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아 작가는
전직 초등학교 교사로 2005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으며 동화작가로 등단했으며 <아라리 할아버지>로 제1회 정선아리랑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강기희 작가와 함께 정선 덕산기 계곡에서 숲속책방 ‘나와 나타샤와 책 읽는 고양이’를 운영하며 산행하는 나그네들을 맞이하고 있다.

역사의 반전으로 태어난 척주동해비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이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다. 송시열은 효종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남인을 이끌던 허목은 나이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은 그보다 낮은 지평이라는 언관이었다.
효종이 즉위 십 년 만에 갑자기 돌아가시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서인 송시열은 1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허목은 3년복을 주장하였는데 자의대비는 1년 상복을 입었다. 치열한 논쟁의 결과 서인이 승리한 셈이다. 남인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척주동해비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역사는 영원한 반전의 연속이다.

삼척부사 허목, 동해를 감동시키다

허목이 부사로 있을 때 큰 폭풍이 일어 삼척 온 고을이 물에 잠기는 물난리를 겪었다. 수재 현장을 둘러본 허목은 깜짝 놀랐다. 물이 휩쓸고 간 흉터가 너무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냐?”
부사가 묻자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아이고, 나으리. 우리는 해마다 이런 물난리를 겪사옵니다. 바닷가에 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체념하고 삽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허목은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마을을 뒤덮은 성난 파도를 잠재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 동이 틀 즈음 허목은 시(詩)로 동해를 달래기로 마음먹고 붓을 들어 동해송(東海頌)을 지었다.

바다가 넓고 넓어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끝이 없어라
동북은 사해여서 밀물 썰물이 없으므로 대택이라 이름했네
파란 물 하늘에 닿아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가 움직이고 음산하네 (동해송 일부)

허목(許穆, 1595~1682)은 조선 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로,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서 호를 미수(眉叟)라 하였다.
그는 222자로 이루어진 동해송(東海訟)이라는 글을 짓고
직접 개발한 전서체를 척주동해비에 새겨 넣었는데,
이 비석은 조류를 물리쳤다고 해서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린다.


우선 동해의 웅장함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고 칭송하고 ‘교인의 보배와 바다의 온갖 물산 많기도 하여라.’ 하면서 많은 보배를 품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그리고 동해를 성왕이라 높이며 그 빛나고 높은 덕으로 산다고 마무리 지었다.

옛 성왕의 원대한 덕화에 오랑캐들이 통역을 세우고 모두 복종하네
아아, 빛나도다 거룩한 정치가 널리 미쳐 유풍이 끝없도다 (동해송 일부)


허목은 검은 오석을 잘 다듬게 하여 앞면에 ‘척주동해비’라 이름하고, 뒤에 ‘동해송’을 새겨 가장 파도가 심한 곳에 세우게 하였다. 신기하게도 비석을 세우자 파도가 잠잠해지고, 바닷물이 험하게 요동치더라도 이 비석을 넘지는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백성들이 감복하였다.
“자네, 소문 들었는가?”
“무슨 소문.”
“왜 그 검은 비석 있잖은가. 거기에 우리 부사 나리가 직접 지으신 시가 한 편 새겨져 있는데 동해 용왕이 그 글에 감동해서 절대로 그 비석을 넘어오지 않으신다네.”
“그래? 우리도 한 번 가 보세.”
“자네 같은 까막눈이 가서 보면 뭐 알아보기나 하겠는가? 아무튼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글씨를 베껴다 집안에 두려고 난리가 났다네.”
“그건 또 왜?”
“글씨가 영험한 힘을 갖고 있어서 집안에 두면 수마(水魔)는 물론 화마(火魔)도 막아주고, 잡귀도 얼씬하지 못한다는구먼.”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하도 많이 탁본을 떠 가는 바람에 비석 보호를 위해 비각이라도 세워야 할 정도였다.
십오 년 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그때까지 생존해있던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 문제로 다시 싸움이 붙었다. 인선왕후가 며느리이므로 9개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서인은 주장했는데, 남인은 왕후의 예를 갖춰 1년을 입어야 한다고 맞선 것이다.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해 허목은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대사헌, 이조판서가 되었고 송시열은 유배길에 올랐다.

척주동해비의 형태는 뚜껑돌 없이 윗부분을 일직선으로 처리하고,
양 모서리에 약한 각이 진 직수형(直首形)에 가깝다.
비석 받침인 비좌(碑座)는 화강암으로 만든 사각형이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전반에 걸쳐 장식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70㎝, 너비 76㎝, 두께 23㎝이다.

눈으로 탁본하여 마음에 새기는 척주동해비

허목이 떠난 후 삼척의 척주동해비는 어떤 운명을 겪었을까? 반대편 당파 사람이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와서 화풀이를 비석에 퍼부었다고 한다. 척주동해비가 깨지자, 파도가 일렁이고 해일이 동헌 마루 밑까지 다시 밀려들었다. 그때 동헌 관리 한 사람이 대청마루 밑에 비석 하나가 숨겨져 있다고 실토했는데, 과연 마루 밑에서 똑같은 비석을 찾아 세웠더니 파도가 잠잠해졌다. 당파 싸움의 중심에서 허목은 하루아침에 뒤바뀔 운명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첫 번째 비(碑)는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니 이에 대비하여 비석을 두 개 만들어 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구용은 『척주지』(1848년)에 다른 사실을 남겼다. 비문이 훼손되자 백방으로 구하던 중 허목의 문하생 한숙이 보관해 둔 원문을 구해 다시 새겼다는 것이다. 두 개의 비석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은 과장되어 떠도는 말인지도 모른다.
조수를 막는 퇴조비(退潮碑)였던 척주동해비는 지금 삼척시 육향산 정상에 서 있다. 삼척항 최전선에 늠름하게 서서 파도에 대항해 싸우다가 지금은 퇴역해서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모처럼 바닷가에 가서 비석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는 일은 조금은 어이없고 여간한 정성 없이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척주동해비는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먹물 탁본은 금지되어 있으나 눈으로 탁본을 뜨고 마음에 새겨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삼척에 가면 척주동해비 앞에 서서 예사롭지 않은 그 영험한 기운을 한껏 담아 가시라.

INFORMATION
삼척 척주동해비 위치 강원도 삼척시 미수2길 17, 육향산 정상부 / 가는 길 삼척터미널 → 정라동사무소에서 하차(5.4㎞, 약 15분 소요)하여 동사무소 뒤편 육향산으로 올라간다. / 현황 전면에 ‘척주동해비각(陟州東海碑閣)’, 후면에 ‘동해비각(東海碑閣)’이라고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는 비각 안에 있으며,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 문의 033-570-3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