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허련(1808-1893)의 호는 ‘소치(小癡)’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이름을 지어줬다. 중국 원나라에 황공망이란 문인 화가가 있었는데 그의 호가 ‘큰 바보’라는 뜻의 대치(大癡)였다. 추사는 그의 화풍을 좋아해 사랑하는 제자에게 조선의 황공망이 되라며 ‘소치’란 호를 지어줬다.
허련은 광해군 시대의 허균과 연결된다. 허균은 명문가 집안으로 높은 관직에 올라 개혁을 꿈꾸었으며 ‘홍길동전’을 쓴 사람이다.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가 선조 임금의 적장자인 영창대군의 지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벌였을 때 허균은 이에 관련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로 인해 양천 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멸족 위기에 처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허대라는 사람이 식구들을 데리고 전라남도 진도로 피신했다. 그 허대의 후손이 바로 허련이다.
진도와 해남은 거의 붙어 있다. 해남에는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이 있고, 그곳에 윤씨 집안의 보물인 공재 윤두서의 작품집 ‘공재화첩’이 소장돼 있었다. 허련은 그 화첩을 빌려가 몇 달씩 보고 베끼며 그림 공부를 했다. 화첩을 빌려 공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대흥사 초의선사의 도움이 컸다. 초의는 추사와 금란지교로 유명한 사람이다. 초의는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허련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초의는 허련이 그린 그림을 갖고 한양으로 올라가 추사에게 전했다. 그림을 본 추사는 허련을 한양으로 불렀다. 그리하여 허련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 김정희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게 됐다. 그림 실력은 나날이 늘어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났다. 스승은 “압록강 동쪽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그림이 없다”라고 높이 칭찬했다.
허련은 스승 추사를 극진히 모셨다. 스승이 정치적 모함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자 해남까지 따라가 배웅했고, 스승이 제주에서 아홉 해 동안 유배 생활을 할 때도 세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 스승을 뵀고, 그곳에서 1년 이상 스승을 모시기도 했다. 허련은 스승의 화풍을 그대로 이어받아 진도에 운림산방이란 화실을 열었다. 운림산방은 후에 호남 회화의 상징이 됐으며 호남 남종화의 성지로 불리게 된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그리고 족속인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허련은 당시 유명한 사람들과 교유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 영의정까지 지낸 권돈인과 김흥근,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민영익 대감 등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흥선대원군은 허련을 “평생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를 풍긴다”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권돈인의 집에 머물면서 임금에게 바칠 그림을 그려 헌종을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다. 그림을 받아본 헌종은 허련을 크게 칭찬했고 지필묵을 선사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허련의 ‘선면산수도’가 소장돼 있다. 선면산수도는 부채의 종이에 그린 산수화다. 부채를 펼치면 장엄한 산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울타리가 처진 작은 집이 있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집 뒤로는 높은 산이 연이어 있고, 집 앞에는 잘 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기품 있게 서 있다. 집 왼쪽에는 다리가 있는데 그 위로 한 선비가 지팡이를 짚고 건너고 있다. 집을 향해 가는 중이다. 한가로운 산속 여름 풍경이다. 부채를 부치면 산바람과 계곡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올 것만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스승 추사를 그린 ‘김정희 초상’이 있다. 그림 속 추사는 오사모(烏紗帽)를 머리에 쓰고 담홍포 옷을 입고는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짙은 눈썹은 위로 약간 올라갔고, 눈과 눈가가 무척이나 인자하다. 코는 반듯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고 입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볼도 발그스레하다. 수염도 가지런하다. 제자는 스승을 이렇게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그렸다.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그지없기에 제자의 붓끝은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 움직였다.
<한국대학신문>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