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이 1596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에서 벼슬할 때에 작은형의 친구이자 영의정인 유성룡을 만나러 갔다가 사명당을 다시 만났다.
이들은 반갑게 손을 잡고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함께 객사로 돌아왔다. 사명당이 비분강개하여 손뼉을 치면서 시국을 논하는 모습을 보면서 옛날 협객의 풍모가 있다고 여겼기에, “스님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불문에 잘못 투신하였구나”하고 생각했다.
가선대부(종2품) 동지중추부사 벼슬을 받고 관직에 있던 사명당이 1603년 조정에서 물러나 상원사로 돌아왔다가, 마침 허균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강릉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당으로 찾아왔다.
허균이 경포호에 있던 이 집을 감호서(鑑湖墅)라고 표기했으니, 허균이 자신의 책을 강릉 선비들에게 공개하며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을 설치했던 바로 그 집이었다.
허균은 그 무렵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불경을 읽으며 위안을 받던 중이었으므로 불교의 명심 견성설(明心見性說)을 질문했더니, 사명당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
허균은 이듬해(1604년) 2월 강릉에서 사명당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벼슬하라고 권하였다. “대사께서는 선기(禪機)에 통달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섭심(攝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꼭 온갖 인연을 깨끗이 없앤 뒤에야 되는 것입니까? 조정이나 시장바닥, 동네 골목 등 어떤 곳에서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명집’에는 사명당의 시만 실리고 편지는 없어서 사명당이 이때 어떻게 답장을 써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허균에게 말조심하라며 지어보낸 시가 실려 있어서 답장을 대신할 수 있다.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게나. 이로움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 만약 입 지키기를 병마개 막듯 한다면 이것이 바로 몸을 편안케 하는 으뜸의 방법이라네.”-‘증허생(贈許生)’
사명당이 1610년 9월에 입적하자 허균이 제문과 만시를 지어 슬퍼하면서, 작은형이 세상 떠났을 때에 사명당이 슬퍼하던 마음을 이해했다. “정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처럼 얽어맨단 말인가”하고 되뇌었다.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지어 올리고, ‘사명집’ 서문을 지었으며, 사명 송운대사 석장비명(石藏碑銘)을 지어 그의 한평생을 기렸다. 말조심하라는 사명당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해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치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연세대 명예교수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