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강 [許綱]

이름허강 [許綱]
세수13 세
생몰년1317년 ~ 1366년
대표관직 [ 행직 ]밀직사사
11세 판도좌랑 허관(冠)의 손자이며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역임한 허백(伯)의 둘째 아들로 자는 중유(仲維)이고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정유의(鄭惟義)의 따님이다.  

고려 제27대 임금 충숙왕 4(1317)년에 태어나서 고려 제31대 임금 공민왕 11(1362)년 8월에 안동도병마사(安東道兵馬使)로 임명되어 흥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쳐 개경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인 공민왕12(1363)년 3월에는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찬성사(贊成事)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고려의 사신으로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 중국 북경의 옛 이름)에 가서 종실(宗室: 임금 친·인척)의 상황과 고려의 정국에 대한 사리(事理: 이치)를 밝히고 임금 책봉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고자 이 내용을 호소하는 진정표(陳情表)를 당시의 황제인 순제(順帝)에게 올렸다. 밀직제학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軍機: 군사 기무)와 관련된 정사를 맡아보던 관서인 밀직사의 정3품 관직이며 찬성사는 첨의부(僉議府)·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도첨의부(都僉議府)·문하부(門下府)에 딸린 정2품 관직으로 시중(侍中) 또는 정승(政丞) 다음의 벼슬이다.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반원정책(反元政策)을 펴면서 그 동안 원나라 기황후의 세력을 등에 없고 횡포를 휘두르던 기철(奇轍) 일족과 노책(盧頙)·권겸(權謙) 등을 죽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된 기철(奇轍)의 누이 기황후가 1362년 공민왕을 폐하고 대신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국왕으로 세우려한 것과 관련 이공수(李公遂)와 공(公)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간 것이다.

이공수(李公遂)는 기황후의 외사촌 오빠(외종형)로서 기황후로부터도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공수는 기황후를 만나서 덕흥군을 임금으로 책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설득하였으나, 오빠인 기철(奇轍)의 죽음에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기황후는 계속해서 공민왕을 폐하려했다. 이에 이공수는 병을 핑계삼아 원나라에 머무르며 기황후가 힘을 실어주고 있는 덕흥군과 최유(崔濡)의 거병(擧兵: 군사를 일으킴) 내용을 같이 머물고 있던 홍순(洪淳)·이자송(李子松) 등과 함께 밀서를 만들어 대나무 지팡이 가운데 넣은 뒤, 수행원들을 통해 공민왕에게 알렸다. 덕흥군과 최유(崔濡)는 공민왕 13(1364)년 요양성(遼陽省)의 군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입하여 평안북도 의주(義州)까지 왔으나, 이를 대비하고 있던 공민왕은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 장군 등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공(公)은 원나라에서 귀국한 후 밀직사사(密直司使)에 임명되었다. 

공(公)이 별세한 후 신돈(辛旽)이 공(公)의 부인인 김씨를 취하려 함에, 부인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우리 남편은 평소에 일찍이 다른 여자를 곁눈질로 본 적도 없는데, 지금 내가 미망인으로서 어찌 차마 〈남편〉을 배반하겠는가. 나를 꼭 더럽히고자 한다면 스스로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머리를 깍고 비구니(比丘尼: 여승)가 되었다. 부인은 상락군(上洛君) 김순(金恂)의 손녀로 교양과 부덕이 겸비한 요조숙녀(窈窕淑女)였다. 상락(上洛)은 안동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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