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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 허균(許筠)

역사와고전비운의 천재 허균
도현법사(法士)추천 0조회 32522.11.24 20:49댓글 1

비운의 천재 허균

선조와 광해군 때 살다 간 비운의 지식인이자 시대의 이단이었던 허균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써서 자신의 소망을 소설의 주인공인 홍길동에게 투영시킨 인물이다.

참고로 아실 것은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라고 알려졌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조선의 제도 중에서 가장 비난을 받아야 할 제도가 서얼과 노비, 천민의 차별이었다.

당대 서얼들의 한과 삶을 대변 하고 있는 인물인 홍길동은 명문 출신이었으나,

호부호형할 수도 없었던 조선을 떠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꿈을 꾸며 길을 나선다
이러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칠서의 변'과 관련하여 결국 모반을 모의했다는 누명을 쓰고

50세에 비극적 생을 마쳤다

허균은 선조 2년(1569) 서울에서 당시 명문가로 이름있던 동인의 영수 초당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허엽은 박순과 더불어 서경덕의 수제자였으며, 학자요 정치가로 명망이 높았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로 허엽의 후처였다

그의 형제 자매들이 바로 허성, 허봉, 허난설헌 등 모두 문장에 뛰어난 인물들이었으며,

특히 허난설헌은 천재 여류시인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허균의 집안이 모두 학자요 천재였던 것이다.

허균은 이미 10대에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20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피난길에

아내와 자식을 잃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30대 부터 벼슬길에 올랐으나 기행으로 자주 삭탈 관직을 당했고,

40대 중반부터는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 시절 대북 정권의 핵심인물로 잘 나가다가,

50세에 반역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함으로써 천재의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허균의 글 재주는 비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괴이한 행실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부모 상을 입고도 기생과 놀아 나고 참선과 예불에는 빠지지 아니한다.

그는 천지간의 괴물이다." 라는 평을 들었다.

성리학의 고루함을 배격하는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천재에 대한 평가였다.

허균은 14세 때부터 형 허봉의 가까운 친구인 스승 이달을 사사했다.
이달은 당시 최경창, 백광훈 등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통하는 박학다식한 인물이었으나,

출신이 서얼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사회에 발붙일 데가
없었다. 이러한 스승을 사사 하면서 허균은 자연히 서얼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사람을 사귀는 데 귀천을 가리지 않아 승려, 평민, 기생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허균은 당대의 고승인 사명당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깊은 교류를 하고 있었고,

기생 이매창과도 가까이 지냈는데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니 나는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 수 없다,"

그 시대에는 이말이 통했을까?
이렇게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었던 그의 행동을 당시의 잣대로 평가하면 갈 데 없이 미친 놈이었다
그래서 허균은 항시 "나는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 라고 한탄했다.

허균이 미쳤을까? 세상이 미쳤을까?

허균은 신지식으로 무장한 당대 최고의 국제적 인사이자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허균은 중국 방문을 통하여 선진 학문과 서학을 배웠다.

그는 2번의 중국 방문 동안 자그마치 은을 1만 5,000냥이나 들여 4,0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을 구입해 들여왔는데, 모두 이단 서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중에 유교경전 비슷한 것은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책중에는 천주교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7세기에 4,000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으면

당시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장서가에 들었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천재가 이런 개방적인 사상을 접했으니 그에게 성리학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케케묵은 헛소리였다.

이러한 신사상에 접한 혁명가 허균은 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결국 역모를 꾀하게 되었다.

허균이 남긴 글들은 지금도 전해 오는데, 그는 그의 글 '성소부부고'에서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라고 기록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을 경우 끝내는 혁명이 올 것임을

군주와 집권 세력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으로 봐서야 백 번 옳은 말이지만 당시에는

역모로 열 번도 더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는 또 조선의 신분제를 신랄히 비판하여 그 차별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으며,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가 등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 사주,  작명, 도현암철학원 카페.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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