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가는 길2022.10.05제가 2014년에 완간해서 출간한 대하장편소설 “금강”(전15권)은 12년 6개월 동안 200자원고지 2만 6천매 분량으로 쓴 것입니다. 소설의 주요 내용은 제 고향인 영동군 양산면 모산 마을 사람들이, 1956년부터 2000년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거울론에 입각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서술한 것입니다.“금강”을 쓰게 된 배경은 사람의 하루를 보면 평생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모산 마을 사람들이 반세기를 살아 온 역사를 더듬어 보면 우리가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입니다.12년 넘게 걸린 이유는 풍습, 물가, 정치를 시대별로 세밀 묘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1956년에는 사회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시절 쌀이며 보리, 주류 가격은 얼마를 했는지, 1967년대부터 시판이 시작된 국산 석유곤로 가격은 1천7백 원 정도나 일제는 3천5백 원으로 비쌌다는 것, 1971년 국산 기성양복은 5천원 사이에서 9천원 사이면 살 수 있다는 그 시절 물가까지 서술이 아닌, 등장인물의 생활에 그대로 녹이느라 집필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예를 들어서 보리쌀 두 말을 팔아 서울에 올라간 창수가 쌀장사로 많은 돈을 모읍니다. 1974년 8월15일 서울에 지하철이 개통된다는 말에 동네 어른들께 지하철도 구경시키고 창경원도 구경시킬 겸 전세버스를 보냅니다. 동네 사람들을 태운 전세버스가 영동에 도착할 무렵 라디오에서 육영수 여사가 국립극장에서 피살되었다는 비보가 흘러나옵니다. 라는 식으로 전개가 됩니다.소설의 배경에는 해발 484미터 비봉산(飛鳳山)이 나옵니다. 모산 마을을 품고 있는 비봉산은 양산 팔경에서 제 3경에 해당됩니다. 산세가 워낙 험해서 정상까지 오르는 데 2시간이 훨씬 넘게 걸립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백제와 신라가 싸웠다는 양산들은 물론이고 장수에서 발원한 양산강 줄기가 한눈에 보입니다. 금방이라도 양산가 가락이 어디선가 들릴 것 같은 정취에 사로잡힙니다.비봉산 정상을 넘어가면 범골이라는 골짜기가 나옵니다. 범골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예전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곳에 고조부의 산소가 있습니다. 다른 조상분들은 모두 마을 근처의 산에 있는데 고조부의 산소만 범골에 있습니다.벌초 때만 되면 고조부 산소 벌초하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비봉산도 그냥 오르는 것도 아니고 낫이며 갈퀴, 톱, 벌초 후에 산소 앞에 놓을 간단한 음식을 들고 올라가면 땀범벅이 됩니다.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왜 범골에 산소를 썼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가시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올라갔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범골에 산소를 쓴 이유는 묫자리가 좋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어른들이 어렸을 때는 매일 범골까지 나무를 하러 다니셨다는 점입니다. 그냥 오르내리기도 힘든 길을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다니셨다는 말에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열한두 살짜리가 밤길 10리 정도는 우습게 걸어 다니던 시절이라서 어른들의 말씀이 수긍이 갔습니다.지금도 범골에 벌초를 하러 갑니다. 예전처럼 친척들이 모두 가지 않고, 시쳇말로 특공대를 선출해서 두 명이 대표로 갑니다. 다른 친척들은 가까운 산소를 벌초하고 범골 팀은 바람이 선선할 무렵인 아침 일찍 출발을 합니다. 처음에는 나이순으로 젊은 층들이 갔지만 나중에는 심지 뽑기로 정해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요즘 벌초 때는 저희 세대들보다 윗세대 어른들이 안 계십니다. 저하고 같은 세대의 아랫세대들도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른들도 저희 나이 때까지만 벌초를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 안 계신다는 걸 느낄 때마다 새삼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느낍니다.벌초를 하는 인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20여 명이 북적거리며 낫으로 베는 담당, 베어낸 풀을 갈퀴로 긁어 한곳으로 모으는 역할, 산소자리로 뻗은 나뭇가지를 베어내는 담당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어른들이 높은 데 서서 진두지휘를 하시며 산소의 주인이신 조상의 흔적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다 보면 어느새 벌초가 끝납니다.벌초가 끝나면 양산 강가의 솔밭이나 친척집 마당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거나 음식점으로 몰려갑니다. 여러 가지 음식을 시켜 놓고 못 보던 사이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내년 벌초 때를 기약했습니다.지금은 대여섯 명이 땀을 흘리며 바쁘게 움직여야 해전에 벌초를 끝낼 수 있습니다. 사촌이나 육촌 집안에서는 대개 맏아들 혼자만 벌초에 참석을 합니다. 아랫세대들이 벌초를 이어가도록 지도를 그려 놓거나 동영상을 찍어 산소 위치를 정확하게 표시해 두지도 않습니다. 벌초가 끝나고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서로 제 갈 길로 출발하기 바쁩니다.벌초를 하면서 ‘우리 세대가 끝나면 조상 산소는 모두 묵묘가 된다’는 말은 스스럼없이 합니다. 저 역시 자식들에게 벌초의 중요성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자식들도 조상의 산소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려 들지 않습니다. 증조할아버지까지는 알아둬야 한다는 생각에 명절 때가 되면 성묘를 가기는 하지만 그마저, 날씨가 춥거나 비라도 오락가락하는 날이면 두말 없이 생략해 버립니다.일부 친척들은 원래 벌초에 참석을 하지 않아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화조차 하지 않고 지냅니다. 촌수가 멀더라도 벌초 때마다 참석을 하는 친척들은 일가(一家)라는 느낌이 드는데, 촌수가 가까운 친척이라도 벌초 때 참석을 안 하면 일가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저희 자식들도 사촌까지는 그럭저럭 알고 지내는데 육촌은 얼굴을 모르고 지내는 친척이 많습니다.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벌초는 단순하게 조상의 산소를 보살핀다는 점도 있지만 후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친목을 다지는 의미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친척도 자주 보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산소도 벌초를 하지 않고 1년만 묵혀도 산풀들이 무성하게 자랍니다. 근처 칡넝쿨이라도 있으면 산소를 찾기 힘이 들 정도입니다.요즈음은 벌초 대행업이 성황입니다. 돈만 주면 아무리 험한 산에 있는 산소라도 전문가들이 깨끗하게 벌초를 해 줍니다.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효율적이지만 친척들 간의 화합 도모를 방해하는 면도 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필자소개한만수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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