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때 반포면,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탄생을 했습니다. 그때는 40년, 50년대, 60년대에는 이게 전기가 없었어요. 이 저 등잔불에다가 골방에서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그럴 때를 제가 어렸을 때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4학년 5학년 때 책을 많이 봐서 그런지 동네 할머니들이 다 우리 집으로 오셔서, ‘야, 근행아, 책 좀 읽어주렴, 잠이 안 와서 동지섣달에 못 살겠다,’ 그래서 그때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춘양전도 봐 드리고 또 장화홍련, 장화홍련전을 보려면 할머니들이 울어, 마구 울고 그러시더라고. 그 대신 최치원 선생의 탄생지부터 읽어 드리다 보니까 좋아했지요. 원래 아버지는 최견일이라는 분입니다. 신라에는 화랑도가 있었잖아요. 그 화랑도의 아드님이 바로 최치원 선생인데, 호는 외로울 고(孤) 자, 구름 운(雲) 자를 쓰고, 그런데 호가 하나가 더 있어. 바다 해(海) 자, 구름 운(雲) 자, 해운이라고. 해운대 부산 가 보셨죠? 이분이 돌에다가 해운대라고 써놓은 게 지금까지 천년을 지냈지만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금석문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12세 때 당나라를 찾아간 신라 신동 났다
당나라 그때 수도가 장안, 현재 명칭은 시안(西安)입니다. 서안에 가보니까 이분의 발자취를 찾게 됐어요. 그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제가 엮어본 것을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성역이 있죠. 오송에 가면 이분이 거기를 오시면서 소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으셨어요. 다섯 오(五) 자, 소나무 송(松) 자, 오송역입니다. 그곳을 지나서 백제의 그 엄청난 문화유산 공산성을 딱 한 바퀴 들으시고 시를 읊은 그 시비를 옆에 세워놨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하고 또 공주하고는 막역한 사이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열두 살 때 당나라 건너갔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나 하고서 현재 사는 제가 쫓아가 봤어요. 그게 한 30년 됐어요.
30여 년 전 강택민 주석 때 한중 수교가 되어 있어요. ‘여러 의장님과 국회의원 여러분, 우리가 이거 15년 한중 수교 15년이 아닙니다. 천 년 전 벌써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에 오셔 가지고 황소의 난을 평정하신 이런 위대한 일이 있는데, 우리는 천 년 전부터 왕래를 하고 이렇게 친한 나라입니다.’ 이것이 강택민 주석이 국회의사당에서 한 얘기입니다. 그 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으로 중국 조어대를 갔어요. 그때 시진핑 주석이 하는 얘기가 그 강택민보다 더 한술 더 떠서 ‘아, 그 고운 최치원 선생이 28세 때 신라로 돌아가시면서 그 바다에서 시를 한 수 졌다. 쾌석부창해(掛席浮滄海 돛 걸고 바다에 배 띄우니) 장풍만리통(長風萬里通, 긴 바람 만 리나 멀리 불어온다). 뱃머리에 올라가니 바람은 만 리를 통하는구나.’ 이것이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읊은 시를 시진핑 주석이 읊으면서 ‘한중 관계는 몇 년이 아닙니다, 벌써 천 년 전부터 우리 친하게 지내있으니 우리도 그 최고운 선생의 뒤를 이어서 열심히 한중 관계를 잘 이끌어서 같은 우리 민족들이 이득을 보는 외교를 만듭시다.’ 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당나라 때 구당서가 있고 신당서가 있어요, 구당서나 신당서에 없는 문장을 이 최치원 선생이 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고운 최치원이 중국 당나라에서 고변(高騈)의 휘하 막료로서 활동할 때 지은 시문 중에서 시 50수, 문 320편을 직접 골라서 엮어 헌강왕(신라의 제49대 국왕)에게 바친 시문집) 20권이 있어요. 이것을 지금 중국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런 큰 역사를 안고 있는 최치원 선생이 열두 살에 당나라를 건너가서 어떠한 일들을 펼쳤는가, 이것을 지금 한번 알아보려고 합니다. 당시의 신라에는 이 진골 성골 6품제가 있어 가지고 그 진골과 성골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도 큰 벼슬을 못해요. 고운 최치원 선생 아버지가 ‘너는 공부를 잘하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있지 말고 큰 나라에 가서 일을 한번 해봐라.’ 그래서 열두 살에 최치원을 당나라로 보냅니다. 약속을 했어요. ‘아들아, 네가 10년 내에 장원급제를 하지 못하면 나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나도 너를 아들이라고 안 하겠다’고. 그는 열두 살에 당나라에 갔어요.
