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01일 11세 판도좌랑공(版圖佐郎公) 11세 관(冠) 예하(隸下) 17세까지의 선조 님의 추향시제 올리기 위해 오전 9시에 양천허씨 대종회 회관에서 48인승 대절 버스를 타고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산89번지에 소재 판도좌랑공 설단(設壇)을 가는데 연 3일 공휴일 중 첫날이라, 평소보다 많은 차량 통행량으로 주행속도가 느렸다. 행사장에 가는 버스 안에서 대종회 허동 사무총장의 사회로 동승한 종인의 자신 소개를 하도록 하였다. 우선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서 오신 제양공파종회 회장 허 충회 회장의 소개(자세한 소개 내용과 사진은 대종회 홍페이 자유게시판과 겔러리 참조)에 이어 찬성사공파 중앙회 허재권 회장 등 몇 분의 소개에 이어 대종회 허 찬 회장님의 조상님 대한 뿌리 교육은 오늘 추향제를 올린 11세 판도좌랑공 관(冠) 선조님에 대한 것과 판도좌랑공과 예하(隸下) 17세 선조님 시제 봉행을 마치고 참배(參拜)하러가는 비무장지대에 계시는 15세 매헌공 허기(愭) 선조님에 대해 원고 없이 육성으로 하셨다. 향년 90세에 이른 연로하신 분이 놀라운 기억으로 당신이 집필한 陽川許氏 大宗會六十年史의 내용을 빠짐없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판도좌랑공파 종중은 10세 문경공 허공(珙)의 셋째 아들인 11세 판도좌랑(版圖佐郞) 허관(冠)을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는 종중이다
판도좌랑공은 송분(宋玢)의 딸인 여산 송씨(礪山宋氏)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인 문정공(文正公) 허백(伯)은 고려 제27대 임금 충숙왕 때 정사방 을(乙)과 3위로 문과 급제한 후, 31대 임금 공민왕 5(1356)년 7월, 그 벼슬이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현재의 부총리)에 이르렀으며, 둘째 허선(僐)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에, 넷째 허교(僑)는 개성윤(開城尹)을 지냈다. 셋째인 딸은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천선(李千善)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천선(李千善)은 민부전서(民部典書) 를 역임한 이윤온(李允蒀)의 아들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등의 관직을 지냈다. 조선 시대 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판도좌랑공의 후손들은 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 현재는 양천 허씨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판도좌랑공 후손들은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상신(相臣,정승) 5명, 공신(功臣) 8명, 청백리(淸白吏) 7명, 호당(湖堂) 6명, 등 많은 명현(名賢)과 상경(相卿: 장관 이상의 벼슬)을 배출하며 명실공히 양천 허문의 중심축(中心軸)으로 종족(宗族: 동성동본의 일가)을 이끌어 왔는데 고려 왕조가 멸망한 후 고려의 수도 개성을 떠나 경기도 장단과 그 일원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 15세 매헌공(梅軒公) 愭(기) 선조 님 묘소에 참배(參拜)를 가고자 하는 곳은 조선 개국 된 후 돌아가신 야당공의 첫째 아들 15세 매헌공(梅軒公) 허기(愭)는 장단군 판부리(현재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산 39번지)에 묘를 썼는데 이후 매헌공의 후손들은 6.25 한국전쟁 전까지 근 520년 동안 장단군 일원에 집성 세거(世居)하며 묘를 조성했다. 경기도 의정부 송산(松山-현재 의정부시 신곡2동 일대)에 계신 17세 합陜川公 훈(薰)의 묘는 장단군 북동쪽에 경계를 이루고 있는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19번지로 1994년 이장(移葬)하였고 이곳에 미수 허목(穆)의 고조인 18세 허원(瑗) 묘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 6(1511)년 쓰여진 이래 현재까지 500년 동안 미수 허목(穆) 종손 계가 묘역을 수호해 오는 한편 현재까지도 종손계의 묘를 지속적으로 조성해 오고 있다. 물론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 4(1498)년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 중종 14(1519)년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 등 각종 변란 등으로 인해 일부 후손들은 집성 세거지(世居地)였던 경기도 장단을 떠나 충청북도 충주 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으며 다른 일부 후손들 또한 1650년대를 지나며 경기도 용인, 광주, 등 새로운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판도좌랑공의 장손계는 광주목사와 종묘·제향 등의 업무를 관장한 봉상시(奉常寺)의 장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한 15세 매헌공(梅軒公) 허기(愭)의 아들 대(代)와 손자, 그리고 증손자 대(代)에서 분파를 하게 되는데 매헌공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으며, 공(公)의 첫째 아들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허비(扉)가 전의 이씨(全義李氏)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둘째 아들 자산군사 허추(樞)가 전주 최씨(全州崔氏)와의 사이에서 3남 6녀를 두었다. 조선 시대 양천 허문의 정승과 판서는 모두 매헌공 허기(愭)의 후손이다.
