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 2023.07.07
지면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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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교화 도운 유마거사 착안
20대 강릉서 지은 시 ‘창명’ 등장
서산대사 ‘청어당집’ 서문에도 수록
▲ ‘당절선산(唐絶選刪)’ 6권 마지막 장에 ‘창명(滄溟)’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허균의 대표적인 호 교산(蛟山)이 강릉 사천 교문암의 정기를 타고났다고 자부하여 지은 호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왔다. ‘허균전집’ 제4권으로 소개된 허균 수택본 ‘국조시산’ 첫 장에 ‘蛟山(교산·아래 사진)’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허균의 인장이 가장 많이 찍혀 있는 책은 초당선생의 친구였던 서산대사가 열반한 뒤에 그의 제자들이 편집한 문집 ‘청허당집’이다. 허균이 이 책에 서문을 쓰고나서 인장 4과(顆)를 찍었다. 초당선생은 서산대사와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고, 허균의 문집에도 서산대사에게 보낸 편지가 4편이나 실려 있다. 서산대사의 문집 서문은 당연히 수제자인 사명당이 지어야 했지만, 그가 이루지 못하고 열반에 들면서 제자들에게 “허균을 찾아가 ‘청허당집’ 서문을 받으라고” 명했다. 허균은 서산대사와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청허당은 나의 선친께서 뜻을 같이한 벗으로 여겼고, 나도 젊었을 때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에서 늙은 스님을 만나 직접 묘체(妙諦)를 듣고나서 흐트러진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스님도 또한 죽은 뒤의 비문(碑文)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서문 끝에 “임자년(1612) 정월에 양천(陽川) 비야거사(毗耶居士) 허단보(許端甫)는 쓴다”라고 적고, ‘산하급대지(山河及大地)/금로법왕신(金露法王身)’, ‘창명(滄溟)’, ‘비야거사(毘耶居士)’, ‘감호청은(鑑湖隱)’이라는 인장 4과를 찍었다. ‘창명(滄溟)’은 큰 바다이니 동해를 가리키며, 허균이 20대 강릉에서 지은 시에 3회나 보인다. ‘감호청은(鑑湖隱)’은 경포호(초당)에 숨어 사는 처사라는 뜻이다.
비야는 비야리(毗耶離)의 준말로 ‘유마경(維摩經)’을 설법한 비야리성을 가리키고, 비야거사는 유마거사를 가리킨다. 유마거사는 석가의 교화를 도운 비야리성의 장자인데,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자신도 병이 들었다고 자리에 누운 뒤, 병문안을 온 여러 보살들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유마경’을 설법했다.
허균은 비야거사라는 호를 강릉에 피란왔을 때부터 사용했으니, ‘정상인(靜上人)에게 준 시’에 “비야거사가 소갈병이 들어/ 유마의 방장실에 찾아와 누웠다오”라고 했다. ‘성소부부고’ 마지막 시기인 유배지 함열에서 지은 시에서도 “비야거사는 지금 입을 굳이 막고/ 다만 고이 앉아 묘향을 불태우네/ 조만간 임금님 은혜를 받아 귀거래를 허락하시면/ 경포 호숫가에서 맨머리로 목을 놓아 노래하리”라고 했으니, 애일당에서 처음 시를 짓던 젊은 시절부터 마지막 유배지에 이르기까지 비야거사라는 이름으로 강릉 경포호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던 것이다.
‘창명(滄溟)’이라는 호와 인장은 ‘청허당집’ 서문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나라 시인들의 대표적인 시를 뽑아 편찬한 ‘당절선산(唐絶選刪)’ 제6권 마지막 장에도 찍혀 있어, 이 책이 그의 수택본(手澤本)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처조카 김세렴에게 넘겨져 김세렴의 인장이 몇 개 더 찍혀 있다. 김세렴이 고모부의 저서를 넘겨받아 역적으로 몰려 죽은 그의 이름은 삭제한 뒤에 마지막 장에 ‘창명(滄溟)’이라는 인장만 남겨 두었는데, 이 책의 서문이 ‘성소부부고’ 제5권에 실려 있으니 허균의 저술임이 분명하다.연세대 명예교수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
비야는 비야리(毗耶離)의 준말로 ‘유마경(維摩經)’을 설법한 비야리성을 가리키고, 비야거사는 유마거사를 가리킨다. 유마거사는 석가의 교화를 도운 비야리성의 장자인데,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자신도 병이 들었다고 자리에 누운 뒤, 병문안을 온 여러 보살들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유마경’을 설법했다.
허균은 비야거사라는 호를 강릉에 피란왔을 때부터 사용했으니, ‘정상인(靜上人)에게 준 시’에 “비야거사가 소갈병이 들어/ 유마의 방장실에 찾아와 누웠다오”라고 했다. ‘성소부부고’ 마지막 시기인 유배지 함열에서 지은 시에서도 “비야거사는 지금 입을 굳이 막고/ 다만 고이 앉아 묘향을 불태우네/ 조만간 임금님 은혜를 받아 귀거래를 허락하시면/ 경포 호숫가에서 맨머리로 목을 놓아 노래하리”라고 했으니, 애일당에서 처음 시를 짓던 젊은 시절부터 마지막 유배지에 이르기까지 비야거사라는 이름으로 강릉 경포호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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