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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연원(陽川許氏 淵源)
나라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전 오늘의 김해(金海)지방을 중심으로 가락국(駕洛國)이 탄생한 것이 서기 42년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분은 호를 수로(首露),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즉위한 지 7년(서기 48년) 되는 해에 아유타국(阿踰陀國) 임금의 딸을 비(妃)로 삼으니 이 분이 황옥부인(黃玉夫人)이고 또한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도 하며 성(姓)은 허씨(許氏)인데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하고 혹은 서역(西域) 허국(許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한다. 또한 허황옥(許黃玉)의 국지(國誌)에 그 선군(先君)의 명(命)을 기록하기를 동방에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있어서 너를 얻어 배필로 삼을 것이라 하여 바다에서 떠왔다 하였다. 당시 16세였다.
왕후(王后)가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왕후가 “수로왕에게 청하기를 첩이 하늘의 명(命)을 받고 아비의 뜻을 받들어 먼 바닷길을 건너와서 대왕(大王)을 모시었으니 첩은 동토(東土)의 객(客)이온데 첩이 죽은 뒤 저의 성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하니 수로왕이 어여삐 여겨 두 아들로 하여금 허씨모성(許氏母姓)을 따르게 하였다. 189년에 태후(太后)허씨가 별세하니 나이 157세였고 김해시 구지봉(龜旨峰)에 장사지내니 능호(陵號)를 보주태후릉(普州太后陵)이라 했고 수로왕은 10년 후 199년에 별세하니 158세였으며 납릉(納陵)에 장사를 모셨다. 큰아들 거등(居登)이 즉위하여 왕통(王統)을 이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지금의 하동칠불사(河東七佛寺)에 성불(成佛)했다.
수로왕의 10세손 구형왕(仇衡王:양왕) 때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가락국이 끝이남에 태후의 성(姓)을 이은 허씨는 자손(子孫)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고려초에 와서 거주지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수로왕의 30세손 선문(宣文)은 공암(孔巖)으로, 30세손 사문(士文)은 태인(泰仁)으로, 33세손 강안(康安)은 하양(河陽)으로, 35세손 염(琰)은 김해(金海)허씨가 되었으니 공암은 곧 양천(陽川)이다. 또 허씨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갈려 나갔으니 인천이씨 또한 가락의 한 뿌리이다.
양천허씨의 시조(始祖) 허선문(許宣文)은 가락국 보주태후의 30세손으로 공암현(孔巖縣)에 오랫동안 살면서 농사에 힘써, 호족(豪族)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았다. 이 당시 후삼국(後三國)이 자웅(雌雄)을 겨룰 때인데 마침 고려 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을 정벌키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중 식량이 떨어지고 병마(兵馬)가 매우 피로하여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이때에 공이 기꺼이 마필(馬匹)과 식량(食糧)을 내주어 왕건의 군대는 사기 충천하여 견훤을 무찌르고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고려 건국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때 공의 나이가 99세이나 용모가 위대하며 기도(氣度)가 정숙하고 위풍이 당당(堂堂)하였다. 이에 왕건은 공의 충의(忠義)에 감동하여 가부(假父:일명 義父)로 모시고 고려개국벽상공신 공암촌주(高麗開國壁上功臣 孔巖村主)를 봉(封)하여 공암땅을 식향(食鄕)으로 하사(下賜)하니 이로 말미암아 드디어 관적을 공암허씨(孔巖許氏)로 한 것이다. 공암은 후에 양천(陽川)으로 개칭하니 양천허씨가 되었다.
그 뒤 고려 충렬왕(忠烈王) 묘정배향공신(廟庭配享功臣) 10세(世) 문경공(文敬公) 공(珙)에서 동주사공 정(東州使公 程), 판도좌랑공 관(版圖佐郞公 冠), 대제학공 부(大提學公 富)의 3계파(三系派)로 분파되었다.
이와 같은 양천허씨는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를 통해 정승 16인, 중추원사(中樞院事) 6인, 학사(學士) 9인, 호당(湖堂)과 청백리(淸白吏) 각 7인, 공신(功臣) 10인, 봉군(封君) 30인 등 문형(文衡)과 옥당(玉堂)을 배출하여 적은 인구이면서도 동방(東方)의 명문벌족(名門閥族)을 이루었다.
