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한라산을 사랑했던 언론인2023.04.17그날 오후 아파트 창문으로 날아든 봄 햇살을 쬐고 있는데 스마트폰 벨이 울렸습니다. 모니터에 뜬 이름이 '문창재'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부가 궁금하던 터라 "성님(평소 부르는 호칭), 어디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저~, 아들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아버지란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갔구나" 하고. 아들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조금 전 돌아가셨습니다." 올해 4월은 나에게 잔인합니다. 지난 8일 언론인 문창재 선배를 저세상으로 떠나 보낸 공허함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화사한 튤립꽃을 보아도 빨간 홍매화를 보아도 봄이 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언론인 문창재'의 기자 정신, 활약상, 성품 등은 지난 수요일 자유칼럼 임철순 공동대표의 '옥 같은 언론인, 문창재' 부고 글에 더할 게 없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한국일보를 정년 퇴임한 후 고인과 필자가 교류하면서 가까이서 보았던 소회를 보태서 추모하고자 합니다.한국일보 2년 선배인 문창재 논설실장은 2003년 퇴임 후 내일신문 논설고문으로 글쓰는 일을 계속해서 타계하기 두어 달 전까지 펜을 잡았습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5, 6년 함께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나도 퇴직 후 내일신문의 칼럼니스트로 참여해서 소위 제2인생을 같은 차에 타게 됐습니다. 한국일보 30년 내일신문 17년 해서 거의 반세기를 언론인으로서 함께한 셈이니 참 긴 인연이었습니다.그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을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가끔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005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윌리엄 사파이어가 "결코 은퇴하지 말라"는 마지막 칼럼을 써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 칼럼에 딱 맞는 사람이 고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에 새겨진 '문창재 인간상'은 '현장과 사실'을 쫓고 자신의 이해와 타협하지 않는 엄격한 기자상입니다.그에겐 삶의 영역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그의 부음을 듣고 제주도 청년 약 30명이 병원 빈소로 달려왔습니다. 네댓 명은 주말 예약하기 어려운 비행기표를 구해서 빈소를 찾아왔고 한 여성은 밤을 새우고 새벽 장례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고인으로부터 고전을 읽는 맛을 배웠고 틈나면 한라산이나 오레길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눴던 제자들입니다.그가 제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귀포가 고향인 나와 함께 2007년 제주도 대학생들을 상대로 만든 HRA(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고전책 읽기를 지도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대학생들에게 좋은 성품과 현장 능력을 갖춘 직장인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만든 1년 코스의 빡센 민간 교육훈련프로그램입니다. HRA는 제주대학교와 지자체가 지원에 나서면서 민관학(民官學)이 협력하는 청년프로그램 모델이 되었습니다.고인은 이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등 중국 고전과 한국의 시, 그리고 '설국' 등 일본 문학의 맛을 학생들과 함께 토론했습니다.오래 논설을 썼던 그는 특히 학생들에게 한 가지 이슈에 대해 논조가 전혀 다른 두 신문의 사설을 읽고 비교 평가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정파적 관점이 아니라 글이 논리적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려고 애썼습니다. 21세기 들어 대학생들은 종이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고인은 이를 한탄하며 신문을 두 가지쯤 읽으라고 권유하곤 했습니다. 학생들이 그의 말을 듣고 신문을 구독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설 비교토론 시간만은 매우 즐겼다고 합니다.그는 수업이 끝나면 이튿날 한라산을 오르거나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많을 때는 10여 명, 어떤 때는 두서너 명의 학생들이 그를 따라 걸었습니다. 학생들이 따라 나서지 않아도 그는 혼자 걸었습니다.그는 시인 정지용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정지용 시집 '백록담'을 고전 목록에 포함시키고 학생들에게 읽고 외우게 했습니다. '백록담'이란 시가 있는지를 아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백록담을 줄줄 암송하면서 학생들을 야단쳤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살며 그것도 모르면 되냐"고. 학생들은 그를 '문창재 교수님'이라고 부르며 한라산을 따라 올랐습니다. 그 덕분에 한라산 백록담을 처음 정복했다는 학생도 꽤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싱가포르, 캄보디아, 일본에서 온 학생도 있었습니다.이렇게 해서 고인은 16년 동안 약 180회 정도 제주도를 왕래하며 약 350명의 제자와 교류했습니다. 또 한라산을 100번 올랐습니다. 그는 등산하지 않을 때는 제주도의 역사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제주섬의 신화와 전설이 잉태된 곳, 몽골인들의 남긴 흔적, 삼별초의 근거지, 추사 김정희 등 유배인들이 살던 곳,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진지, 4·3 사건의 유적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6·25전쟁 때 생겨난 육군 제1훈련소를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몇 년 전 '제주사용설명서'란 책을 썼습니다. 그건 관광가이드 같은 책이 아니라 제주의 역사 현장을 답사해서 쓴 일종의 역사 기행문입니다.이런 공적들이 인정되어 그는 몇 년 전 원희룡 제주도지사로부터 명예도민증을 받았고 그걸 무척 영예롭게 여겼습니다.3월 초 그는 HRA 4월 수업에 가지 못할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병이 깊어진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그는 그렇게 탐닉했던 제주도에 다시는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는 제자들의 곡소리를 듣고 "이제 마음 놓고 한라산에 오르십시오"라는 카톡 메시지를 받으며 행복하게 저세상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그의 죽음을 보며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1960년대 세계를 미니스커트의 열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영국 디자이너 메리 쿼안트가 93세로 숨졌다는 뉴스가 엊그제 뜬 것을 보았습니다. 고인과 동년배의 사람들은 이렇게 세계가 사회적 성적 자유를 향하여 줄달음치던 60년대에 청년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제 죽음을 많이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문창재 선배는 후배들과 산행을 하거나 사우회 또는 동우회 등 친목 모임에서 앞장서서 봉사를 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거나 시간에 차질이 생기면 "내가 할 게" 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립습니다. 15년 전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때 부음도 그의 휴대폰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모니터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잘 있어? 언제 한번 보자"고 말하자 수화기에서 여성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00 엄마입니다. 아이 아빠가 오늘 죽었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본인의 전화를 통해 사망 소식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도 느꼈고 이번에 다시 절감하게 됐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00세 시대를 계획하는 것도 좋지만 짧은 미래를 사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에게는 먼 미래를 보며 꿈을 꾸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이든 사람들에겐 내일보다 오늘, 내달보다 이달, 내년보다 올해 절실하게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는 것도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필자소개김수종‘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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