그때 당나라는100만이 살고 세계적인 도시였어요. 실크로드는 서안을 거쳐서 갑니다. 외국 사람들이 말도 못하게 오는데 그때 신라의 학생들도 많이 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하~ 큰일 났어.’ 12살에 가니까 입학 허가를 할 수가 없어요. 국자감 입학나이는 14살. 그래 어떻게 합니까?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알바를 해야 되겠지만 돈을 뭐 누구한테 빌릴 수도 없고요. 저잣거리를 다니다 보니까 그 대장간이 있잖아요. 풍구, 낫도 빌리고, 이렇게 보니까 혼자 하고 있어, 그 주인이. ‘여기서 일 좀 하고 밥 좀 먹고 이렇게 합시다. 월급은 안 받을 테니 잠만 자고 일만 할 수 없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 주인이 승낙했죠. 그래서 거기서 우선 취직이 돼 가지고 의식주가 해결이 된 겁니다.
‘앞으로 다른 일 말고 글공부만 하라’
그런데 맨날 이 풍구질만 하고 말이야.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시를 읽고 이러는 처지인데, 풍구 이것 하니까 처량스럽고 그래. 그러나 여기가 외국인데, 별 도리가 없었다. 기다리고 또 열심히 일을 하니까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무 착실함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멋있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어느 선비가 오는데 이게 범상치 않아 보였다. 딱 보니까 훌륭한 사람 같아. 대장간 주인 보고 하는 이야기다. ‘거울이 말이야. 깨졌는데 이거 좀 고칠 수 없소? 그 깨진 거울은 못 고칩니다.’ 얼굴빛이 안 좋으면서 막 그냥 가려고 그러는 걸 그 최치원이가 ‘제가 고쳐드리지요.’ 하고서 그것을 받았어요. ‘며칠 걸리나?’ 그러니까 ‘일주일 후에 오세요.’ 그러고 이분이 가셨어요. 그런 다음 일주일 후에 와보니까 깨진 거울을 아주 그냥 만신창이를 해놨어요. 그걸 망치로 파쇄한 거죠. 이 사람이 그것을 고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주인 몰래 그렇게 해 놓았던 것. 이분은 성이 위 씨인 위 승상이었다. 승상은 정승이었습니다. 이분이 그걸 보더니 난리가 난 거예요. 금간 것을 완전히 파경으로 해놨으니. ‘너 이놈, 너 이거 내가 너를 종을 삼아야 겠다. 이거 너 돈 주고도 못 사는 건데 네가 이걸 깨 놓았으니, 우리 집에 가서 종노릇을 해라.’ 그러나 최치원은 미리 이런 생각을 하고 일부러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제 위 승상 댁을 가보니 승상이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대국의 승상이니까, 들어가서 마당도 쓸고 심부름도 하고 그래서 아주 대장간보다 훨씬 좋아, 종은 종이지만. 그런 종은 해볼 만하죠. 하루는 그 위 승상 친구 왕 승상이라는 분이 왔어요. 행랑채에서 두 분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다과상을 가지고 가서 이렇게 보니까 승상 친구가 화장실을 간다는 거예요. 고은이가 딱 보니까 ‘대마가 다 죽습니다.’ 대마가 지금 다 죽는데 그걸 막지를 못하면 큰일 나는데 다른데다가 놓더라는 거예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주인을 훈수를 한 수 둔거지요. 그러고서 바깥에 나갔어요. 위 승상이 깜짝 놀라서 보니까 큰일 날 뻔 했어요. 그걸 막지를 못했으면 대마가 다 절단 나가지고 죽는 판인데 그 종놈이 말이에요, 한 마디 훈수를 받아 가지고 그걸 막아 놨어요. 그때 승상 친구가 들어와서 이렇~게 봐 가지고, 야~ 이거 잘 막았구나. 그러고 두다 보니까 세 점으로다가 간신히 우리 승상이 이겼어. 승상이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최치원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 바둑 훈수 드는 것 보니까 이게 보통 놈이 아니잖아요. 