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관 [許冠]

이름허관 [許冠]
세수11 세
생몰년 ~
대표관직 [ 행직 ]판도좌랑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 묘정 배향공신인 문경공 허공(珙)의 셋째 아들이며 양천허씨 3개 대파(大派) 중 하나인 ‘판도좌랑공파’의 파조다.

공(珙)의 벼슬은 판도부 좌랑 추봉 광정대부 첨의부찬성사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奉承郞版圖部 追封匡靖大夫僉議府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이다. 판도부(版圖部-판도사)는 고려 후기 호구(戶口), 공부(貢賦)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며 광정대부는 종2품의 문관 품계로 충렬왕 1년 관제개편 때 금자광록대부가 광정대부로 변경된 것이다. 찬성사는 첨의부의 정2품 관직이며 우문관의 대제학 또한 정2품 관직이고 감춘추관사는 정사를 기록하는 춘추관의 관직으로 정1품이다.

공(公)의 모친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의 딸 영평군부인 파평윤씨(鈴平郡夫人坡平尹氏)이고 배위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고려조의 명신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송분(宋玢)의 따님이다. 정당문학은 국가행정을 총괄하던 중서문하성(조선시대의 의정부)에 있는 종2품 관직이며 도첨의중찬 역시 중서문하성 관제 때의 종1품 문하시중(현재의 수상 혹은 총리)과 같은 벼슬이다. 도첨의중찬은 고려 후기 충렬왕 1년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고려의 관제를 축소할 때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통합하여 첨의부를 만들었는데 이때 문하시중의 호칭이 변경된 것이다. 정원은 좌·우 각 한 명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나라 제도에 6품(六品) 이상의 관원은 과거시험에 응시함을 불허했는데, 단 6품 벼슬이더라도 사은(謝恩: 임금을 뵙고 은혜에 감사함을 표하는 일)하지 않았으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공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낭장(郞將: 정6품 무관직) 벼슬에 제수(除授)된 지 4년이 되도록 사은하지 않았다. 장인인 송분(宋玢)이 말하기를, “벼슬길이 많은데 어찌 반드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는가” 하니, 공은 선인(先人: 돌아가신 아버지)이 제게 유서(遺書: 유언을 적은 글)한 바 있는데 “꼭 과거에 응시하라” 하였습니다. 비록 제가 과거에 여러 차례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선인의 유서가 남아 있는데 어찌 제가 조급히 선인의 말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평소에 허관(冠)의 이름을 들은지라 방방(放榜: 과거 합격자 명단)이 나오자 공(公)을 어전으로 불러 서대(犀帶)를 내려 주셨다. 서대는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인데 주로 물소의 뿔로 장식을 했다. 공의 벼슬이 호부산랑(戶部散郞: 호부에 속한 정6품 관직)에 이르렀고 사후(死後: 죽은 이후) 찬성사(贊成事: 첨의부의 정2품 관직)를 추증받았다.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 29(1303)년에 박리(朴理)의 방(榜)에 병과(丙科) 제1인(一等)으로 급제하였으며 급제하여 5년이 지난 뒤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

고려 제27대 임금 충숙왕 3(1315)년에 공이 지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진정시 〔陳情詩〕
허송세월 한지가 벌써 구년 虛送光陰已九年
우러러 임금 계신 곳 바라보니 마음은 망연하네 仰瞻楓禁意茫然
요행이 천재로 성군의 다스림 만났으니 幸逢千載垂衣理
큰 터전 도와서 만세에 전하려 하네 願輔丕基萬世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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