형제정승(兄弟政丞)에다 청백리로 이름난 충정공(忠貞公) 종(琮)과 문정공(文貞公) 침(琛),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이름을 떨친 초당공(草堂公) 엽(曄)과 성(筬)․봉(篈)․균(筠)․난설헌(蘭雪軒), 불멸(不滅)의 명저(名著)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한 의성(醫聖) 양평군(陽平君) 준(浚), 높은 학문으로 정승에 오른 부훤당(負暄堂) 욱(頊)과 묵재공(黙齋公) 적(積) 그리고 학문과 문장 서예에 뛰어나고 유림(儒林)으로부터 도덕군자(道德君子)로 추앙받는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목(穆),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순절(殉節)한 충장공(忠莊公) 완(完),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인 문헌공(文憲公) 성재(性齋) 전(傳)과 서화가(書畵家)로 소치(小癡) 연(鍊), 미산(米山) 형(瀅), 남농(南農) 건(楗), 의재(毅齋) 백련(百鍊) 등 모두 양천허씨를 빛낸 조상들이다.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 허왕후(許王后) 유허지(遺墟地)는 2000년 1월 1일자로 가락중앙종친회에서 종원 일동의 성금(誠金)으로 수립(竪立)한 것이다.
한국의 고대 역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허황옥(許黃玉)은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諭陀國)의 공주(公主)로 천신(天神)의 계시(啓示)를 받은 부왕(父王)의 명을 받들어 수만리 바다를 헤치고 한반도 남부의 가락국으로 건너가 수로왕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아요디아(Ayodhya)시는 인도 수도 뉴델리(New Delhi)에서 동북 히말라야 산맥쪽으로 640㎞ 떨어진 곳으로 고대로부터 다양한 종교의 성지도시(聖地都市)로 현재도 4천여 개의 힌두사원과 15개의 이슬람사원, 4개의 자이나교사원, 2개의 구르드와라사원 등 수많은 사원이 존재하며 연중 각 종파의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인구 약 55,000명의 소도시로 오늘날에도 아요디아국의 왕손이 거대한 궁전에 살고 있으며 도시 전체가 궁전으로 싸여 있다.
허가바위는 바위산으로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곳에서 세거(世居)하였기 때문에 이곳을 양천허씨 발상지라 한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재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재차(구멍) 파의(바위)라는 뜻으로 옛 부터 이곳 허가바위 특징을 지명으로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孔巖縣)으로 개칭하였다.
동굴의 크기는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로 사람 약 10여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
양천허씨시조 허선문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면서 이곳을 통과할 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미 제공 등으로 공(功)을 세워 공암촌주(孔巖村主)의 벼슬을 받았다.
양천허씨 조상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2세 허현(許 玄):벼슬은 어의(御衣)의 상납을 맡고 있던 장복서(掌服署)의 후신인 상의국봉어(尙衣局奉御) 추봉 소부소감(追封小府少監)이다.
3세 허원(許 元):목종(穆宗) 원년(997)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현종14년(1023)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좌습유(左拾遺)로 임명되고 18년(1027) 시어사(侍御史)로, 덕종원년(1031)에 검교예빈성경 행 내사사인 지제고 태자사의랑(檢校禮賓省卿行內史舍人知製誥太子司議郞)을 지냈다.
4세 허정(許 正):벼슬은 대창승(大倉丞)과 태자태보 행 상서예부시랑(太子太保行尙書禮部侍郞)을 지냈다.
5세 허재(許 載):(1062년~1144년) 공은 성품이 강직(剛直)하고 근엄하였고 예종12년(1116)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와 병마사(兵馬使)를 거쳐 서북면병마사를 거치고 풍주방어사(豊州防禦使) 등 외직을 두루 거치고 호부상서에 제수되고 이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에 올랐다. 석관지문(石棺誌文)이 《금석총람(金石總覽)》에 기재되어 있다.
6세 허순(許 純):예종9년(1114)에 병과로 급제하여 금주방어판관(金州防禦判官)이 되고 13년(1135)에 서경(西京)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고 1155년(의종9)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가 되고 동지추밀원사 공부상서(同知樞密院事工部尙書)에 임명되었다.
7세 허이섭(許利涉):의종12년(1158)에 김정명방(金正明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전구서령(典廐署令) 직사관(直史官)이 되었다. 처음 이름은 섭(涉)이었으나 의종이 이름을 하사하여 이(利)자를 더하였다.
8세 허경(許 京):명종6년(1176) 진간공방(秦幹公榜) 을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검교상서성(檢校尙書省) 좌복야 행 예빈성소경(左僕射行禮賓省少卿) 지제고(知製誥)를 지냈다.
9세 허수(許 遂):고종6년(1219) 김중룡방(金仲龍榜) 제5인으로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예부상서(禮部尙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지냈다.
