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남농 허건의 '남농산수화' 탄생, 2023. 8. 6.

* 위 사진을 클릭하면 다운로드 됩니다.

예술의향기【남농 南農 허건 許楗(1907∼1987)】 "금강 소나무의 대가, ‘남농산수화’ "
씨알추천 0조회 1423.08.06 00:12댓글 0

 

남농 허건의 ‘남농산수화’ 탄생

남농(南農,NAMNONG) 허건(許楗, 1908~1987)은 조선시대 말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8-1893)의 친손자이자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의 넷째 아들로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남농(南農)’이라는 호는 근대의 대학자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 1858~1939)가 지어준 것이다.

남농은 생애의 대부분을 목포에 살면서 한국화단의 중심에서 각계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예술 활동을 하고, 많은 제자를 길러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운림산방(雲林山房)은 허련이 말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로서 일명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한다.

소치-미산-남농 3대에 걸쳐 정통남화를 이어준 한국남화의 본거지다. 남농이 유적을 손질하고 다듬어 1982년에 복원한 것으로 명승 제80호로 지정받았다. 남농의 목포 애향은 잘 알려져 있다. 일생동안 수집한 수석·자기목물과 운림산방 3대 작품들을 목포시에 기증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남농기념관(南農記念館)은 남농이 1985년 5월 선대의 유물보존과 한국남화의 전통계승발전을 위하여 건립한 미술관이다.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등이 문화재단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 개관 때 지홍 박봉수, 신정 서세옥, 오당 안동숙, 현초 이유태, 남정 박노수, 남정 최정균, 유산 민경갑, 일랑 이종상 등이 작품을 보내왔다.

미술관에는 소치 허련,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인 허림 등 3대 작품을 중심으로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한국화 중진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어 한국화단의 흐름을 한 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다. 아울러 고려·조선시대 도자기도 전시되고 있는 목포관광명소이다. 현재 남농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남농의 장손인 허진(許塡,HUR JIN,허진 작가)화백으로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년간 5대에 걸쳐 맥(脈)을 잇고 있는 것이다.

남농은 그림철학과 가통(家統)과 관련, 기록을 남겼다. “그림에는 음악처럼 리듬이 있어야 하고 시가 있어야 한다. 특히 시 중에서도 내가 그리는 그림의 시는 서정시이다. 나는 내가 그리는 그림에 스스로 만족치는 않지만 서정을 그리고자 함에는 변함이 없다. 늙은이 말을 듣는 이 나이에 일진월보(日進月步)야 바라지를 않지만 화(畵), 서(書)로 성가하셨던 소치 조부님의 명성과 “書畵傳家二百年”이라는 가통에 그릇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죽는 날까지 간직하고픈 소망이다.“<새전남 1977년 1월호/南農, 김상엽 글, 남농미술문화재단刊>


소치(小癡) 허련(許鍊), 미산(米山) 허형(許瀅)에 이어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어받은 남농(南農) 허건(許楗)은 3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조 남종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술 세계로 나아갈 꿈을 꾼다. 당시 화단은 일제 강점으로 신남화(新南畵)라 불리는 일본화법이 유입되어 새로운 미술 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남종화에 서양화법이 더해진 이 화법은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더욱이 동생 허림(許林)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보이자, 허건은 자신의 보수적인 미술 세계에 대해 심한 회의를 느낀다. 목포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허건은 그동안 배워온 그림 세계를 혁파할 결심을 한다.

일본에서 유입된 미술 책을 보기도 하고, 허림이나 임신(林愼) 등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역 화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미술 재능이 뛰어난 허건은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는 등 환골탈태한다. 하지만 새로운 미술세계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나, 늘 마음은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 순간 허건은 일본화법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화풍을 담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애를 쓰기 시작한다.

허건은 새로운 화풍에 대해 고민을 하다 서울에 올라와 당시 남종화계의 주류였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과 어울리며 새로운 작품 형식을 모색한다. 청전화숙에서 정종여, 배렴 등과 어울리며 새로운 양식의 산수화를 구상한다. 몇 년의 각고 끝에 허건은 드디어 자신만의 개성적인 산수화를 만들어낸다. 일본 신남화 화풍을 버리고 집안에서 내려온 전통 산수화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필법을 더해 새로운 ‘남농산수’를 개발한 것이다. 비교적 짧은 붓 선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산수를 구성하고, 자연 속에서 고기를 잡거나 뱃놀이를 하는 인물을 배치했다.

이 새로운 화풍은 한국인, 특히 남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남농’이란 호는 한국 남종화의 상징이 되었고, ‘허건’이란 이름은 남도화풍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허건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화파를 이루었다. 또한 전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허건의 그림 한 점은 갖고 싶어 했다. 허건은 동양화의 열풍을 이끌며 전라도 지역을 동양화로 가득 채웠다. 전라도 지역에 가면 다방이나 식당에 가도 그림 몇 점은 걸려 있다는 동양화의 전설도 다 허건의 그림 인기와 관련이 있다.

신체의 불우를 극복한 의지와 좋은 품성으로 이름난 허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허건은 자신을 찾는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작고 간단한 그림 한 점이라도 들려 보냈다. 세상에 허건의 그림이 많아져 작품을 남발했다는 오해도 받지만, 그의 미술에 대한 아름다운 정이기도 했다. 남농 허건의 작품 인기는 현대에도 여전하다. 동양화의 열기가 식어가는 중에도 허건의 작품은 여전히 찾는 이가 많고, 남농이란 호는 동양화를 상징하는 말로 미술계를 장식하고 있다.

 

목록

댓글 목록

입력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거나,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 또는 단체 등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반복적 게시물, 폭력성 글등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 없이 수정·삭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하여 불법유해 정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