략과 함축이 지나쳐 구두조차 떼기 어려워 생경하고 껄끄러운 느낌을 주기 일쑤다. 위의 글은 그리 난삽하거나 생경하지는 않으며 독해하기 어렵지도 않다. 오히려 간략하고 평이하여 무뚝뚝해 보일 지경이다. 대우가 반복되면서 평범하게 진행되는 이 글은, 제목까지 포함하여 104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길이에 글자조차 반복이 많다. 즉 작품의 제재에 해당하는 고(古)ㆍ매(梅)ㆍ누(樓)ㆍ자(子)ㆍ대(大)ㆍ연(年)ㆍ노(老) 등의 글자 및 용주공과 한산옹 등 인명, 그리고 위(謂)ㆍ지(之)ㆍ야(也) 등 어사(語辭)가 여러 번 겹쳐 등장하고 있다. 애초에 문학적 수사가 자리 잡을 만한 공간이 부족하며, 실제로 그러한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이 글은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일종의 기록에 가까우며, 어떠한 문예미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허목이 손수 쓴 수고(手稿)는 같은 내용이면서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미수선생진적(眉叟先生眞蹟)』 표지 및 부분(제3,4면. 「고매누자대년설古梅樓子大年說)」 제1,2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크기: 가로27.4×세로39.2(cm). 유물번호: 서울역사002692)

 


▲미수 허목 필 「고매누자대년설」 원고 (전체). 『미수선생진적』 중에서. 

『미수선생진적』원본 이미지는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검색, 열람 및 다운로드 가능함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수선생진적(眉叟先生眞蹟)』이란 서첩에 포함된, 허목이 손수 쓴 「고매누자대년설」의 원고이다. 『기언』에 최종 수록된 본과 달라서 글자의 출입이 다소 있고(巖居老人且八十 可謂植物古事가 巖居老人‘將’八十 可‘爲’植物古事로 되어 있음), 마지막 부분에 ‘重光大淵獻孟夏月半日也’란 신해년(1671) 4월 15일에 쓴 것임을 나타내는 11자가 더 있어서, 모두 115자가 서사(書寫)되어 있다. 첫머리에 ‘영년(永年)’, 마지막에 ‘미수(眉叟)’와 ‘승명(承明)’이란 3개의 인장도 찍혀 있다. 이 원고는 문집 『기언』의 내용을 연구하기 위한 소중한 이본인데, 글씨로 유명했던 그의 친필 묵적이어서 더욱 귀한 자료가 된다.

 

   『기언』의 「고매누자대년설」이라는 글이 문장으로서 주는 사실 서사(敍事)의 건조함과 반복적 수사의 단조로움이라는 단점은, 이 수필(手筆) 서사(書寫) 원고의 서예 조형미로 인해 상쇄ㆍ보충되게 된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 4차례 반복된 ‘고(古)’라는 글자는 원고에서 이렇게 쓰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미수선생진적』 「고매누자대년설」 중 ‘고(古)’ 서사례(書寫例)

 

   여기에서 4번의 ‘고(古)’는 모두 다르게 쓰여 있어서 수사(修辭)상의 단조로움에 저절로 다양한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허목 특유의 글씨체가 선사하는 미감은 이뿐 아니다. 허목이 채택하여 서사한 이 자형(字形)들의 연원과 함께 그 조형미의 기제를 살펴보자.

 


▲각종 전초고문자(傳抄古文字) 자료에 나타난 「고매누자대년설」 고(古)1의 자형들

 

   「고매누자대년설」 고(古)의 첫 번째 자형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기재된 소위 ‘고문(古文)’의 모양을 살짝 변형시킨 것이다. 『설문해자』에는 대표자인 소전체(小篆體) 이외에 이형(異形) 자체(字體)를 수록한 경우가 간혹 있는데 ‘고문’도 그중 하나이다. 이 ‘설문고문(說文古文)’의 자형은 종종 쓰여서, 당대(唐代)에 세워진 〈벽락비(碧落碑)〉 등에도 이를 응용한 자형이 쓰였다. 민간의 목판 출판이 활발했던 명대(明代)에 전래 고문자 자료를 수집ㆍ분류하여 이를 다시 쓰고 새겨서 자전(字典)이나 자료집 형태로 출간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런 고문자 자료를 전초고문자傳抄古文字라고 한다) 명대에 출간된 『금석운부(金石韻府)』라는 책에는 이 자형이 『설문해자』에서 온 것이라는 부기(付記)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상고(尙古)의 학문을 추구했던 허목은 평생에 걸쳐 고문자를 연구하고 그것을 인용ㆍ변용하여 자신만의 서풍을 구사했다. 그가 고문자를 연구하며 손수 써서 편찬한 자전이 몇 편 있는데, 그중 『고문운부(古文韻部)』(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이 자형이 소개되어 있다. 『고문운부』에 기재된 자형 중 하나(고1)는 글자의 구성 원리가 ‘설문고문’과 일치한다. 그런데 다른 자형(고2)에는 다소 변형이 가해져 있다. 기본적으로는 ‘설문고문’의 자형이지만, ‘冂’으로 둘러싸인 안쪽의 왼쪽 아랫부분이 약간 달라서 ‘古’ 모양이 한 번 더 반복되어 있다. 이 자형이 바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미수선생진적』 본 「고매누자대년설」 원고 첫머리에 등장하는 ‘고(古)’ 자형이다.

