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허일 [許鎰] |
세수 | 19 세 |
생몰년 | ~ 1593년 |
대표관직 [ 행직 ] | 웅천현감 |
자(字)는 여중(汝重)이며 호는 일심재(一心齋) 또는 남포(南圃)이다. 공(公)은 1592년 4월 14일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재직 중이었으나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해 김해 진관을 방어하려고 웅천현을 떠났다. 그러나 4월 18일, 낙동강 하류의 죽도에 상륙한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3번대 병력으로 인해 김해성(金海城) 지원이 여의치 않았으며 왜군들의 전략으로 인해 김해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공(公)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李舜臣) 진영에 가담하여 왜군들과 싸우다가 의병장 최경회(崔慶會)가 이끄는 부대에 합류하여 후부장으로 전라북도 장수(長水)를 거점으로 무주, 금산 등지를 오가며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며 2천여명의 의병과 함께 영남으로 진출하여 1차 진주성 전투 승리에 도움을 주었다. 이후 경상도 의병장들과 함께 성주성(星州城)과 개령현(開寧,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옛 지명)을 수복하는 전투 등에 참가하여 공(功)을 세웠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서울에서 철수한 왜군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을 설욕하고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로 진주성에 대한 총 공격을 감행했는데 공(公)은 이 전투에서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순절했다.
임진왜란에서 공(功)을 세운 사람들을 대우하고자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는 선조 37(1604)년 특별히 큰 공을 세운 18명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녹훈하였는데 이듬해인 1605년 4월 선무공신에서 제외된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하였다.
공(公)은 이 때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책록되었으며 배위는 고령 박씨(高靈朴氏)이다. 공(公)은 임진왜란 중에 의병으로 왜적에 대항하다 숨진 공(公)의 다섯 아들과 함께 전라남도 순천에 위치한 육충사(六忠祠)에 배향되었다. 호국충정이 깃든 허일(鎰) 장군의 시(詩) 한 수를 소개한다.
웅천 앞바다에서 왜적을 막다 〔熊川洋禦倭〕
하늘을 돌고 해를 가리던 적의 선박 돌아가니 旋天蔽日賊船還
해동(海東)에는 저들 용납할 곳 없어라. 海東無地措身間
비록 천추(千秋)에 손악(孫樂)의 솜씨는 없지만 縱乏千秋孫樂手
이 마음은 결코 문산(文山)에게 뒤지지 않노라. 此心端不後文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