매헌공 허기(愭)는 고려 32대 임금 우왕 6(1380)년 16세의 나이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했으며 3년 후인 우왕 9(1383)년 19세의 나이로 다시 왕승(王昇) 방(榜)에 급제했는데 어려서부터 글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다. 그러나 공(公)의 나이 28세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은둔을 하는데 조선은 공(公)을 중용하려고 여러 벼슬을 내리나 번번히 사양했다. 제3대 임금 태종 때 다시 광주목사 벼슬을 내리니 공(公)의 사양이 자칫 조선 왕조에 반대하는 것으로 비추어져 후손들에게 해가 미칠까 봐 공(公)은 마지못해 부임을 했다고 한다.
공(公)의 첫째 아들 허비(扉)는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를 지냈으며 증손인 허종(琮), 허침(琛) 형제의 벼슬과 지위가 정승에 이르자 공(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허종(琮), 허침(琛) 형제를 비롯하여 미수 허목(穆, 우의정), 묵제 허적(積, 영의정), 양평군 허준(浚) 등 공(公)의 후손 대부분은 경기도 장단, 연천, 광주, 충주 등을 중심으로 인근에 묘역을 조성하며 집성 세거해 왔다. 둘째 아들 허추(樞)는 지자산군사(知慈山郡事)를 지냈는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던 20세 초당공(草堂公) 허엽(曄),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던 공(公)의 첫째 아들 허성(筬), 둘째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동인(東人)의 선봉에 섰던 허봉(篈)과 그의 동생으로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蛟山) 허균(筠), 허균(筠)의 누나인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리고 조선 말기 벼슬이 이조판서에 오른 성재(性齋) 허전(傳) 등이 허추(樞)의 후손이다. 지자산군사를 지낸 16세 자산공(慈山公) 허추(樞)의 후손들은 주로 경기도 용인, 청주, 강릉, 포천 등지에 터전을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매헌공(梅軒公)의 증손이며 형제 정승으로 유명한 충정공(忠貞公) 허종(琮)과 문정공 허침(琛), 형님인 허종(琮)의 후손들은 주로 경기도 장단면 우근리를 중심으로 세거했으며, 동생 허침(琛)의 후손들은 경기도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세거했다. 임진왜란 때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굳게 지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방어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른 부훤당(負暄堂) 허욱(頊)은 충정공 허종(琮)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17세 합천공(陜川公) 허훈(薰)의 후손들은 경기도 연천을 중심으로 세거했으며 후손으로는 강직한 성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19세 동애공(東崖公) 허자(磁), 남인(南人)의 영수로 정치보다는 학자로 유명했으며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대왕으로부터 노년(老年: 늙은 나이)에 살집을 하사받은 22세 우의정(右議政) 미수(眉叟) 허목(穆), 학문이 높아 유림(儒林: 유교의 가르침을 배우는 학자들)으로부터 추앙받던 22세 관설(觀雪) 허후(厚)와 31세 심석(心石) 허헌(憲) 등이 있다.