그는 최치원을 불러 가지고 이야기를 했어요. ‘야, 너 아까 바둑 훈수를 하는 거 보니까 바둑을 둬 봤냐? 예, 신라 고국에 있을 때 둬 봤습니다.’ 그러거든. 그러면 어디 나하고 한 번 둬 보자. 최치원이 흑을 딱 쥐고서 두는데, 때는 이때야 시험을 봐야 되니까. 만방으로 모두 이기니까 위 승상이 무릎을 탁 치면서 ‘이런 귀공자를 눈앞에 두고 내가 노비로 부려 놨으니 너무 미안하다.’ 사과를 하고. ‘너 바둑을 두는 거 보니까 시(詩)도 응 읊어본 적이 있냐?’ ‘예~’ ‘신라 고국에 있을 때 몇 편의 시를 읊은 적이 있습니다.’ ‘옳거니.’ ‘지금이 가을이다. 가을인데 바깥에는 비가 가을비가 오고 그러니 비우(雨) 자를 넣어 가지고 온 시를 한번 읊어 봐라.’ 그랬단 말이에요.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세상 어디에도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밖엔 깊은 밤 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불 앞에선 만 리 밖으로 마음 향하네
(秋夜雨中 추야우중 / 최치원)
3경에 가을비는 내리는데 ’등전‘이 ’만리심‘이라 등잔 앞에 내 마음 만 리를 가는구나.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나지요~ 그래서 이 글을 위 승상이 접하더니 ’정말 잘못했다. 내가 너무 잘못했으니 내일부터 국자감 입학이다.’ 이 바둑 한 수하고 시 한수 짓는 바람에 열두 살에 국자감에 입학을 하게 되요. 열두 살에 국자감, 14살에도 들어갈까 말까 한 국자감을 열두 살에 외국인이 들어와 가지고 수석 1등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너무 질투가 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이 당나라 학생들이고 사람들이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이 최치원 고은 선생을 없애 버려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당나라 황제인 혜종한테 계속 상소문이 올라오는 거예요.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알고 보니까 위 승상 댁에서 종노릇하는 놈이다~
그래, 그러면 그냥 유학생을 어떻게 그냥 죽일 수 있는가. 시험을 봐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시험을 봐서 답안지를 못 맞추면 죽이는 걸로 하자. 그러니까 위 승상이 통곡을 하는 거야. 죽었다 이거예요. 나 때문에 죽었다는 거지. 자기가 국자감에 안 들여보내고 그랬으면 괜찮았을 텐데 공연히 일찍이 이렇게 똑똑해서 이렇게 한 것이 잘못됐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한탄을 해도 황제의 명인데 안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너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황제의 명이 내일 모레 너를 데리고 오라니 그 물건을 맞추지 못하면 너는 죽는다고 하니 내가 참 미안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게 방법이 있습니다.’ 이러거든, 그게 보통 사람이야?
최치원은 황제한테 끌려가요. 근데 여기도 옛날에 우리 조선조 때처럼 당나라도 장군 무인들도 많고 뭐 문관마다 할 것 없이 그냥 도열해 섰는데, 황제가 가지고 있는 나와 있는 그 물건은 석함이야 석함. 그러니까 돌 속에 있는 물건을 황제 혼자 그것을 물건을 놓고서 맞추라는 건데 알아보겠습니까?
그래 알아 맞춰볼 수가 없죠. 황제가 보낸 지필묵이 왔어요. 그랬더니 일필휘지를 해서 갖다가 준 거예요. 곧바로 황제가 뒤로 넘어졌어요. ‘이것은 귀신이다, 귀신, 귀신.’ 그 참모도 보지 못하고 본인만 그 돌 가운데에다가 넣었는데 그걸 이 사람이 알아 맞혔어, 최고은이. 그러니 귀신 아닙니까? 혼비백산이 되는 거죠. 그냥 우리 같으면 그게 뭐가 들었어 그랬는데 이 사람은 글로 풀었어요, 글로.
