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전역에 몰아치는 개발 바람에 걷는 길이 더 살아지기 전에, 너른 차도와 이런저런 단지가 더 들어서기 전에 길을 내야만 했기에, 아무런 준비 없이 무모하게 이 일에 뛰어든 것은 지난해 여름, 한여름 '와랑와랑'한 햇볕을 받으면서 40일간 예비답사를 마치고 나서 산티아고 길 못지않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산티아고 길에는 없는 푸른 마당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그러려면 차가 진입할 수 없는 숨은 길을 찾아야, 끊어진 길은 이어야, 사라진 길은 되살려야만 했다. 그뿐인가. 없는 길은 내어야만 했다. 행정력도 자금력도 없는 사단법인이 이 일을 해내는 데에는 상상하기 힘든 어려움이 뒤따랐다.
(중략)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올레가 있어 행복하다"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올레지기도 더불어 행복하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와랑와랑한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흙길을 팬티와 수건이 담긴 세숫대야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던 여름날이.
바닷속 날카로운 돌멩이가 여린 발바닥을 찢어놓는데도 우린 아랑곳하지 않았다. 짠물을 너무 들이켜 목이 다 쉬고 귀가 멍멍해질 때까지, 우린 몇 번이고 물속에 들락거렸다.
입술이 새파래지고 으슬으슬 몸이 떨려오면 내팡돌에 엎드려서 꼬치처럼 몸을 굴려가며 햇볕에 말리곤 했다. 그러다 몸이 덥혀지면 다시 바닷물에 뛰어들고, 운동신경이 젬병인 나는 개헤엄이 고작이었지만, 내 또래인데도 자맥질을 해서 미역이랑 소라 따위를 건져 올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여태껏 내가 먹어본 가장 맛난 성게는, 소낭머리 맞은편 너럭바위에서 몸을 말리고 있을 때 친구가 잡아와서 나눠먹은 것이었다. 새까만 성게를 돌멩이로 내리치는 순간 터져나오는 노오란 속살! 갯내음 물씬한 그 맛을 어찌 잊을까.
사람들을 절로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모래사장길, 헉 소리가 절로 나는 주상절리 전망대, 울퉁불퉁한 갯바위에 몸을 딱 붙이고 가는 길, 암반과 암반 사이를 겅중겅중 건너는 길, 산방산을 향해 경배하듯이 몸을 낮추고 올라가는 사구언덕길, 모래땅을 뒤덮은 순비기나무 군락길, 홀연 나그네의 땀을 식혀주는 호젓한 소나무 길, 자동차는 물론 자전거조차 도전할 수 없는, 오로지 걷는 사람들만을 위해 선물처럼 주어지는 길, 화순해수욕장에서 용머리 해안까지의 '화순 해안길'은 올레코스 중에서도 명품 길이다.
본디 사람이 걷는 길이 그러했다. 콘크리트 없이도,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아도, 폭이 넓지 않아도 된다. 두 발로 디딜 수 있고, 몸의 중력을 받아낸다면 길이 된다. 가끔은 한 발만 디뎌도 된다. 외발과 오른발 사이에 길은 존재하므로.
대한민국에 '올레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주인공 서명숙. 걷기여행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나이 쉰에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 제주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내 '올레길'을 만들었다. '제주 올레 여행:놀멍 쉬멍 걸으멍'에는 제주의 매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출처 : 나라사랑, 2021년 11월 1일 월요일 (월간) 제918호 13면, 아름다운 인생, 책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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