합천공의 첫째 동생인 영월공(寧越公) 허지(芝)의 후손들 또한 경기도 장단을 중심으로 살아왔는데 《동의보감》의 저자 20세 양평군(陽平君) 허준(浚)이 영월공의 증손자다. 영월공의 자손은 많이 번성하지 못했는데 이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였던 영월공의 장손(長孫: 맏손자) 19세 허반(磐)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류되어 화(禍: 재앙)를 입은 것도 큰 이유라 생각된다. 조선 말기 《동의보감》의 저자 양평군(陽平君) 허준(浚)의 9대손 허도(堵)가 경기도 장단으로부터 황해도 해주(海州)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지역이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허도(堵)와 그 일족들 대부분이 해주 또는 그 인근 지역에, 아니면 북한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다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영월공의 후손들은 현재 그 수가 아주 적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합천공의 둘째 동생인 전부공(典簿公) 허형(蘅)의 후손들은 충청북도 충주(忠州)를 중심으로 묘역을 조성하며 집성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는 전부공의 손자인 19세 허초(礎)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 14(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집성 세거지였던 경기도 장단군을 떠나 처가 집이 있던 충청북도 충주로 삶의 터전을 옮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후손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20세 한천공(寒泉公) 허잠(潛),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 12(1671)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묵재공(默齋公) 허적(積) 등이 있다.
위와 같이 양천 허문의 정승과 판서, 그리고 지방관 대부분이 15세 매헌공 허기(愭)의 후손 중에서 배출 되었다.』고 뿌리 교육을 하셨다.
허찬 회장님께서 위와 같이 뿌리 교육을 하신 내용은 책『陽川許氏 大宗會六十年史 제1권 P342 – P354 중간부까지 발취하였다.
선조님들에 대한 뿌리 교육을 듣고 나니 어느덧 판도좌랑공 설단 진입 근처의 신평 초등학교에 버스가 도착하니 시각은 10시 30분경으로 시제 봉행에 늦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적지 진입로 초입은 협소하여 대형 버스가 들어갈 수가 없어 연로하신 종인들께서 걷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버스에 싣고 온 짐을 시제 장소까지 맨손으로 나르는데 고생을 한 종인들이 있어, 집행부에서는 다음은 대형 버스 대신 중형 버스로 운행하여 편리함을 제공토록 고려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제 장소에 많은 제관들로 성황을 이루고, 시제 봉행 준비 마치고, 감사보고가 있었다. 감사보고에 이어서 헌관 임명 작업에서 올해는 아래의 헌관 편성표와 같이 조상님께 술잔 올리는 횟수가 많은 종인은 가급 적 배제하고, 제주도와 충주 등 먼 곳에서 오신 분들에게 헌작(獻酌)의 기회를 드리고 또한 제사를 받으시는 조상님의 후손들 위주로 잔을 올리는 기회의 헌관표를 작성하였습니다.
版圖佐郎公 隸下 17世 先祖 秋享祭
獻 官 分 定 表
신위(神位) | 헌관(獻官) | |||
초헌 (初獻) | 아헌 (亞獻) | 종헌 (終獻) | ||
11世 版圖佐郞公 (冠) | 성명 | 허경행 (판도좌랑공파종회 회장) | 허평환 (양천허씨대종회 고문) | 허은욱 (대제학파종회 회장) |
12世 文正公 (伯) | 성명 | |||
허일범 (양천허씨대종회 전 회장) | 허광학 동주사공파 | 허완무 문정공파 | ||
12世 開成尹公 (僑) | 성명 | |||
허진 (개성윤공파종회회장) | 허양 개성윤공파 | 허정 개성윤공파 | ||
13世 知申事公 (絅) | 성명 | |||
허재권 (찬성사공파종회 회장) | 허찬욱 (찬성사공파 전 회장) | 허선 (순천 승지공파) | ||