그 글이 지금 어디 있느냐면 대전에 있죠? 뿌리공원. 거기 가면 경주 최 씨 시조의 비석 뒤에 이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뭐라고 새겨 있냐. 단단석중물(團團石中物, 단단한 돌 가운데 물건)은 비옥역비금(非玉亦非金 옥도 아니요 또한 금도 아니더라). 야야지시조(夜夜知時鳥 밤마다 밤마다 때를 알리는 새)가 새의 뜻만 머금었지 소리를 토하지 못하는 것이 그 속에 있습니다. 계란이 그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한 짐 지고 대평리 장에 가서 나무장사를 했는데 그때 시계가 없어, 그러면 뭐로 시계를 보고 때를 맞춥니까? 시간을 맞추는 게 뭐냐면 닭이었어. 이렇게 쟀었어요. 맞죠? 근데 이제 젊은 분들은 잘 모르겠는데 시계 없을 때는 그렇게 닭으로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단단한 돌 가운데 물건은 옥도 아니요 또한 금도 아닌 소리를 토하지 못하는 게 그 안에 있습니다. 황제가 그 안에다 계란을 넣어놨어요. 황제가 기절초풍을 하지 않겠어요? 아니, 저 놈이 내가 혼자 넣었는데~ 어떻게 이걸 맞추는 거야. 그래서 황제가 꼼짝없이 이 사람을 공부를 하게 해서 열여덟 살에 장원급제를 해요.
유학 6년 만에 장원급제 벼슬길 오르다
아버지하고 약속한 10년이 아니라 앞당겨졌습니다. 당나라에서도 공직으로 갈수 있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발동을 걸리는 거예요. ‘공직으로 채용하면 절대 하면 안 됩니다.’ 그냥 상소가 또 올라오는 겁니다. 백제 의자왕이 그 아들 융이 하고 이분들이 같이 12,700명이 여기서 볼모로 끌려간 데가 낙양입니다. 그때는 당나라 수도가 낙양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서안으로 옮겼어요. 이 최치원 선생은 서안으로 유학을 가게 된 거고요. 이제 공부를 하고 장원 급제까지 했는데 또 귀신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면 안 된다고 시샘하는 것입니다. 최치원은 관직을 제수 받지 못해 낙양 천지를 유랑하다가 지방정부 관청인 율수현위 보직을 받습니다. 현위직은 현감 보좌직으로 민정을 살피는 직무였기에 공부하고 글짓기에 안성맞춤이었지요. 이 시기에 문집 5권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 양반이 학문이 풍부하고 자유롭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했던지 어느 고을에 가니까 논두렁에 큰 묘가 하나 있는데 그 옆집 사람보고 물어봤어요. ‘저 묘가 무슨 묘냐?’ ‘아, 그건 쌍여분묘요.’ 두 자매가 불쌍히 죽어 가지고 거기다 묻어 놨다 이겁니다. 거기에 치원교 이렇게 써놨어요. 그걸 건너면 그 쌍여분이 나와요. 그 자매가 있는데 열여섯, 열일곱이야. 큰 언니는 돈 많은 할아버지, 50대 된 염상한테 돈 주고 팔고 또 둘째 동생은 55세 된 다상한테 팔았어요. 반대하고 반대를 해도 부모님이 승낙을 안 하니까 둘이서 자살을 했어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쌍여분 산소가 있습니다. 거기를 최치원 선생이 이십대에 거기를 방문하게 돼요. ‘이 세상이 좋다고 그러지만 고요~한 그곳도 살 만한 곳이니 너무 슬퍼 말고 고이 잠드소서’ 하고 시를 한 수 읊어서 딱 놓고 왔단 말이에요.
부세영화몽중몽(浮世榮華夢中夢 뜬 구름 같은 이 세상 영화는 꿈속의 꿈)
백운심처호안신(白雲深處好安身 흰 구름 자욱한 곳에서 한 몸 편안히 지내는 것도 좋으리)
그날 저녁에 아이 두 자매가 찾아왔어. ‘우리 당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이렇게 훌륭한 시를 읊어 주신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이제 넋이 뭐 저리 가서 잘 편히 지내겠습니다. 너무 감사의 뜻으로 우리가 하루 저녁 모시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루 저녁이 모시고 그 이튿날 보니까 시만 남았지 사람은 온데 간데없어요. 지금도 거기가 천년 된 쌍여분 산소를 잘 가꿔놓고 비석이 딱 있어요. 거기를 우리가 지나고 이제 왔어요.
