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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는 적서차별을 국법으로 영구히 금한다” 라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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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410.

파주시청 파주시장실에서 최종환 파주시장과의 대담에서 있었던 일중 하나를 올려드립니다.

 

저는 재단법인 허준문화원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장 자격으로 최종환시장과 허준묘역 성역화에 대한 상담을 할 때의 일입니다.

 

참고로 허준선생 묘소 앞의 상돌은 일반인이 쓰는 상돌이 아니고 왕실에서만 쓰고 있는 돌이라는 것을 먼져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허준묘역 성역화 작업을 위해 많은 문화재전문가와 묘역을 답사한 일이 있었으므로 허준 묘역에 관해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최종환시장과의 상담중 묘소의 도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연코 허준 묘는 도굴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최시장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에, 군왕의 교시로 <양천허씨는 앞으로 적서차별을 없애라!!!>고 하는 왕명이 있었다고 말하고, 과거 사람들에게 들으니 허준묘소를 도굴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바 있고 나와 전문가들의 의견은 허준묘의 봉분은 아래로 조금 떠밀려 내려와 있었으므로 봉분이 있던자리는 허공이라는 것입니다.

 

허준선생은 직위가 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이고, 사대부가의 후예이며, 이미 적서차별을 없앴고, 왕실에서만 쓰는 석물을 썻다면 분명 회로 다졌을 것이라고 유추되며 또한 원래의 유골은 조금 위쪽에 있는데 일반 도굴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래서 허준묘역을 성역화 하기 위해서는 문화재청의 승인하에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다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파주시장은 나에게 <양천허씨는 앞으로 적서차별을 없애라!!!>라고 한 말이 사실이냐? 역사적 기록이 있느냐? 하고 묻기에 기록이 당연히 있지 않겠느냐 하고 말한바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적서차별을 없애라는 왕명을 어르신들로부터 구두로 전해들은바는 있지만 문서는 확인한 바가 없었기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강서구와 양천구의 홈페이지에 그 내용이 있기에 올려드립니다.

 

혹씨 이 문서를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양천허씨 장단종힌회 문정공파 37세손

재단법인 허준문화원

중산 허현강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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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강서구청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입니다.

양천허씨로 손꼽히는 또 한사람의 인물로는 허준이 있다.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인데 양천현 능곡동(강서구)에서 153935일 허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서자이기 때문에 당시 적서차별로 인해 문벌과 천재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기술관으로 내의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엄격한 가정교육과 선대부터의 교훈으로 다져진 인격이 궁중에서도 인정받게 되어 내의로서 입신의 영예를 받았고 1590년에는 왕자의 병을 고쳐서 왕의 특명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왕이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자 계속된 피난길에서도 끝까지 왕을 시종하여 1606년에는 양평군에 봉해지고 숭록대부에 올랐으나, 중인출신에게 당상관의 위계를 줄 수 없다는 제신들의 반대로 취소되기도 하였다.

세조가 붕어하고 1608년 광해군이 계승하자 선조가 병으로 서거한데 대한 어의로서의 책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차, 그를 시기하던 무리에 의한 모함으로 한때 파직되어 적소에 유배되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준은 적소에서 갖은 인고와 싸워가며 동의보감의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마침내 1609(광해군 1) 적소로부터 유배가 풀어졌으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주위의 모함과 집권자의 멸시와 학대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참으며 방환된 이듬해 15년간에 걸친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인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161086일 광해군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감탄해 마지 않았으며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포상을 대신해서 그의 일생일대의 숙원인 서자의 불명예를 씻어주었다. , 특별교지로 이후로 양천허씨에 한해서는 영구히 적서의 차별을 국법으로 금한다는 것이었다.

 

1615817(양력 99) 허준은 77세를 일기로 선조의 고향인 양천의 허가바위굴속에서 일생의 대작인 동의보감을 어루만지면서 연구와 고난으로 일관된 생을 마치게 되었다. 양평군()으로서 예우에 따라 100일 동안 장사지낸 후 당시 파주목사로 재직하던 아들 <허겸>이 부친의 시신을 허가바위 앞 공암나루에서 배에 태워 임진강으로 모시고가서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에 모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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