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구암 허준(許浚, 1539~1615)의 편지 한 장이 필자로 하여금 운명과도 같이 사십여 년의 세월을 매진하게 하였다. 이제 이 운명과도 같은 업무를 내려놓고자 하여, 그 업무에 얽힌 이야기의 일부를 간략하게 글로 남긴다.

1. 허준과의 만남

허준 간찰, 1981년 구입, 허준의 공인된 유일한 유묵이다.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허준 간찰, 1981년 구입, 허준의 공인된 유일한 유묵이다.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1981년에 골동 거간 강 모 씨는 ‘허준(許浚)’이라 기명 된 간찰(簡札) 1점을 내게 가져왔다. 그가 고려대의 김상엽 총장의 소장품이라고 하여 거액에 매입하였다.

입수 후에 나는 허준이란 이름을 쓴 동명이인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허씨대종회’를 방문하니 허장열씨(하양허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를 통하여 양천허씨 보학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니, “이 정도의 글씨를 쓸 수 있는 허준은 허씨를 통틀어 구암 허준이 유일하다”라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종손 허형욱과 그 자손들은 해방 전에 모두 황해도 해주군 대거면 은동리(현재 황해남도 옹진군 은동리)에 살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그의 자손이 한 분도 없으며, 묘소도 위치를 모른다”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는 허준의 실전된 묘소 찾기에 나섰다. 족보에는 “장단하포광암동손좌쌍분(長湍下浦廣岩洞巽坐雙墳)”으로 되어 있었다.

2. 허준을 찾아 나서다

허준 초상, 허준의 초상화로 전하여 온 유일한 초상화였으나, 현재 행처를 알 수 없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허준 초상, 허준의 초상화로 전하여 온 유일한 초상화였으나, 현재 행처를 알 수 없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허준 선생의 묘소가 “장단하포광암동(長湍下浦廣岩洞)”에 있다는 기록을 통하여 장단군에 있음을 확인한 나는, 1982년 봄에 전화번호부를 뒤져 ‘장단지주회’라는 단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단체의 김병집 회장을 만나 협조를 구하였다.

민통선 지역의 출입은 농번기(農繁期)라야 했다, 당시 나는 지주회의 김 회장을 만나 그를 나의 차에 태우고 그를 모시는 것처럼 하고 경기도 옛 장단 땅을 드나들기 시작하였고, 매번 드나들 때마다 같은 상당액을 후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드나들어도 하포 광암동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 가늠조차 안 되었다. 당시에 민통선 지역에서는 어디가 어디인지, 하포리 구역이 어디이고 광암동이 경계도 건물도 표지도 없어 어디가 어디인지 도저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허준 선생의 묘를 찾는다는 것은 요즘 말로 정말 ‘맨땅에 헤딩하기’이다.

원래 나는 문서 탐색의 전문가이다. 1980년대 초에는 명분이 있다면 한 면 전체의 호적부 원본 열람도 2~3시간이면 검토할 수 있었다. 그러한 원본을 열람하며 필요한 자료를 찾는 것은 요령이 있다. 제적부부터 보는 것이다.

그러나 허준 선생의 후손들은 파주나 묘소 인근에 거주한 사실이 없고, 파주의 민통선 지역은 재산 분쟁의 가능성으로 모든 기록에 접근하는 것은 차단되어 있었다.

허준 묘소를 찾는 작업에 진척이 없자, 나는 해외를 통하여 북에 있는 그의 후손을 수소문하기로 하였다. 북에 그의 종손 허형욱(1924년생)이 살아있다면 “허준 묘소의 주소를 자손들은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에 미국의 친북 교포들이 북을 자주 드나들던 시기였으므로, 혹 그들이 “해주에 거주하는 허준 선생의 자손을 확인할 수 있을까?”하고 기대를 했다.

내 부모와 형제는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당시 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1988년 5월, 뒤늦게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내가 판단한 것은 허준 후손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즉시 나는 귀국하였다.

3. 허준의 달

나는 귀국 후에 다시 허준 묘소 찾기에 몰입하였다. 내가 귀국한 이듬해, 즉 1990년 7월부터 문화부에서는 ‘이달의 문화 인물’을 선정하여 그 업적을 기념하였는데 그 첫 번째 인물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였다. 그리고 문화부에서는 1990년도 말에 다음 해 9월의 문화 인물로 의성 허준(許浚, 1539~1615)을 발표하였다.