14世 埜堂公 (錦) | 성명 | |||
허정고 (대종회 부회장) | 허용회 (전부공파종회 회장) | 허근회 (전부공파) | ||
15世 梅軒公 (愭) | 성명 | |||
허재무 (자산공파종회 회장) | 허영회 (문정공파) | 허문길 (합천공파) | ||
16世 襄陽都護府使公 (扉) | 성명 | |||
허창범 (교위공파) | 허영만 (교위공파) | 허철 (교위공파) | ||
17世 載寧郡守公 (蓀) | 성명 | 허충현 (제양공파종회 회장) | 허웅회 (제양군파) | 허경회 (제양공파) |
집례관 | 축관 | 집사 | 진설 | |
허현무(문정공파) | 허태봉(자산공파) | 허제행(제양공파) 허엽(문정공파) 허백무(합천공파) 허완회(한천공파) | 허제행 (제양군파) |
▣ 양천허씨 허문의 며느리와 딸들이 단체로 잔을 올림
올해의 제사 방식은 예전과 달리 소목(昭穆-신주를 배열하는 방식으로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제일 높으신 분을 가운데 모시고 2세, 4세, 6세 등 짝수는 소에 모시고, 3세, 5세, 7세 등 홀수는 목에 모심)으로 모셔진 조상님의 비석 앞의 석상에 주과포를 차리지 않고, 7분의 선조님이 모셔진 비석 중 정 중앙에 11세 판도좌랑공(版圖佐郎公) 관(冠) 조상님 비석 앞의 상 돌에 8분의 선조님의 제물을 합설(合設)로 진설하고, 각 선조님의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으로 임명된 제관은 소목(昭穆)으로 배치된 해당 선조님의 비석 앞에 도열하여 집례관의 구령(口令)에 따라 시제를 봉행(奉行)하였다. 종전과 같이 며느리, 딸, 아이들은 단체로 마지막 잔을 올리는 것으로 시제를 마치고, 집행부에 마련한 음식으로 시제 참석한 여자분과 젊은 사람들이 배식 수고를 하였다. 안성 찬성사공파종회에서 오신 허종만 종친이 그 비싼 싸인 머스켓(Shine muscat-1988년 일본 농수산성 산하 농업식품산업기술종합연구기구의 과일나무과학연구원에서 마키스21과 하쿠난을 교배시켜 개발한 품종의 포도) 가져 오셔서 제사상에 올릴 뿐만 아니라, 점심 식사 후식용으로 많은 것을 가져오셔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오늘은 문정공파 예하(隸下)의 전랑공파 문중의 종원분들께서 시제의 궂은일 및 마무리 일을 맡아 하여 15세 매헌공 허 기(嗜) 묘소를 향해 지체없이 떠나게 되었다.
판도좌랑공 설단 출발하여 1시간 정도에 매헌공 묘소가 소재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에 이르렀다. 국도 372번지에서 묘소로 진입하는 일방통행 길에서부터 고랑고포대 군 검문소에 이르기까지 장단종친회 소속 허현강 종인이 이 지역의 역사적인 인물, 사건 및 사미천의 내력 등을 설명하였다.
군 검문소에서 출입 절차를 거쳐 군의 호위(Escorts)를 받고 비무장(DMZ)내에 계시는 매헌공의 묘소 밖의 남방한계선 철책까지 도착하여 집행부에서 매헌공에 참배를 올릴 제수 진설을 하는 동안 허현강 종원은 핸드마이크로 옛 조상들이 집성촌을 이뤄 계신 장단군 대강면의 우근리와 그 위쪽 강산면 임강리를 바라보며 설명을 하였다.
진설이 끝나자 집례자 겸 집사인 허현무 종원의 사회로 제를 올렸다. 헌관표와 같이 삼헌으로 제를 마치려 했으나, 오늘 허찬 회장님의 조상님들 대한 뿌리 교육에서 양천허문에서 매헌공 후손들이 정승 등 고위 관직들을 배출하셨다는 말씀들을 듣고 많은 종원들이 매헌공의 DNA의 기(氣)를 받고자 헌작(獻酌)을 하겠다는 요청이 많아 8 헌까지 올렸다.
제사상은 매헌공 묘소를 향하고 있고, 제사상의 바로 앞에 보이는 철책은 남방한계선의 철책이며, 철책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칡 넝쿨과 환삼 넝쿨 등으로 뒤덮인 둥글게 솟은 것이 매헌공의 묘소이다.
15세 梅軒公 許愭 墓所 參拜 獻官表
神位 | 15세 梅軒公 許愭 |
初獻禮 | 허평환 대종회 고문(합천공파) |
亞獻禮 | 허현강 대종회 부회장 (장단종친회) |
三獻禮 | 허정고 대종회 부회장 (전부공파) |
四獻禮 | 허경행 판도좌랑공종회 회장, 허충현 제양공파종친회 회장, 허말희 대종회 운영위원(합천공파) |
五獻禮 | 문정공파종중 종원 일원 |
六獻禮 | 찬성사공파중앙회 종원 일원 |
七獻禮 | 대제학공파종회 허은옥 회장 |
終獻禮 | 대종회 허동 사무총장 (동주사공파) |
많은 종인들이 지방에서 올라오고 중부전선 비무장까지 여행의 피로가 있음에도 무탈하게 모든 행사를 마친 것은 조상님들이 보살핌이 있음이라 믿는다.