고운의 격서(檄書) 황소의 반란 진압
양주 고을은 강택민이 고향이기도 해요. 양주 고을에 무슨 난리가 났느냐면 요. 그 황소라는 아주 다섯 살 때부터 천재로 시도 잘 짓고 하는 황소가 저 소주 사람인데 과거를 몇 번 떨어졌어요. 최치원은 한 번에 그냥 붙었는데 몇 번을 떨어지고 나중이 화가 나니까 그냥 염상을 해서 돈을 많이 축적을 했는데 이 희종 황제가 너무 정말 정치를 잘못해가지고 백성들이 아주 매관매직하고 그러다 보니까 화가 났죠. 옛날우금치에 동학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중국도 그 황소가 난을 일어났습니다. 황제가 사천성으로 도망가고 그 장안이 그 황소의 손아귀에 들어왔어요. 고경 장군을 진압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압하라고 했죠. 양주에다가 진을 치고 천하 문장가인 최고운 선생을 서장관으로 앉혔어요. 모든 것을 기록하고 하는 걸 2, 3년을 했는데 도저히 황소 난을 평정할 수가 없다 보니 고경이 이것은 무력으로서는 물리칠 수가 없으니 그 좋은 문장으로 저 사람을 제압을 해보라고 했어요. 문장을 지어 고경의 이름으로 전달했어요. 격황소서입니다. 마상에서 낙마를 했다는 게 얼마나 그게 무서운 글인지. 그 황소가 이 글로서도 싸움에 졌는데 ‘내가 살면 뭐하냐!’ 자결했어요. 고운 선생은 격황소서로 만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고운 최치원, 신라 고국으로 돌아오다
스물다섯 나이에 당나라가 그 황소를 갖다가 격파시킨 최운 선생. 희종 황제는 최치원에게 최고의 상인 자금어사대를 하사를 하는 거예요. 예, 대단하지요. 이제 일을 마치고 스물여덟에 이제 귀국을 하는데 희종 황제한테 말씀을 드려야 될 거 아녀요. 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벼슬을 더 올려주고 그럴 테니 여기서 일을 더 봐야지. 그렇잖아요? 이 인재를 뺏기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닙니다. 저 고국에 가서 할 일도 많고 부모님도 봐야 되고요. 극구 가겠다고 하니까 희종 황제도 ‘아, 그러면 말려도 안 되겠구나’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참~ 그 사람들도 멋져요. 희종 황제가 신라의 왕한테 국서를 갖다드리라고 합니다. 그만큼 대우를 해준 거예요. 그냥 가는 것보다 국서를 가지고 가면 격이 다르지요. 아까 시진핑이 읊던 시 창해가 있잖아요. 괘석부창해(掛席浮滄海 그 만경창파의 배에 오르니 바람은 만 리를 통하더라).
저 사람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그 고운 선생의 그 시를 암송을 하는 건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최치원은 귀국거리에 올랐다. 배로 11월 달에 떠났는데 3월 달에 신라 계림으로 오게 돼요. 그 때 나이가 29세. 헌강왕이 맞이하면서 한림학사로 임명해요. 국제적인 감각도 뚜렷하고 그 학문이 많은데, 그것을 신라에 와서 이지러지는 국운을 바로잡고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토속세력들이 내직을 못 있게 하는 거예요. 서천군수로 갔다가 그 다음에 함양군수에 가 가지고 거기서 일을 많이 했어요. 함양은 지리산 끄트머리에 있어요. 지리산물이 막 내려오면 함양 앞들을 그냥 싹 쓸어서 나가요.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자 최치원은 호미자루 하나를 가지고 막기 시작하는 거야, 제방을. 상림과 하림이 있어요. 그 하림은 다 없어지고 상림만 현재 존재 하는데, 그 당시 그 폭우를 막아 상수리나무를 심었어요. 상수리나 도토리는 묵을 써서 먹었어요. 천년의 상수리나무지요. 이곳이 우리나라의 최초의 오래된 정원이 됩니다. 이처럼 선도를 많이 하고 그래서 최치원 비석이 많습니다. 우리 공주도 여기 산성에 가보면 굉장히 비석들이 많지 않습니까? 송덕비도 많고. 인조가 여기 피난 왔을 때 그 정승들이 다 내려 왔어요. 정승들도 잘 하고 갔다고 해서 송덕비 세워요.