나는 1982년부터 시도하여왔던 “의성 허준 선생의 묘소 찾기를 9월 말까지는 기어코 찾아내겠다”라는 결심을 굳혔다. 1991년 4월부터 민통선 지역 출입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민통선에서 허탕치며 나오면서 나는 김병집 지주회장에게 “장단군의 해방 전 토지대장이 남아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해방 전 토지대장이 남아있는데, 재산 분쟁이 일기 때문에 열람을 안 시킨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그에게 10만 원을 주며, 토지대장을 관리하는 과장에게 전해 주면서 “하포리에 있는 토지대장에서 허씨 소유로 되어 있는 단 필지만을 알아다 주십시오”하고 부탁하였다. 김 회장을 통하여 단 한 필지를 적어준 것이 “하포리 산129, 허형욱”이었다. 드디어 허준의 묘소 주소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민통선 지역에서의 번지수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방법은 하포리 산129의 인근 땅 소유자를 찾는 것이다. 지주회를 통하여 확인하니 마침 옆 땅 주인 정억 씨가 민통선을 드나들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1991년 9월 27일, 지주회 김병집 회장과 정억 씨를 대동하고 먼저 정억 씨 소유의 임야를 찾았다. 그는 자신 소유의 임야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처참하게 파헤쳐진 [허준] 묘, 1981년 9월 27일자 사진. 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처참하게 파헤쳐진 [허준] 묘, 1981년 9월 27일자 사진. 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정억 씨 소유의 땅에서 그 옆 땅에 들어가 산을 오르니 처참하게 파헤쳐진 묘소가 보이며,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벼락을 맞은 듯이 강력한 기(氣)가 통하는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여깁니다. 여기가 맞습니다”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1년에 9월 27일에 허준의 폐허가 된 묘소를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에서 찾아냈다. 그날은 태풍 ‘미레이유(Mireille)’가 한반도를 급습하여 북상하던 날이었다.

9월 30일 KBS 취재진과 문화재관리국의 전문가를 대동하고 들어가 처참히 파헤쳐진 현지를 공개하였다. 그날 처참히 파헤쳐진 묘 앞을 수습하면서 우리 일행은 허준의 묘비를 찾아냈다.

4. 허준에 대한 새로운 규명과 미래 사업

그리고 나는 다시 수년에 걸쳐 허준의 고향이 파주(옛 장단), 현재의 북측 ‘황해북도 장풍군 국화리(옛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라는 사실, 귀양지(평북 의주), 생년 등등 잘못 알려졌던 많은 사실 등을 명확하게 규명해 내었다.

내가 허준에 대하여 규명한 여러 사실은 과학사학자 신동원 박사의 <조선사람 허준>(2001년, 한겨레신문사)에 그대로 들어 있다. 그 책을 참조 바란다.

필자가 의성 허준에 집중한 이유는, 나는 허준이 단군의 건국이념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구현한 의학자이자 과학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 이유로 허준에 매료된 것이다.

나는 남북의 DMZ(비무장지대) 지역에 ‘DMZ 세계평화공원’의 설치를 지지한다. 그 남측의 대상지는 파주와 연천으로 본다. 따라서 언젠가 남북 정세가 호전되면 나는 의성 허준의 묘소가 있는 민통선 지역과 그의 고향인 ‘황해북도 장풍군 국화리(옛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를 연결하는 지역을 민족의약재(民族醫藥材) 표준화 시범농장 사업을 하고, 그 중간지점 DMZ에는 민족의학연구소와 민족의료센터, 민족문화컨벤션센터를 개설하며, 또한 추모공원을 조성하기를 희망한다.

우리 시대에 그 사업의 남측 출발점으로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 앞에 의성 허준의 기념관을 세우자. 그리고 거기에서 단군조선의 건국이념 홍익인간을 구현한 인물로서의 허준을 기리자.

북에서는 이제라도 해방 전에 황해도에 거주하였던 허준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조선의 주체적 의학자 허준을 세계적인 역사적 과학자로 기리는 사업을 먼저 펼치기를 조언한다. 그러한 사업을 북측이 아니면 남측이 하여야 하는데, 허준의 후손이 살아있고 고려의학이 발달한 북측이 안 한다면, 언젠가 남측에 낯깎이게 되지 않겠는가?

5. 여적(餘滴)

1981년에 허준의 간찰을 내게 가져온 신림동에 살던 골동 거간 강 모 씨는 1991년에는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의 <대동여지도> 초판본을 가져왔고, 나는 그 지도첩을 당시 최고가에 입수한 바 있다. 그리고 10여 년간 소장하다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양여하였고, 지금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무언가 그가 나를 오해하기 시작하여 거래가 끊어졌고, 언제부터인가는 연락조차 안 된다. 드문드문 그가 생각이 난다. 건강이나 한지‥‥‥,

건강하오? 신림동 강 사장! 내 전화를 통일뉴스에 문의하여 전화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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