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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공파 36세 허찬국 박사의 칼럼,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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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어도 위험하지 않은 뉴욕의 보도

2023.01.13

우리나라의 보도(步道)는 젖으면 미끄럽습니다. 보도경계석, 큰 건물 앞에 깔린 포장재로 표면이 반들거리고 젖으면 미끄러운 석재(石材)가 많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안은 인구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넘어져 다치는 게 장년들에게 주요 위협이라는 사회적 시사점이 적지 않습니다. 뿐더러 비오는 날 미끄러질 뻔해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은 흔한 일인 듯싶습니다. 낙상(落傷)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용이 크기 때문에 예방이 중요합니다.

재작년에도 이 주제에 관해 왈가왈부 했었는데(‘젖으면 위험한 보도’, 2021년10월10일 자유칼럼) 최근 다녀온 미국 뉴욕의 거리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다시 씁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인도나 횡단보도에 미끄러운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표면이 매끄러운 포장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도를 유심히 살피게 된 것은 비 오는 날 맨해튼 도심의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에 입장하려고 줄을 서면서부터였죠. 보통 때였다면 예약된 관람 시간에 큰 지체 없이 입장했을 텐데 요즘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기후운동단체 회원들이 전시 작품에 국물을 끼얹는 등의 방식으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비해 MoMA는 관람객들이 물병을 비운 것을 확인한 후 입장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치 때문에 입장에 시간이 걸리며 사전 예약은 의미가 없어진 거죠. 나중에 가 본 다른 미술관에서는 이런 절차가 덜 까다로운 게 다행스러웠습니다.

코너를 굽이돌아 이어진 긴 줄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인도가 어떤 모습인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어 보도가 젖을 때 얼마나 미끄러운지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우선 차도에 비해 인도 폭이 더 넓어 보였습니다. 인도가 사방 1미터쯤 되는 정방형 콘크리트 불록으로 덮여있는 것도 서울과 달랐습니다. 보도경계석 모양은 비슷합니다. 경계석이 인도와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많았지만 석재인 경우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표면이 미끈하지 않아 비에 젖어도 전혀 미끄럽지 않았습니다(사진 1과 2). 인도가 차도 높이로 낮아지는 횡단보도에는 미끄럼 방지용 요철판이나 바닥재에 흠이 나게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사진 3과 4).

인도뿐만 아니라 큰 건물들의 입구에도 서울에서 흔한, 광택을 낸 것 같은 판석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서울의 대형 건물 입구가 비 올 때 상당히 미끄럽다는 불평을 심심치 않게 들었지요.

좌 상부터 사진 1, 2, 3, 4

맨해튼 큰 건물 입구에서 본 판석들은 표면이 서울에 비해 광택 없이 흐릿했고 미끄럽지 않았습니다. 우리 정부의 1년 예산보다 큰돈을 주무르는 세계최대 자산운용회사 블랙록(BlackRock) 건물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뉴욕 건물주들이 돈이 없어서 반짝이는 판석으로 건물 주변 바닥을 장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궁금한 일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보면 미국은 손해배상소송이 흔한 사회인 것이 중요한 원인으로 보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살 때 어느 날 집 앞 인도에서 넘어진 사람이 집주인의 책임을 물어 소송을 하겠다는 뜬금없는 통지를 받고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집 앞의 인도 바깥 차도 쪽에 심어진 큰 가로수의 뿌리로 인해 콘크리트 보도 불록이 약간 솟은 곳에 산책하던 사람이 걸려 넘어졌던 것이죠. 지자체의 책임이어서 별일 없이 넘어갔고, 얼마 후 인부들이 장비로 그 보도 불록을 깍는 것을 보았습니다.

변호사들을 사건 수임을 위해 ‘구급차 쫓아다니는 사람’이라고 비하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미국에서 누가 넘어져 다치면 보통 손배소가 뒤따르게 마련이죠. 그러니 빗길에 미끄러져 다치는 일은 지자체에게 부담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를 막기 위해 나서게 되는 겁니다. 다치는 사람이나, 보상 부담을 감당하는 게 모두 납세자임을 감안하면 낭비여서 잦은 손배소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미끄러짐 사고를 방지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성가신 과정을 겪지 않고도 우리나라의 미끄러운 보도가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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