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 지팡이가 생겼다. 끝이 휘어진 손잡이에 스폰지가 달렸다. 만지기만 해도 포근한 게 효심이 느껴진다. 지팡이를 짚고서 몇 걸음을 걸어본다. 역시 보통 지팡이보다 튼튼하다. 굵기도 하지만 키도 더 큰 게, 보기에도 더 믿음직하다.
지팡이란 ‘걸음을 도우려고 짚는 막대기’라는데, 역시 어르신 지팡이가 이 정도는 돼야지 싶다. ‘대통령이 만 백세를 맞은 노인들에게 선물한다’는 바로 그 청려장을 닮은 듯도 하다. 세상에! 소문으로만 듣던 청려장이 우리집에 오다니.... ‘어머니, 이 지팡이 누게가 가져와십디가?’라고 여쭤본다. ‘모르는 지집아이가 가졍 와서라!’. 아마도 마을회에서 일하는 여직원이 다녀갔나 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효도지팡이'라 쓰여진 스티커에, ‘9000원’이란 가격표가 붙었다. 왠지 너무 값싸게 느껴진다. 청려장은 명아주로 만든다는데, 그 정성만 생각해도 이처럼 저렴할 리가 없지 싶다. 명아주는 밭이나 들에서 흔히 자생하는 한해살이 식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1년만에 2m 이상 자라서는 껍질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해진다. 말리면 보통 나무보다 가벼워서 지팡이 재료로 쓰기에 안성맞춤이 된다. 그래서 예부터 사랑받는 지팡이가 되었다.
청려장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모귀(暮歸)(해 저물어 돌아가다)’에도 등장한다. 쉬흔 살이 넘어서 구름이 더 가깝게 보이는 ‘내일도 명아주 지팡이 짚고서 구름 바라보겠네(明日看雲還杖藜: 명일간운환장려)’라고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청려장에 대한 기록이 있다. 664년, 나이가 든 김유신이 문무왕에게 은퇴하기를 청하자, 왕이 거부하는 대신에 지팡이를 하사하는 내용이다. 늙은 신하의 은퇴를 거절하는 용도로 사용된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청려장을 장수노인의 상징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50세에 자식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청려장을 가장(家杖), 60세에 마을에서 주는 것을 향장(鄕杖), 70세에 나라에서 주는 것을 국장(國杖), 80세에 임금이 하사하는 것을 조장(朝杖)이라 하였다.
1992년부터는10월 2일, 세계노인의 날에 ‘그해 100세를 맞는 노인에게 대통령이 청려장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2000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기념선물로 청려장을 드렸다니, 노인에 대한 국가 최고의 예우를 다한 셈이다. 그동안 수여된 그 많은 청려장들은 지금은 다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려장은 16세기 퇴계 이황이 사용한 것인데, 도산서원에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카카오스토리).
어버이날을 맞아, 육지에 간 손자들이 꽃을 보내왔다. 꽃바구니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는데, 도무지 웃지를 않으신다. 그런데 그 손자가 우연히 제주에 왔다가 집에 들렀다. 역시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할머니가 손자를 보자, 그리도 좋아하신다.
사실 노인은 웃어도 크게 웃지를 않으면 웃는지 우는지 구분이 안된다. 얼마나 좋으시면 저렇게 행복한 웃음이 나올까. 아기처럼 귀여운 표정. 하긴 30년 전, 손자를 낳을 때, 어머니가 미국에서 오셔서 손수 맞으셨다. 미국과 한국이 어디라고, 비행기를 스무 시간씩 타시면서 오시다니....
어머니가 날로 연약해지신다. 점심 시간이 지나서 일어나시는 날도 잦다. 하루에 두 끼를 드시는 날이 더 많다. 늘상 배가 고프지 않으시다고, 숟가락을 들면 고개를 저으신다. 그래도 어버이날 덕분에 자녀들이 모여드니, 식사를 조금 더 하신다. 치킨, 피자를 드시는 어머니를 보면, 미국에서 사신 17년 세월이 엿보인다. 말 모르고 귀 막혀서 보내던 이국땅에서, 그래도 이따금 별미로 드시던 음식이 낯익으신 걸까.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신 지 20년이 되었다. 요즘은 이상스레 아버지를 자주 찾으신다. 허태행씨는 어디로 갔느냐고. 하늘나라로 가신지 20년이 다 된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태행씨’라 들으면 어떤 표정이 되실까. 아마도 빙그레 웃으시리라. ‘아버지는 천국에서 어머니를 기다리신다’고 답하는 나. 가슴 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내가 이 해를 다 살 것 같지 않다’는 어머니를 안고서, 어쩌면 마지막 어버이주일을 보낸다. ‘그래도 감사하며 살아라’는 어머니를 가만히 안아본다. 아기처럼 작아지셨다.
참, 청려장은 2년 전 함께 사는 사위가 선물한 거란다. 세상에.... 그 지팡이가 어쩌다 이제야 나타났을까. 대통령의 선물이라니 애지중지 그 지팡이만 짚으신다. 진실을 밝혀드리면 어떤 표정이 되실까. 10월 2일, 그날에 진짜 청려장을 받으셨으면 좋겠다.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생애 마지막 5월. 밀감꽃 향기가 아침 저녁으로 마당 가득 들어온다. ‘오렌지 나무의 꽃향기는 풀이 무성한 길가에 퍼지고, 활짝 핀 꽃 속에서 종달새들은 노래하네.’ 부활절 아침 마을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가면서 부르는 합창곡이다. 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랑을 찬미하는 곡이라 한다. 부디 어머니와 함께하는 나날이 섶섬과 바다, 꽃과 바람, 올레를 지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정하고 행복하게 이어지기를 빌어본다.
지난 토요일 아침, 가로를 청소하는 분들이 풀과 함께 꽃을 다 베어 놓았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한 줄기 두 줄기 모아서 한아름 안고 오셨다. 어머니 의자 앞 탁자위에 올려 놓고서 사진을 찍어드렸다. 요즘은 어머니가 만드는 소소한 일상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슴에 벌어진 틈새로 서늘한 바람이 오간다. 왜 어머니와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일까. 어머니의 저 행복한 미소를 오래오래 간직하고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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