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분야 | 미정 ( 제 -호 ) [ 모름 ] |
유물/유적 유형 | 기타 |
소재지 | (5711) 서울 송파구 가락동 96-15 |
시대 | 현대 |
수량 | 1 개 |
퇴암공 허휘(許徽) 송덕비
비문 각자 내용 : 府尹許公淸德善政碑(부윤허공휘청덕선정비)
위치 : 서울 송파구 가락동 96-15
양천허씨 23世 휘(徽) 1568(선조1) - 1652(효종 3)
자(字)는 휘지(徽之)이고, 벼슬은 숭정대부 판중추부사(崇政大夫中樞府事)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퇴암(退庵)이다.
대헌공(大憲公) 진(晉)의 아들이고 문정공 침(琛)의 5세손이다.
미수(眉叟) 허목(許穆)께서 쓰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허휘(許徽)의 신도비(神道碑)의 일부 내용을 옯김.
문정공(文貞公) 침(琛)은 공의 5세조(世祖)이고, 문정공의 현손인 지중추사(知中樞事) 진(晉)이 아들이 없어 형제의 아들을 고르게 되었는데. 그 중 공이 가장 어질었으므로 듣디어 아들로 삼았다.
공은 1607년(선조 40)에 처음 벼슬하여 9년 뒤 1616년(광해군 8)에 양천현령(陽川縣令이 되었는데, 그해에 중추공(中樞公)이 별세하였다. 상(喪)을 마치고 나니 바야흐로 광해군(光海君)의 정치가 혼탄할 때여서 행실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가는 사대부(士大夫)가 많았으므로, 공도 드디어 다시 벼슬을 구하지 않고 농사지으면서 살았다.
공은 안성군수(安城郡守), 예천군수(醴泉郡守), 이천 도호부사(利川都護府事)를 거쳐 왕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킨 후 을해년(1635년 인조 13)에는 동지중추(同知中樞)가 되었고 병자년(1636)에는 동경(東京 : 경주(慶州)의 부윤(府尹)이 되니 요직에 있는 자들이 논란이 있었으나 왕은 공을 광주목(廣州牧)으로 옮겼다.
공은 1년이 안 되어 오링케 침공이 있을 터니 남한산성으로 왕성(王城)을 삼고 군량을 저축하여,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남성(南城)의 보루(堡樓)를 증축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겨울에 과연 오랑캐의 침공으로 왕이 남한산성으로 출행(出幸)하여 성이 포위된 40여 일 동안 군사들이 주린 빛이 없이 축적이 남아도니, 상이 더더욱 아름답게 여겨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특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승진시켰다.
경진년(1640:인조 18)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나아가 강도 유수(江都留守)가 되었는데 다시 들어와 판윤을 두 번 지냈으며 중추(中樞)를 또 두 번 지냈다. 정해년(1647)에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중추(判中樞)가 되었는데 이 때에 공의 나이가 80세이다.
나이 85세에 별세하셨다. 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전중(殿中) 모(某)의 딸인데, 2년 전 86세로 별세하셧다. 모두 장단(長湍) 오동(鰲洞)의 세장지(世葬地)에 장사하였다.
[출처: 양천허씨보감 유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