금석문에 새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금석문에 대해서 왜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흔적은 금방 없어져요. 불타면 없어지잖아요. 수마가 할퀴고 가면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오래 남는 것은 비석의 비문뿐입니다. 비문. 1971년도에 무령왕릉을 만났잖아요. 이건 보통이 아닙니다. 영동대장군 비석 문에 이렇게 썼어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62세에 붕도(崩到), 이랬어요. 무령왕릉 이외 백제, 신라, 고구려 여기 누구의 왕릉인지 누구 몰라요. 그걸 능이라고 안 하고 고분군이라 불러요. 고분군. 장군묘가 모여 있는 건 장군총이라고 해요. 그만큼 금석문이 중요한 거예요. 제가 금석문을 하게 된 동기가 89년도에 제가 하얼빈 공업대학교에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그때는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죠. 북한은 한문을 배우지 않아요. 한문을 써야 되는데 안 배우니까 유학을 와서 나하고 같이 공부하고 이랬는데 나는 한문을 잘 쓰거든, 그 하얼빈 공대 양사근 총장이 전시를 한번 열어준다고 해서 45점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이 오늘날 한국비림원의 태생이 되었지요.
저도 비림박물관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30년 동안 지금 그 금석문에 대해서 접하게 되고 그래서 많은 작품 2천여 점을 만들어놨어요. 그것을 어디다 갖다 놓느냐. 그게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공주는 나의 고향 아닙니까? 공주는 역사와 교육의 도시이고 우리나라 국부가 제일 많은 박물관(17개)도시이에요. 경주도 없어요, 전주도 없어요. 구석기 시대의 석장리 박물관이 또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5천년의 역사가 숨 쉬는 비림박물관이 이리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치원은 함양에 와서 그러한 공을 많이 들여서 업적을 남기셨는데 이 시무십조(時務十條, 공인이 시급하게 다뤄어야 할 일)를 써서 임금에게 바쳤어요. 그것을 수용을 해서 이렇게 정치를 펼치려고 그러는데 신라가 그때는 막 어수선해요. 각지에서 부족들이 일어나고 후백제 견훤이 나오고 왕건이 나오고 할 때예요. 그러니까 최치원이 도저히 여기서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 그래서 말년에는 이제 유람을 많이 다니시게 돼요. 유람. 나중에는 해인사로 가십니다. 해인사에서 개원필경 20권을 저술을 해요. 그것도 신라왕한테 바쳤죠. 율수현(현재 중국 강소성 남경시 율수구)에 가면 동상이 세워 있지요, 기념관 조그맣게 만들어 놓았지, 양주 거기 가면 최치원기념관(중국 장수성 양주시(양저우)에 2007년에 건립)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중앙에다가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금석문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서예가들 많습니다. 현대 작가들도 역사의 한 축으로 계속 참여를 할 수가 있게 된다는 걸 저는 확신을 합니다. 경청해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허유 강사님께 다시 한 번 박수 부탁드리고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최석원 전 공주대총장) 지금 그 공주로 떠나신 지가 하도 오래 됐는데 공주에 대해서 많이 현재 내용도 파악을 하고 계세요. 그런데 이제 이 공산성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서쪽으로 넘어오는 저기가 문이 없었습니다. 그냥 서문 이라고 있었는데 저기 “금서루”라고 정해서 글씨를 허유 선생이 쓴 걸로 그 들었는데, 어떻게 해서 금서루가 되고 직접 드셨는지?
(허유 강사) 예, 원래 이 금서루가 없었던 지금 말씀하신 건 마찬가지로 서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당시의 여기 계시지마는 정백교 문화관광과장께서 복원을 하시게 됐고 그러면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되느냐. 그래서 뭐 우리 금강이 “비단금”자 아닙니까? 그리고 서쪽에 문이 있으니까 비단같은 서쪽 문이라 금서루. 그럼 그 글씨까지 써달라고 해서 제가 못쓰는 글이지만 “금서루”라고 제가 썼습니다. 지금 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동쪽으로 안 다니고 서쪽으로 다니네요. 글씨를 보러 아마 서쪽으로 다니는 것 같아요,
또 질문이 있으세요? 네, 없으시면 한여름 밤에 공산성 달빛이 좋은 추억으로 간직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함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공산성 달밤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안전하게 귀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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