10세 허공(許 珙):1233년~1291년) 자는 온독(韞匵)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도량이 뛰어났으며 고종45년(1258) 장문한방(張文漢榜)에 급제하였다. 승선(承宣) 유경(柳璥)이 공과 최녕(崔寧), 원공식(元公植)을 천거하여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여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어 부하관원을 엄정 통솔점검하니 당시에 정방 삼걸(政房三傑)이라 했다. 이후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이르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吏部侍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년간 20대왕 신종(神宗), 21대왕 희종(熙宗), 22대왕 강종(康宗) 실록(實錄)편수에 참여했고 1291년(충렬왕17) 첨의부중찬 태학사세자사(僉議府中贊太學士世子師)에 임명되었다. 공은 요직에 있기 15년간에 인물을 평론하되 항상 평범한 벗을 구제함을 뜻으로 삼았고 재상(宰相)의 지위에 있기 20여년간에 더욱 충성을 다하여 마침내 왕신(王臣)의 직분에 힘썼다. 인물을 간택함에 뛰어나 문하(門下)에서 배출된 현사(賢士)들이 모두 중요한 지위에 올랐으며 대각(臺閣:정승)에 재직하였다. 충선왕2년(1309) 충렬왕묘(忠烈王廟)에 배향(配享)되었다.
11세 허관(許 冠):충렬왕29년(1303)에 박리(朴理) 방(榜) 병과에 제1인으로 급제하여 봉승랑판도부(奉承郞版圖部) 추봉광정대부첨의부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追封匡靖大夫僉議府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가 되었다.
11세 허부(許 富):충렬왕 때 문을과(文乙科)에 급제하여 잡단과 사헌부의 직책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오르고 지춘추관사 상호군(知春秋館事上護軍)을 지냈다. 공은 자손을 가르침에 “세업충효(世業忠孝)하고 여력문장(餘力文章)하라”하였다. 이는 문행충신(文行忠信)은 비록 효(孝)만 못하지만 효를 옮겨서 충(忠)을 하면 효가 그 중에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
11세 허숭(許 嵩):처음의 이름은 평(評)으로 충렬왕5년(1279)에 독로화(禿魯花)로 원나라에 보내졌고 귀국 후 대장군이 되고 1307년(충렬왕33)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와 동지밀직사판봉상시사(同知密直司判奉常寺事)를 역임했다.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고 충선왕2년(1310)에 양천군(陽川君)으로 봉해졌고 시호(諡號)는 양숙(良肅)이다.
11세 허정(許 程):충렬왕 때 음사(蔭仕)로 김방경(金方慶)의 요좌(僚佐)가 되고 이어서 은청광록대부 이부상서(銀靑光祿大夫吏部尙書) 첨의부찬성사칙수동주사(僉議府贊成事勅授東州使)가 되었다.
11세 허총(許 寵):문경공(文敬公) 공(珙)의 넷째 아들로 충렬왕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12세 허교(許 僑):여민동락(輿民同樂)하며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고려왕조를 빛내고 지키려 한 분으로 개성윤(開城尹)을 지냈다. 고려말에 조선왕조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기록에 전하지 못한다. 조선개국 초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부(父)이고, 광산김문(光山金門:사계 김장생가)을 일으킨 정경부인 허씨 할머니의 조부이다.
12세 허백(許 伯):(?~1356년) 충숙왕4년(1317)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344년(충혜왕5) 양천군(陽川君)으로 봉해졌으며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에 녹봉되고 충목왕과 공민왕 때 서연시독(書筵侍讀)이 되고 찬성사(贊成事)로서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공은 문학(文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은 시(詩)가 시문책에 다수 기재되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2세 허선(許 僐):충숙왕12년(1325) 병과에 급제하여 광정대부 첨의부찬성사(匡靖大夫僉議府贊成事)를 지냈다. 천성(天性)이 순후하고 효(孝)와 제(悌)를 겸하였으며 형 문정공(文正公) 백(伯)과 동생 개성윤(開城尹) 교(僑)와 우애가 매우 두터워 사마씨(司馬氏)와 양파(楊播)의 곤계(昆季)와 같이 일찍이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청(淸)과 근(勤)을 법도(法度)로 삼아 선조의 덕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12세 허신(許 信)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와 봉순대부 보문각직제학지제고(奉順大夫寶文閣直提學知製誥)를 지냈다. 공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에게서 수학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하였음은 공의 충성심과 청아(淸雅)한 정신을 가름할 수 있다.
12세 허완(許 完) :(1328년~1379년) 공민왕을 배종(陪從)하여 원(元)나라에 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여 녹공위 삼등(錄功爲三等)으로 정당문학 가선대부예문관제학(政堂文學嘉善大夫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다.
12세 허유(許 猷) :충혜왕2년(1341) 강릉대군(江陵大君:祺)을 따라서 원(元)나라에 가서 호위의 책임을 성실히 완수하고 귀국 후 통례문판관(通禮門判官)에 임명되고 공민왕8년(1359)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점검함에 병마사(兵馬使)로 출전, 공을 세웠다. 1363년(공민왕12)에 김용(金鏞)의 난때 임금을 호종(扈從)한 훈공으로 선력보리훈일등공신(宣力輔理勳一等功臣)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로 책록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12세 허종(許 悰) :자는 상수(尙壽), 호는 춘옹(春翁), 시호(諡號)는 양혜(良惠)이다. 충선왕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와 결혼하고 수사공(守司空)을 역임하였고 3년간 원나라에 유학하였으며 충숙왕 때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한때 의약(醫藥)으로 명성을 얻어 활동하기도 했다.
