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freecolumn.co.kr갈 곳 없는 그 유골, 꼭 그래야 하나2022.11.28“꼭 그래야 하나(Muss es sein)”라는 표현은 독일 사회에서 가끔 듣는 표현이라 별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그리고 세계가 숭앙하는 악성(樂聖) 베토벤이 죽음을 앞둔 6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작곡한 ‘현악사중주 제16번’의 제목이 바로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Muss es sein? Es muss sein!)”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필하모니아의 사계 I/IV》 (오재원, 도서출판 이음앤, 2017, 323쪽.)필자는 얼마 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거(2021.11.23)한 지 1년이 지났는데, 고인의 유골 모실 자리를 찾지 못해 아직도 ‘연희동 자택’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몰려오면서, 문득 “꼭 그래야 하나?”라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고인이 되신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필자는 ‘환자와 의사’로서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전 대통령 내외분께서 백담사(百潭寺)에서 거처하며 어려웠던 시절에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을 필자는 각별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의사인 필자는 백담사를 여러 번 찾아갔습니다. 1988년에서 198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서울에서 백담사를 찾아갈 때는 소양강댐을 낀 비포장도로를 한참 ‘덜컹~덜컹’거리며 달렸습니다. 그리고 인제군(麟蹄郡) 백담사 아랫마을에 도착한 후 ‘사륜구동차(지프)’로 옮겨 탄 다음 절벽 계곡을 끼고 사찰로 올라갔습니다. 산길이 하도 험해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니 무척 겁을 먹었던 모양입니다.그렇게 도착하여 눈 앞에 펼쳐진 백담사 대웅전을 보며 감탄하는 것도 잠시, 전(前) 대통령 내외분이 기거하는 요사(寮舍)를 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협소하기 그지없고, 온갖 물리적 요건이 너무도 참담했습니다. ‘유배지’ 그 자체였습니다.그런 환경에서 진료를 마치고 당일 귀가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럴 때면 늦은 저녁 시간에 전두환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곤 했습니다. 짐작건대 필자가 비정치인이기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는지 ‘옛이야기’를 종종 들려주곤 하셨습니다.그중에 한 에피소드입니다. 필자가 백담사에서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그의 경제 선생으로 활약한 박봉환(朴鳳煥, 1933~2000) 동력자원부 장관과 김재익(金在益, 1938∼1983) 경제수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재익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소개한 이가 바로 박봉환이었다고 합니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시기에 지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공부’를 하였다 합니다. 그때 일을 얘기하며 전 전 대통령은 거리낌 없이 필자에게 “이 박사, 내가 정치를 알겠어요, 경제를 알겠어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솔직함에 놀라워하였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박봉환을 선생으로 초빙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 경제 정책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9월에 임기를 시작할 때 내심 박봉환을 경제수석으로 삼아 국가 경제를 맡기려고 했는가 봅니다. 그런데 전 대통령에게 박봉환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합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나라 경제를 책임지고 이끌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 대신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라며 그 ‘해맑은 인격’의 소유자가 추천한 사람이 바로 김재익입니다. 김재익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 전문가였습니다.김재익에게 경제수석을 맡긴 후 전 대통령이 물었다고 합니다. “김 수석, 경제수석으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러자 김재익 수석이 “인플레이션을 잡는 일입니다. 인플레이션은 열병과 같아 지금 잡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이 날 소지가 큽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이처럼 김재익 경제수석은 한국 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다른 경제학자나 경제 관료들은 인플레이션을 그리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 경제는 늘 인플레를 안고 성장하고 있으니 감수하고 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기업인도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어느 정도는 감수하고 가야 한다.”라며 김 수석의 주장과는 다른 입장에 섰다고 합니다.어느 쪽의 주장을 들어도 타당한 구석이 있는 데다 양쪽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가운데 정책 결정의 공은 전 대통령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숙고를 거듭하던 대통령은 문득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줄곧 인플레이션 문제를 겪고 있지만 여태 인플레를 잡은 대통령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라도 인플레이션을 잡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신의 한 수’였나 봅니다.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삼으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한 표현이 시중에 회자하고 있지만, 이는 주변에 김재익 경제수석의 입지를 뒷받침하려던 대통령의 깊은 배려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전두환 대통령은 주위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 수석에게 힘을 실어주며 인플레이션을 잡는 정책을 추진해나갔다고 합니다. 그 결과 집권 초기 약 28%에 달하던 인플레가 2년 만에 7%로 내려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과입니다.그런데 ‘재사박명(才士薄命)’이라 했던가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한 김재익 수석은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얀마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아웅산 테러’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어쨌거나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기에 경제성장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습니다. 기적에 가까운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 수석이 놓은 주춧돌 덕분에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기에 연 8~13%에 달하는 고도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라 합니다.생각건대, 누구에게나 삶에서 ‘공(功)’과 ‘과(過)’는 공존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고 합니다. 즉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으며,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관련 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거론됐지만, 이 나라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은 잊힌 부분이 크다는 아쉬운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인지, 전직 대통령의 유골 모실 자리 하나를 우리 사회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무거운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여 ‘꼭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베토벤의 물음이 크게 떠오르는 오늘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필자소개이성낙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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