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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겨울을 지내고 나니 [정달호],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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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겨울을 지내고 나니

2023.03.09

겨울이 끝나는 마당에 다시 겨울 얘기를 꺼낸다는 게 좀 멋쩍기는 하지만 이번 겨울은 참 별난 겨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제주의 겨울이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추워 봤자 강원도나 서울 등 내지(內地)에 비하면 춥다고도 할 수 없지만 해마다 따사로운 날씨의 겨울만 알던 제주가 몇 주간이나 영하의 추위를 견뎌야 했던 것은 퍽이나 이례적입니다.

올겨울 두어 달 새 큰 눈이 세 번이나 내렸습니다. 근래 들어 매년 한 차례 정도 큰 눈이 내리고는 했는데 이번 겨울에는 벌써 세 차례나, 그것도 이틀 사흘씩 함박눈에다 눈보라까지 내려쳤으니 기후의 저주(詛呪)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섬의 남쪽인 서귀포에는 밤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번 겨울은 영하 5, 6도를 기록하는 날도 몇 번 있었습니다.  

큰 눈이 전 같지 않게 며칠씩 계속 와 쌓여도 집이 언덕길 이면도로라 제설차도 오지 않습니다. 볕이 없으면 20, 30센티 쌓인 눈이 한동안 그대로 있습니다. 눈 덮인 한라산과 주변 숲이 주는 겨울 풍광은 수려하지만 해발 250미터의 산기슭에서는 큰 눈이 오면 발이 묶이기 십상입니다. 몇 년 전에는 눈 때문에 블루베리밭 천장이 폭삭 내려앉고 기둥과 방조망(防鳥網)까지 잇따라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죠.

산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타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마음까지 스산해집니다. 바람은 일정한 방향이 없어 눈발은 사방으로 휘날리고 쌓인 눈마저 다시 공중으로 솟구칩니다. 그야말로 심란하게 하는 장면이죠. 커다란 유리창에 부딪히는 거센 눈발은 공포심마저 일으킵니다. 함박눈이 내리면 마냥 좋아 날뛰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사정없이 내려치는 눈보라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이번 큰 눈으로 제주를 오가는 항공편이 무더기로 결항되기까지 했습니다. 그 바람에 연휴에 제주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발이 묶여 제주를 떠나지 못하고 하루나 이틀 체류를 연장해야 하는 큰 불편을 겪기도 했지요. 직접 이런 일을 겪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상상해봅니다. 이런 큰 불편을 겪은 관광객들이 제주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될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겨울이 아니라도 골프를 치러 내려왔다가 강풍 때문에 못 치고 그냥 올라갔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제주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특정 시기에 기상이 좋고 나쁨은 순전히 운(運)의 문제일 뿐인데 말이지요.​

이번 추위에는 우리 집뿐 아니라 제주 곳곳에서 밭에 물을 대는 플라스틱 호스 연결부분이 동파된 사례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도 서울 가느라 며칠 집을 비운 사이에 얼어터진 호스에서 물이 콸콸 흘러 땅바닥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기도 하였답니다. 예년엔 없던 일이죠. 제주도 더 이상 강추위의 피해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눈이 많이 오면 보살피는 꽃나무들의 안전도 걱정해야 합니다. 눈이 오든 안 오든 식물들은 웬만한 겨울 추위를 잘 견뎌내는데 이번 겨울 추위는 예외였습니다. 오래전에도 한 번 큰 눈이 왔을 땐 응달에 서 있던 제법 크고 튼튼한 하귤(夏橘)나무 한 그루가 한참 눈에 덮여 있다가 죽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죽지는 않아도 예닐곱 그루 되는 크고 작은 하귤나무들의 잎이 사그라지고 누렇게 퇴색하였습니다. 피닉스 야자나무, 대추야자나무, 자색(紫色)아카시 등 열대성 식물들도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곧 봄이 되면 새 잎과 가지가 날 테지만 눈으로 인해 시들고 바래진 나뭇잎을 보는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그래도 블루베리를 비롯한 작은 나무들이 눈폭탄을 잘 견뎌낸 것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정원 곳곳에 피어 있는 연약한 수선화들이 세찬 눈발을 잘 버텨 온 것이 가상하고 아련하기도 합니다. 작년에 심어 놓은 튤립과 얼마 전 심은 아스틸베(astilbe)도 싹을 틔우고 있어 봄날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 줍니다. 예년보다 더 넓게 씨를 뿌린 유채도 조만간 일대를 노랗게 물들일 것입니다.

요즘은 추위가 많이 풀려서 정원 돌보는 일을 좀 하는 편입니다. 서울 딸 집에 있는 목수국 세 그루가 볕을 보지 못해 몇 년이 되어도 크지를 않기에 화분에서 꺼내 제주로 가져와 땅에 심었습니다. 수국에는 집수국, 산수국, 목수국 등이 있는데 다 예쁘지만 흰 목수국은 빛깔이나 모양이 더 귀티가 납니다. 봄에 이들이 꽃을 피울 것을 상상하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죠. 오늘은 그간 미루다가 덤불처럼 자란 애플세이지(apple sage, 허브류) 잔 가지들을 낮게 깎아주는 일을 했습니다. 모과나무와 감나무도 열매를 잘 맺도록 보기 좋게 가지를 쳐주었습니다.

이렇게 또 한 겨울이 지나갑니다. 몇 주 전부터 피기 시작한 매화가 만개하여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으며 이어서 복수초, 천리향들이 다 피었답니다. 단풍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에 불그스레 물기가 올라 세상이 다시 생동하는 듯하군요. 머지않아 목련, 벚꽃, 복숭아꽃들도 필 것입니다. 봄을 이길 겨울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모진 겨울을 겪는다 해도 봄은 오기 마련입니다. 겨울에 위축되었던 마음을 추스르고 따뜻한 봄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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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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