 

   이 「고매누자대년설」 고(古)1에서 허목 서예의 몇 가지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좌우와 위쪽에서 글자를 크게 둘러싸고 있는 ‘宀’ 내지 ‘冖(冂)’ 부분을 보면, 『설문해자』와 『금석운부』의 원본 자형의 좌우에서 살짝 호를 그리며 안쪽으로 굽은 형세가, 허목이 필사한 자전인 『고문운부』에서는 아래로 곧게 뻗어 내리도록 처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부분을 포함, 글자의 필획 전체에 구불거리며 연동하는 개성적 동세가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불(不)의 변천

 

   역사적으로 한자(漢字)의 형태는 필획의 서사성(書寫性)을 반영하며 개성을 드러내는 경향과, 주요한 단계에 이르러 공식 문자로서 정돈되어 엄숙성을 띠는 경향 두 가지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천하여 왔다. 흔히 쓰이는 글자인 ‘아닐 불(不)’ 자를 예로 들어보면, 춘추전국 시기 진계(秦系) 문자 자료인 〈석고문(石鼓文)〉에서는 아직 갑골문ㆍ금문 단계의 상형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나, 진 제국의 소전(小篆)인 〈태산각석(泰山刻石)〉으로 넘어오며 획의 집합체로서 본격적인 추상적 문자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통일 제국의 공식 문자로서 엄숙한 형식미가 확립되었다. 소전에서 보이는 획의 수직 수평화 경향은 후한(後漢)대 〈장천비(張遷碑)〉 등 예서(隷書) 단계에서 유지되는 한편, 필획이 가진 붓질의 개성이 자형에 점점 강하게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의 개성은 서역 땅 누란(樓蘭)에서 발굴된 서진(西晉) 시기 문서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행초서 단계에서 더욱 강하게 발현되게 되었다. 한자의 정서화(正書化)가 완성된 초당(初唐) 해서(楷書)에 이르면, 필획의 특성과 공식 문자로서 전체 자형의 엄숙한 정돈이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며 완성을 보인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을 이해하고 보면, 허목 「고매누자대년설」의 첫 번째 ‘고(古)’가 주는 기묘한 느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게 된다. ‘宀’의 획의 수직 수평화로 인해 전체 자형이 위아래로 긴 직사각형을 띠게 됨에 따라 고대 문자적 회화성 대신 소전(小篆)이나 해서(楷書)와 같은 익숙한 공식 문자의 전형성을 갖추는가 싶다가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심한 연동운동을 보이는 필획에서는 쓴 사람의 개성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즉 역사의 통시성 내에서 단계별로 등장했던 정통과 개성이 공시적으로 현현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획의 수직 수평화로 인한 자형의 변형은 『고문운부』와 같은 자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허목의 평소 시도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러나 필획의 구불거림은 「고매누자대년설」과 같은 실제 작품에서 훨씬 강렬하다.

 


▲명대 출간 『금석운부(金石韻府)』 수록 고(古)와 고(故) 자형

 

   「고매누자대년설」 원고의 ‘고(古)’ 두 번째 자형은, 위쪽과 오른쪽에서 글자를 ‘ㄱ’자로 크게 둘러싸고 있는 주획(主畫)이 ‘고’1만큼 구불거리지는 않으나, 마지막을 가늘게 빼며 마무리하는 등 붓질의 개성은 역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는 이 자형의 출전인 백영이(伯映彝)와 크게 다른 면모이다. 「고매누자대년설」의 세 번째 ‘고(古)’ 역시 변형이 가해졌다. 원래 ‘고(故)’인 이 글자는 『금석운부』 조화종(盄和鐘)ㆍ제후종(齊侯鐘) 등의 원형이 가졌던 필획의 길이 및 글자 조형의 방향성을 정반대로 바꾸어 버렸다. 전서(篆書)를 붓으로 쓰며 서사자의 형태 변형 및 개성적 필획의 맛을 가하는 이러한 방식은 명말청초에 일부 예가 없지 않으나 서예의 역사를 통틀어도 유사한 사례가 많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허목 글씨의 독창적 조형미는 문예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미수선생진적』 「고매누자대년설」 중 ‘매(梅)’ 서사례(書寫例)

