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 허씨가 백령도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신적, 물리적 영향력을 발휘해 백령도를 비롯한 황해도 일대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분은 허간(許侃, 1885~1972) 목사다. 그의 생존 시기는 개화의 물결이 조선을 휩쓸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다.
그만큼 격정과 고난의 세월 속에 신앙인으로서의 마음을 바탕에 두고 교육자 겸 항일투쟁을 통한 지역운동가로서 고군분투해 백령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 내용은 종교사 내지 신앙인에게만 명맥을 유지한 채 희미한 불빛처럼 이어지며 대중적 접근에는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주된 활동무대가 백령도와 이웃한 황해도라 지역적 한계가 있지만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이 자못 크다. 일제강점기 당시 토지국유화를 시도했던 조선총독에 대해 주민과 함께 조직적인 저항으로 민영화를 이끌어낸 그의 활동을 소개한다.
▶ 체크포인트1. 허간 약사(略史)
그는 1885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 연화리(중화동)의 양천 허씨 가문에서 허근(許根)과 이근식(李根植) 여사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허득, 아버지 허근, 그리고 본인에 이르기까지 허씨의 종손이었으며 호는 백석(白石, 백령도의 돌)인데 고향 백령도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는 호칭이다.
그는 1899년 언더우드에게 백령도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1905년 9월부터는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황해도 해서제일학교(海西第一學校)에 유(입)학해 1907년 3월 졸업했다. 이어 고향 백령도에 신학문을 보급하고자 중화동에 해서제일백령학교 인가를 얻어 예배당을 교실로 사용해 본인이 직접 교원으로 1909년 6월까지 가르쳤다.
백령면에 신학문 공부가 시작되면서 학생수가 40여 명이 된 적이 있으며, 20세 이상의 학생이 수십 명에 달했다. 1909년 10월부터 1911년 2월까지는 사곶학교에서 교육하기도 했다. 39세인 1923년에는 황해도 재령의 서부예배당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29~1931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신앙심을 두텁게 했다.
그후 역할이 점점 커져 백령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담임목사와 당회장을 역임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에 전념한 결과 1955년에는 교역 시작 40주년을 맞이해 중화동 및 연지동 교회에서 축하 기념식을 열었다.
또 전쟁고아를 위한 자육원(慈育院) 설립, 성경학교장, 황남노회의 4차례 회장 역임, 1967년 중화동교회 재건축 등 종교활동을 한 결과 1970년 중화동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1972년 향년 88세로 별세했으며, 중화동교회 옆에 있는 양천 허씨 선영에 안장됐다.
▶ 체크포인트2. 항일투쟁을 통한 지역운동가로서 역할
<백령도>(샘터) <만성 허응숙 목사>에 의하면 백령도는 조선 세종 이래 주민들이 입도, 토지를 개간해 자기 소유 토지에서 농사짓고 살았다.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면서 군사적 요충지였던 백령도는 수군 상비병과 군마(軍馬)를 기르던 목장을 두면서 역둔전(驛屯田)을 실시했기에 백령 주민들은 자기 소유 토지에 대한 지세(地稅)를 내거나 혹은 역둔전 경작자는 소작료(도세)를 납부하는 이원적 제도였다. 즉, 토지의 개인 소유가 지속적으로 인정되고 있어 자유롭게 토지 매매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동양척식회사에서 자유 매매를 엄금했다. 1910년 10월부터 소작증을 각자에게 배부하더니, 지금까지 내던 지세와 소작료에 6배 이상을 납입하게 했다.
이 처사는 고액의 세금납부를 통해 토지국유화를 시도하려는 일제의 책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민심이 폭발하면서 겨울부터 백령도 땅 전부를 민유지로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중심에 25세 청년 허간이 있었다. 전 도민(島民)이 “중화동교회의 허간이 아니면 할 만한 분이 없다”고 강권했으니, 허 목사 자신도 의분에 떨쳐 일어나 “이 일은 개인의 유익이 목적이 아니라 백령도 전 도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 만큼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국유지가 된 도내(島內)의 모든 토지를 민유지로 전환하려면 조선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를 고발해 재판에서 이겨야만 했다. 허 목사가 1911년 3월 정식으로 전 도민들을 모아 “백령도 토지를 민유로 돌려달라”는 청원 이유를 설명하자 도민들이 전부 “가(可)하다”고 승낙했다.
“허간 목사를 이 소송의 대표자로 위임하며, 재판 비용은 각 토지 소유자가 책임진다”는 계약서에 도민 500여 명이 서명 날인해서 백석에게 맡겼다.
허 목사는 그해 4월 초 장연군수에 이어 황해도지사와 조선 총독에게까지 진정서를 제출하며 활동을 개시했다. 국권과 함께 상실된 백령도의 땅을 원래 상태의 민유지로 돌리기까지 2~3년 예상했다.
그러나 재판이 뜻대로 되지 않아 5년이 넘게 흘렀다. 백석은 그 사건에 몰두해 가사도 돌볼 수가 없었다. 장연읍과 황해도청 소재지, 그리고 경성(京城)까지 수십 차 왕래했다. 진정서나 탄원서, 자술서 등을 관계 관청에 제출한 것이 무려 28번이며 직접 총독이나 도지사 및 도청 직원에게 찾아가서 면담을 신청해 담판한 때도 많았다.
이렇게 도민을 위해 활동한 결과 1915년 10월에 2대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명의로 명령장이 내려왔다. “백령도 토지에 대해 신목장지역과 구관사지대 외에는 전부 도민 총대표 허간의 진정서와 탄원서에 의해 민유지로 허락하며, 각 자작인(自作人)이 소지한 대로 소유지(所有地)로 등기하라”는 내용이었다.
허간을 비롯한 백령도 주민들은 기쁨으로 이 서류를 받았다. 이 사건에 5년이 걸렸고, 비용도 그 당시 돈으로 7000여 원을 사용했다. 민유지로 바뀐 토지는 논과 밭 합해 1만 4000여 마지기인데, 이 넓은 토지를 도민 각자에게 분배하면서 마침내 민영화의 뜻을 이뤘다.
이 뿐만 아니라 1921년에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형사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해 배움을 멈추었으며, 해주형무소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지만 가석방된 바 있고, 해방될 무렵인 7월 2일에는 장연경찰서에서 호출을 받고 이유 불문 감옥생활을 하다가 광복과 함께 풀려나기도 했다.
그는 191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신앙인이자 신학문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면 20대 중반 이후 주민과 소통하며 백령 주민의 권익을 위해 지역운동가의 역할을 했다. 원동력은 확고한 신앙 생활 및 신학문 수용을 통한 교육자로서의 역할, 지역사회의 신뢰와 지지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이 백령도 지역발전을 위한 기반 설계는 그에 의해 시작됐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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