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일 한중일 3개국 시집 출판
도·강릉시 차원 수집·번역 나서야
내년에는 ‘전집’ 고유

▲ 중국 최초의 목판본 ‘동의보감’ 서문에 허난설헌이 중국 주변 여러나라에서 가장 걸출한 문인이라고 칭찬했다.
▲ 중국 최초의 목판본 ‘동의보감’ 서문에 허난설헌이 중국 주변 여러나라에서 가장 걸출한 문인이라고 칭찬했다.

2009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허준의 ‘동의보감’은 전통시대 한의학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이어서, 동양의학의 본산이라고 자부하던 중국에서도 수입하여 읽었다.

그러나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 누구인지 몰랐기에 초기 필사본에서는 “송(宋)나라 어의(御醫)”라고 기록했고, 1766년에 간행된 중국 최초의 목판본에서는 허준이 허난설헌과 한 집안 사람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허난설헌은 다들 알아도, 허준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능어(凌魚)가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동의보감’은 명나라 때 조선의 양평군 허준이 지은 것이다. 살펴보건대 조선 풍속은 본디 문자를 알았으며, 책 읽기를 좋아한다. 허씨가 또한 대대로 명문세족으로서 만력 연간에 봉( ), 성(筬), 균(筠)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났으며, 누이동생 경번(景樊)의 재주와 이름이 다시 그 형들보다 위에 있었다. 중국 변방에 있는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능어의 서문을 쉽게 풀어쓰자면, ‘허준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에 널리 알려진 허씨 3형제와 허난설헌의 한집안 사람이니 믿고 사 보라’는 뜻이다.

허난설헌은 언제부터 중국에 알려졌을까? 여성이 한문을 배울 수 없던 조선시대에 태어나 집안에서 한시를 짓다가 첫 번째로 시집을 출판한 여성이 바로 허난설헌이다. 아우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누님은 강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여성이 한시를 지어 이름이 집밖으로 알려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비난을 받았기에, 난설헌은 27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시를 모두 불 태우라’고 유언했지만, 아우 허균이 아쉬워하며 외부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릉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문과에 급제한 허균은 예조정랑(정5품)으로 승진해, 1597년 8월 중국에 원군을 청하러 갔다. 이때 허균이 어느 명나라 인사에게 써 보낸 난설헌의 한시 16수가 중국 천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난설시한(蘭雪詩翰)’이라는 시첩 뒤에 “위의 여러 편은 경번 누님이 지은 것인데, 삼가 보내드리니 바로잡아 주시기를 빕니다. 만력 정유년(1597) 8월 조선 예조정랑 허균”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가운데 여러 편이 1608년 공주에서 출판한 ‘난설헌시’에 빠져 있다.

중국에서 원군을 지원받고 돌아온 허균은 병조좌랑이 되어 명나라 장군과 사신들을 접대했는데, 명나라 종군문인 오명제가 “허균에게서 누이의 시 200여 편을 얻었다”고 ‘조선시선’ 서문에 기록했다. 허균이 1602년 명나라 사신의 수행원 구탄을 접대했는데, 구탄이 가져간 난설헌의 시가 1606년에 ‘취사원창’이라는 시집으로 중국에서 간행되어 168수가 실렸다. 한국보다 중국에서 먼저 출판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수많은 시집과 문집이 출판되었지만, 후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상업적으로 출판한 경우는 하나도 없다. 제자나 후손들이 자비출판, 무상 배부했다. 그러나 친척이 없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출판한 10여 종의 난설헌시집들은 모두 출판업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출판한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모두 시집이 출판된 시인은 강릉 출신의 허난설헌이 유일하다. 출판업자들이 그만큼 수준이 뛰어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원도와 강릉시에서 한국 뿐 아니라 중국, 일본, 미국에 흩어져 있는 허난설헌의 시집과 시문집을 모두 수집하고 번역하여, 내년에 열리는 제26회 난설헌문화제 때에는 헌다례와 함께 허난설헌전집 고유제도 함께 열리기를 기대한다.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