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담의 제자인 초당선생은 서산대사와 친하게 지내면서 편지를 주고받았고, 큰아들 악록공(허성)은 북한산 승가사에서 공부하며 스님들과 가깝게 지냈다. 둘째아들 하곡공(허봉)이 사명당과 친구로 지내며 자주 만나 시를 주고받자, 아우 교산공(허균)도 사명당을 형님처럼 모셨다. 사명당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문집을 편집한 뒤에 허균에게 서문을 부탁했는데, 허균이 서문 첫 줄에서 사명당을 처음 만나던 날의 기억을 이렇게 서술했다.
“지난 병술년(1586) 여름에 내가 중형(仲兄)을 모시고, 봉은사(奉恩寺) 아래에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스님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면서도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바로 유정(惟政) 스님이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모하게 되었다.”
이들은 밤새 시를 주고받으며 문장을 논하였는데, 허균은 “사명당 시의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고하였다”고 평가했다. 3년 뒤에 강원도를 떠돌던 허봉이 별세하자, 사명당이 오대산에서 찾아와 조문하며 슬피 곡하고 또 만시(輓詩)를 지었는데, 그 구절이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ㆍ사의 즈음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허균은 “스님의 수도가 아직 상승(上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속인들처럼 슬픔과 기쁨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하고 의아하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균은 어머니를 모시고 강릉 애일당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형님같이 모시던 사명당이 스승 서산대사를 대신해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여러 차례 왜군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왕명을 받고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을 찾아가 담판을 벌여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만날 수 없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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