10월 6일에는 10세 문경공(文敬公) 공(珙)의 묘 성묘를 하였다.
비무장지대 안에 계신 10세 문경공 묘를 가기 위해서 우선 자유로 끝단에 있는 통일대교의 민통선(민간인 출입 통제선) 군 검문소에서 출입자 본인과 신분증을 확인하고 신분증을 제출하는 출입 수석이 많은 시간이 지체하였다. 출입 신고에 따라 버스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을 경비하는 경비대대(JSA)에서 2차 검문에 따른 출입 절차를 받고 경호담당의 차량과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문경공 묘소 진입 도랑에 도착하니, 지난여름 폭우로 진입 다리가 없어져, 새로운 길을 찾아 교위공파 허 억(대종회 운영위원)종인이 자신의 예초기로 무성을 잡목과 잡초를 제거하는 수고를 하였다. 10세 문경공 묘소를 비롯한 아래 3기의 묘소를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들 예초를 마치고, 10세 문경공 할아버님 묘전 상돌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를 올린 다음, 큰아들 동주사공 11세 정(程) 할아버님의 묘전 상돌에 동주사공파 종회에서 준비해온 제물을 차려 놓고 제를 올리고, 나오는 길에 JSA 초소에서 신분증를 찾아 문산 임진리에 소재한 장단가든 식당에 두부전골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일부는 문산역에서 경의중앙선 전출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대종회 회관에 와서 각자 귀가를 하였다,
대종회 회관에서 11세 문경공 묘소 성묘 가는 중에 버스 안에서 11세 문경공 공(珙) 할아버님에 대해 대종회 회장 허찬 회장님께서 뿌리 교육을 하셨다. 뿌리 교육 내용은
『양천허씨 대종회 60년사(史) 제1권 P293 상단 4번째 줄부터 P305까지』 참조
10월 9일에는 비무장지대 내의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 358 소재 동의보감을 쓰신 20세 양평군(楊平郡) 허준(浚) 할아버님 시향제를 올렸다.
이날도 대종회 회관에서 대절 버스로 진동면 하포리 전진교 민통선 군 검문소에서 출입 절차를 마치고 허준 묘역 주차장 주차를 하고 우산과 우비를 거치고 도보로 경사진 돌판으로 포장된 길을 올랐다. 파주시 금촌에 사는 교위공파 허억(대종회 운영위원)은 동리 분들과 함께 운반 차량을 가져와 버스에 있는 제기 및 제물 등을 허준 묘역 제실까지 운반하는 수고로 집행부의 수고를 덜었다. “허준 문화진흥회” 회원들이 참석하여 허준 할아버님 묘소 들어가는 길 한편에 허준 할아버님 관련 프래카드(placard)를 여러 곳에 설치와 할아버님 묘서 뒤편 비탈에 “醫聖 龜巖 허준 선생 추향제”라는 칼라 프래카드를 설치하여 축제 마당의 분위기 같았다. 오늘의 종헌(終獻)은 허준 문화진흥회 임원진들이 합동으로 잔을 올렸다. 이날도 점심 식사는 문산 임진리 장단가든 식당에서 두부전골로 하였다. 이곳 사장님은 10월 6일 왔을 때 점심 식사보다 맛에 신경을 써서 그런지 양도 많고 맛도 좋았다. 귀가는 문산역에서 하차하신 분들과 대종회 회관에서 귀가하는 분들이 있었다.
비 오는 굿은 날이지만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행사가 무사히 마치게 된 것에 감사들 드린다.
본 게시판의 수용 능력을 고려해서 본 글을 이것으로 마치고, 철책선 안에 계신 선조님들의 묘소 들릴 때 앞에 보이는 철책선이 무슨 철책선인지를 묻는 종친들이 있어, 선조님들이 계신 곳이 군사적으로 어떤 곳인지를 모르는 종친들이 있어, 이해를 돕고자 다음에 이에 대한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장 사진을 올리려 했으나, 자유게시판 수용 용량 제한으로 올리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합천공파종회 총무 허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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