13세 허강(許 綱) :(1317년~?) 자는 중유(仲維)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11년(1362)에 안동도병마사로 임명되어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공헌했다. 이듬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하는데 시정을 호소하고 종실의 실정과 국내정국에 대한 사리를 밝히고 귀국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승진하였다.
13세 허경(許 絅) :(?~1353년) 충숙왕5년(1336) 남궁민방(南宮敏榜)에 급제하여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를 지냈다. 충혜왕5년(1344)에 처음으로 서연을 두었는데 사예(司藝)로서 문정공(文正公) 백(伯) 부자(父子)가 피선되어 명사인 한종유(韓宗愈), 이제현(李齊鉉) 등과 더불어 매일 시독(侍讀)하였다.
13세 허도(許 衜):자는 성지(性之)이고 호는 고송(孤松)이다. 고려조에 문병과(文丙科)로 급제하여 참찬(參贊)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출사(出仕)하지 않고 이른바 칠절사(七節士)라 불리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야은(冶隱) 길재(吉再),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둔촌(遁村) 이집(李集), 참의(參議) 이양중(李養中),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사인(舍人) 서견(徐甄) 등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지어 불굴의 뜻을 표명했다. 일묵일어(一黙一語)함으로서 공의 절(節)은 불변하고 도(道)는 불멸한 것이므로 절과 도가 병행하며 서로 어그러지지 아니하였다. 또한 의학사(醫學史)상 의료제도를 개선한 제생원을 설치하게 함으로써 여성들이 남자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하는 수치심을 덜게 하는 의녀(醫女)를 양성하는 기초를 다지게 했다.
13세 허진(許 璡) :(1337년~?) 공민왕9년(1360) 정몽주방(鄭夢周榜)에 국자진사전판관(國子進士前判官)으로 진사급제(進士及第)에 올라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이르렀다. 자손에게 옥질(玉質)과 난자(蘭姿)로서 일찍이 가업을 이어 능히 문장을 일으키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넉넉함을 물리었고 “너희들은 더욱 부지런히 업을 닦아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했다.
14세 허균(許 筠) :호는 성수(惺叟) 또는 범매당(泛梅堂)이다. 중랑장(中郞將) 승(昇)의 아들로 승이 직간(直諫)을 하다가 평안도 정주(定州)로 유배되자 호군(護軍)의 벼슬을 버리고 따라갔다. 그곳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시초로 삼아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고명(高明)함을 극진히 함에 이르렀으며 이치를 분석함에 정미(精微)함을 다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14세 허금(許 錦) :(1340년~1388년) 자는 재중(在中)이고 호는 야당(埜堂)이다. 공민왕6년(1357) 염흥방방(廉興邦榜)에 급제하여 봉익대부 전리사판서 진현관제학(奉翊大夫典理司判書進賢館提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성품이 조용하고 정숙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즐겨보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조준(趙浚), 윤소종(尹紹宗) 등과 더불어 친우를 삼고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의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고 저술한 책도 많고 야당집(埜堂集)과 시문이 다수 있다.
향촌에서 물러나 재물을 아끼지 않고 약재를 수매하여 은혜를 널리 베풀고 여러 사람을 구제함으로 질병이 있는 자에게 존비(尊卑)를 구분 않고 치료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14세 허흠(許 欽) :고려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중랑장(中郞將)에 올랐으나 조선 건국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아들 용진공(龍津公) 징(徵)과 송암공(松菴公) 손(愻) 두 형제도 각각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함경도로 제주도로 보냈다.
15세 허징(許 徵) :공민왕11년(1362)에 무과에 합격하여 충정왕(忠定王)의 사위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공암군(孔巖君)에 봉해졌고 용진현령(龍津縣令)이 되고 1392년(공양왕4) 병마단련판관 겸 북도순검사(兵馬團練判官兼北道巡檢使)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조선이 개국됨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의로 두문동 72인이 되었고 뒤에 함경도 길주로 들어가 은거하며 지조를 지켰다.
15세 허손(許 愻) :(1354년~1423년) 자는 손길(孫吉)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공민왕20년(1371) 무과에 합격하여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임명되고 1373년 문과에 급제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형(兄) 허징(許徵)과 조선 개국에 불복(不服)하여 탐라도(耽羅島:제주도)로 들어갔다.
[출처] 양천허씨(陽川許氏),양천허씨시조,허선문,양천허씨조상|작성자 봉수로홈타운,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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