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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고마운 시간들이여 [노경아],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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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고마운 시간들이여

2022.12.21

“또 한 해가 가 버린다고/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중략)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새 달력을 준비하며/조용히 말하렵니다//‘가라, 옛날이여’/‘오라, 새날이여’/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고마운 시간들이여”(이해인 ‘12월의 엽서’)

‘고마운 시간들이여’라는 마지막 시구가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돕니다. 올 한 해 가족 친구 동료 이웃을 사랑했고, 매일매일 걸으며 건강을 챙겼고,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으므로 지난 삼백쉰다섯 날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좋은 삶에 대해 스스로에게 많이 물었고, 사랑이 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아 또 고맙습니다.

달력을 바꾸는 시기입니다. 묵은 달력을 덮을 때와 새 달력을 펼 때의 기분은 다릅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산 새해 달력을 펼치니 설렙니다. 카페 주인장이 손으로 쓴 숫자와 열두 장을 꾸민 짧은 글귀들이 고와서 산 달력(돈 주고 산 첫 달력)인데. 좋은 선물을 받은 느낌입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엔 달력만큼 좋은 선물도 없었습니다. 내가 자란 강원 산골 마을에선 읍내에서 가장 큰 금은방이나 안경점 정도만 달력을 만들어 단골손님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동네 분위기를 잘 아는 주인장들은 음력 날짜와 띠별 운세까지 나온 일력(日曆)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종이가 얇아 집집마다 변소에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아버지께선 지난 날짜에 붓글씨 연습을 하셨고, 동네 아저씨가 놀러 오면 이 종이로 담뱃잎을 말아 피웠습니다.

설악산의 사계절이 담긴(풍경 한가운데 국회의원 얼굴이 있어 점, 수염 등을 그리며 놀았던 것 같다), 국회의원이 나눠 준 긴 달력도 쓸 데가 참 많았습니다. 엄마는 눈 내리는 날 저녁 간식으로 배추 부침개를 부칠 때면 채그릇 위에 달력의 하얀 뒷면을 깔았습니다. 기름이 스며들어 달력이 투명해지면 부침개는 바삭바삭 한결 맛있었습니다. 긴 달력은 새 학년 교과서 표지를 싸기에도 십상이었습니다. 해 지난 달력이라도 버리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고교 시절, 산골 여고생들은 미술 선생님이 보여준 ‘명화 달력’에 감탄했습니다. 미술책에서만 보던 피카소, 샤갈, 고흐의 작품들을 커다란 달력에서 보며 화가의 꿈을 키운 친구도 있습니다. 그림에 관심 없던 친구들이 톱밥 난로 옆에 모여 낄낄거리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기억을 스칩니다.

전 세계적 명화를 달력에 처음 실은 것은 속옷 회사인 비비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회사는 1967년부터 1996년까지 30년 동안 390개의 명화를 소개했다지요. 1985년에 우리가 봤던 달력이 비비안 제품이라면 시골 고등학교 교사가 이 귀한 것을 어떻게 구했을지 궁금합니다.

세 살 터울 작은오빠 방엔 소피 마르소와 피비 케이츠가 각기 다른 달력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오빠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그 방을 내가 썼는데, 차마 그녀들을 떼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달력들로, 그녀들에 대한 오빠의 지조(내가 아는 한 현실 여자 친구는 없었다)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나 역시 동서양이 혼재된 그녀들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지금도 피비 케이츠가 부른 ‘파라다이스’와 소피 마르소 주연 영화 ‘라붐’의 삽입곡 ‘리얼리티’를 흥얼거리며, 30여 년 전 시골집 작은 방 벽에 붙어 있던 그녀들의 얼굴을 떠올리곤 합니다.

요 몇 년 사이 달력이 부쩍 귀해졌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마음이 안 좋습니다. 청주에 사시는 친정엄마도 달력을 못 구했는지 “날짜가 큼직하게 박히고 음력도 적힌 달력 가지고 해 가기 전에 내려와” 합니다. 모처럼 부탁하시니 엄마한테도 보는 재미가 있는 달력을 사다 드려야겠습니다. 계절별 꽃이 수놓인 달력이 좋겠네요. 달력이 단순한 날짜 정보만이 아니라 삶의 활기를 제공하는 매개로 발전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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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 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 담당 연구원, 이투데이 교열팀장을 거쳐 현재 한국일보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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