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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풍경 [김수종],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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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풍경

2022.06.13

지난 5월 8일 부처님오신날에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습니다. 무릎이 견뎌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나와 보조를 맞춰줄 일행이 있어 용기를 냈습니다. 해발 780m 성판악에서 백록담 정상까지 왕복 11시간을 걸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다리가 아팠지만 오랜만에 백록담에 서는 쾌감을 맛보았습니다. 다리와 무릎이 고마웠습니다. 옛날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입니다.

5월 한라산엔 눈 호강 거리가 많았습니다. 고산에 늦게 피는 철쭉도 소박하고 아름다웠습니다만, 한라산의 매력은 잎사귀와 솔방울이 하늘로 솟구치는 구상나무의 모습입니다. 기후변화로 구상나무가 죽어간다는 뉴스를 많이 들어서였을까요, 고사목이 많아진 한라산 구상나무 숲이 애잔해 보였습니다.    
육천척 고산 지대라 안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백록담 분화구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시인 정지용이 읊었던 '백록담'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출입이 금지된 백록담 분화구에는 안개만 출입할 뿐 인간의 그림자가 없이 태고의 정적을 안고 있었지만, 등반이 허용된 동쪽 정상 암반에는 사람들이 빼곡했습니다. 한라산 국립공원이 허용한 하루 입산객 1,500명이 거의 정오쯤에 정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백록담 표지석 주위에선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인증샷을 누르려는 백여 명의 등산객들이 늘어선 줄이 거의 100m는 될 듯했습니다. '白鹿潭'이라고 새겨진 돌비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모처럼 백록담에 오른 관광객들이 포즈를 취하며 여러 번 찍다보니 좀체로 줄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국립공원 관리직원이 마이크를 통해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사람을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일행은 비석을 배경으로 한 인증 샷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바위에 드러눕거나 걸터앉아 백록담 공기를 마셨습니다. 백록담 표지석은 마음에 담아가자고 자위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능선을 올라가는 동안 사람들의 손엔 스마트폰이 없었는데 백록담 꼭대기에선 너도나도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을 갖고 남한 최고봉에 올랐으니 인증 사진을 찍고 싶은 건 인지상정입니다. 금방 찍은 사진을 카카오톡에 포스팅하고 가족이나 친지들과 통화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엔 사람들이 백록담에 올랐지만 카메라가 없어 못 찍었고, 동행한 사람 중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셔터를 눌러주면 감지덕지했습니다. 사진이 인화되어 나오는 걸 손꼽아 기다리곤 했습니다. 서울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을 꺼내들지 않은 사람을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지만 사람들은 그걸 별로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위력을 새삼 백록담에서 보고 느꼈습니다.

왕복 거의 20㎞에 달하는 성판악 등산로가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울퉁불퉁했던 돌길이 사람들이 걷기 편하게 정비되었습니다. 야자수 매트, 목재데크, 돌계단, 자갈길이 경사도와 바위 상태에 맞춰 걷기 편하게 조성되었습니다. 20년 전 슬리퍼 모양의 운동화를 신고 같은 등산로를 올라가던 어떤 부산 할머니의 불평 소리가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여기 시장 뭐하는 사람이고? 길이 엉망인데 포장도 안 하고. 그라고 또 표 얻겠나." 편리함, 관광수입, 표, 복지가 지배하는 세태를 한라산 등산로에서 봅니다.  

50여 년 전 처음 본 백록담이 기억에 떠오릅니다. 8월 중순에 친구와 둘이서 백록담 정상에 처음 올랐습니다. 다 떨어진 군화에 일본군이 사용하던 헌 배낭에 담요 한 장, 쌀 몇 줌 담은 항고, 그리고 유엔표 성냥 한 갑이 장비의 전부였습니다.
그땐 전문 등산꾼이 아니면 그렇게 했습니다. 등산로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난 길로 그야말로 가시덤불이고 안개가 끼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습니다. 정지용이 걸었던 그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한여름 햇살을 맞으며 백록담 꼭대기에 섰을 때 일망무제의 경관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정상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백록담 화구호에 두 사람이  옷을 훌훌 벗고 뛰어들어 멱감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가 서너 마리 호숫가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백록담 바위 굴에서 하룻밤 자기로 하고 1,950m 한라산에 올랐으니 무식하고 무모한 산행이었습니다. 우리는 백록담 물을 쌀이 든 '항고'(군용 반합)에 붓고 저녁밥을 지으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구상나무 가지를 꺾어 성냥으로 불을 붙였지만 산소가 모자라 불이 잘 붙지 않았고, 기압 영향으로  낮은 온도에서 물이 끓으면서 설익은 쌀만 씹으며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렇게 좋았던 백록담 날씨가 밤이 되자 돌풍과 안개비가 백록담 벽을 쳤습니다. 눈앞은 깜깜했고 소 우는 소리가 백록담 화구벽에 부딪쳐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위굴에서 몸에 담요를 두르고 누웠으나 추워서 온몸이 떨렸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날은 밝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늦은 아침에야 안개가 걷혔습니다. 배가 고파 기진한 내 눈앞에 까만 열매가 보였습니다. 백록담의 고산식물 '시로미' 열매였습니다. 맛도 가릴 것 없이 마구 따서 입에 넣었습니다. 달고 새콤한 게 요즘의 블루베리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은 50년 전과 비교해 보니 한라산 자연이 많이 변했습니다. 바위돌은 그대로인데 식물대가 변한 듯합니다.  구상나무가 많이 사라졌고 시로미도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조릿대가 무성합니다.  기후변화 탓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더 변했습니다.  그땐 맑은 8월에도 사람 구경하기 힘들던 백록담인데 이제는 출입제한을 해도 1,500명이 매일 오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진을 카카오톡에 올려 서울의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과 대화하며 수다를 떱니다.

앞으로 50년이 흘러 2070년대에는 백록담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까요.  구상나무가 사라진 민둥산이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백록담에 사람들이 많이 올라갈까요. 그들의 손엔 스마트폰이 그대로 들려 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기계가 들려 있을까요. 시간의 흐름을  그저 상상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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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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