 

   허목 서예의 조형미가 가장 화려하게 꽃핀 사례가 「고매누자대년설」 원고의 두 번째 글자 ‘매(槑=梅)’이다. 「고매누자대년설」에서 ‘매(梅)’는 4차례 등장한다. 이중 첫 번째가 백미다. 이 자형은 『고문운부』와 그가 손수 쓴 또 다른 자전인 『고문운율(古文韻律)』(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특이한 글자체가 나온 배경에 평소의 연찬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허목 『고문운부(古文韻部』와 『고문운율(古文韻律)』의 매(梅)

 

   이 글자들에서 회화와 같은 강한 상형성이 느껴지는 까닭은 실제 매화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긴 꽃자루가 달린 벚꽃과 달리 매화는 본줄기에 바싹 붙어 있는 것이 꼭 이와 같다. 그러나 이 형태는 실제 매화를 보고 그린 것도, 허목이 적당히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현재 대표자로 쓰는 ‘梅’는, 뜻을 담당하는 ‘木’과 소릿값인 ‘每’로 구성된 형성자이다. 그런데 ‘매화’는 원래 ‘楳’ 즉 ‘木+某’였고, 그보다 전에는 그저 ‘某’였다. 금문(金文) 등 초기 한자에서 주로 이 형태를 썼다. 『설문해자』는 ‘某’를 “산과(酸果)” 즉 “신 열매”라고 풀이해 놓았다. ‘모처(某處)’나 ‘모모(某某)’처럼 현재 주로 쓰이는 ‘아무’라는 뜻은 후대에 가차된 것이다. 그런데 ‘某’가 가차되어 ‘아무’의 뜻으로 주로 쓰이게 되자, 원래의 ‘매화’란 뜻은 다른 음가를 따서 따로 만든 글자인 ‘梅’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 ‘某’의 이체자 중에 ‘槑’가 있어서 후대에 매화를 가리킬 때 가끔 이 글자를 쓰는 경우가 있었다.

 


▲허목 『고문운율(古文韻律)』및 여타 전초고문자의 사례들

 

   그러므로 「고매누자대년설」의 첫 번째 ‘매’는 사물을 ‘그린’ 것이 아니고, 흔히 쓰는 ‘梅’와 다르나 오래된 연원을 가진 별개의 글자체인 ‘槑’를 약간 변형시켜서, 아래의 ‘木’은 하나만 남기고 위의 2개의 ‘口’의 배치는 자유롭게 옮겨 허목이 새로이 ‘쓴’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매화를 허목은 ‘대년고매(大年古梅)’라 부르고 있다. 아주 나이 많은 고매란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청악고매(靑萼古梅)’ 즉 흔히 ‘청매’라 부르는 녹색 꽃받침의 녹악매 중 오래된 것을 가리킨다. 열매를 얻으려 밭에 잔뜩 심은 매실나무와 고사(古寺)나 고택의 마당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고매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고매의 저 구불텅구불텅 기운 서린 줄기가 아닐까? 『고문운율』ㆍ『고문운부』 등 자료용으로 필사해 놓은 자전의 글씨체와 고매를 ‘쓴’ 「고매누자대년설」의 글씨가 다른 점, 그 미묘하면서도 확실한 차이가 여기에 있다. 「고매누자대년설」이 실제 고매와 닿아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매화 비슷한 꽃송이의 배치 등 글자 전체의 형사(形似)가 아니라, 저 구불구불한 획의 추상에 있을 것이다. 마치 매화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 낮에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찾아가 즐기는 팝콘처럼 흐드러진 꽃의 외양이 아닌, 새벽 어스름에 홀로 곁을 지날 때 코끝을 스치는 암향에 있는 것처럼.

 

   이 겨울이 지나면 봄기운과 함께 한 송이 두 송이 매화가 피어 올 것이다. 현실의 매화는 봄이 가면 금세 질 테지만, 종이 위의 이 매화는 저 구불구불한 획과 함께 영원히 피어있으리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미수선생진적』 「고매누자대년설」의 매(槑)

 

 

글쓴이  :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원전정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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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허장호

작성일 : 2024-01-27


출처 : 정겨운 삶을 위하여(G. U. Beak.) 백광욱 님의 불로그입니다. 교육/고전의 향기,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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