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허공 [許珙] |
세수 | 10 세 |
생몰년 | 1233년 ~ 1291년 |
자 / 호 | 자 : 온독 [韞匱] |
대표관직 [ 행직 ] | 첨의부중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전리사사세자사 |
시호 | 文敬 [문경] |
자는 온독(韞匱)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 묘정 배향공신으로 벼슬은 광정대부 첨의부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府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이다. 배향공신이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祠堂: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에 임금과 함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 패)를 모시는 공신(功臣)을 일컫는다. 배향공신에 선정된다는 것은 가문의 대단한 영예로 인식되었으며 그 후손들에게는 여러 가지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광정대부란 문신계 제3계로 종2품이다. 고려 전기에는 금자광록대부로 호칭되었는데,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1년에 광정대부로 고쳤다. 첨의부중찬 또한 종래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통합한 첨의부를 만들면서 생긴 관제로 정원은 좌·우 각 한 명이었으며 현재의 수상 혹은 총리와 같은 관직이다. 수문전태학사는 국왕을 시종하고 역대의 문서를 관리하며 경전을 강론하던 관청인 수문전의 태학사를 말하는데, 태학사는 문한직으로 한림원의 관직이다. 감수국사는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관(史館)의 장관으로 건국 초부터 시중(종1품 또는 정2품)이 겸임하도록 했다. 판전리사는 상서육부(조선 시대의 6조) 중 상서이부(조선 시대의 이조)와 상서예부(조선 시대의 예조)를 합한 기관으로 정3품인 판서가 이끌었다. 세자사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인데 세자의 스승이기에 덕행이 높고 학문이 뛰어난 재상급에 속한 신하가 임명되었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허공(珙)은 공암현 사람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허의(儀)라 했다. 부친은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한림학사 승지 허수(遂)로서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의 왕자인 대사(大師) 왕충(王沖)의 6대 외손이며, 모친은 신정군대부인(新定郡大夫人) 목천장씨(木川張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장극우(張克友)의 딸이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용모가 빼어났다. 제23대 임금 고종 45년 6월 장문한방(張文漢榜)에 급제하자 승선(承宣) 류경(柳璥)이 허공(珙)과 최녕(崔寧), 원공식(元公植)을 천거하여 내시(內侍)에 소속시키고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으로 삼자, 공은 부하 관원을 엄정하게 통솔 점검 하니 당시에 정방삼걸(政房三傑)이라 불려졌다.
이후 국학박사(國學博士)로 옮겼고, 고려 제24대 임금 원종 초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된 후 지위가 차차 올라가 호부시랑(戶部侍郞)을 지내면서, 10년간 신종실록(神宗實錄), 희종실록(熙宗實錄), 강종실록(康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호부시랑은 상서육부의 하나인 상서호부의 정4품 관직이며 시랑은 현재의 차관급이다.
원종 10(1269)년에 우부승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右副承宣吏部侍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우부승선은 왕명출납을 담당하는 중추원의 정3품 관직이며 이부시랑은 문관의 선임, 공훈(功勳), 봉작(封爵) 등의 일을 담당하던 상서육부의 하나인 상서이부의 정4품 관직이다. 지어사대사는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시정을 논하고 또 풍속을 교정하던 어사대의 종4품 관직이다. 공(公)이 주요 관직에 있자 당시 많은 권력과 세력을 갖고 있던 임연(林衍)이 그의 아들 임유무(惟茂)와 공(公)의 딸을 혼인시키려 하였으나 공(公)이 거절했다. 임연(衍)이 이 사실을 왕께 고하매 왕이 공(公)을 불러 말하기를 “임연(衍)은 간흉하니 원망을 취하지 않도록 경(卿)이 잘 헤아리라고” 함에 공(公)이 “차라리 재앙을 받더라도 불충한 신하의 집에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고 왕께 아뢰니 왕이 의롭게 여기며 잘 대처하라고 하였다.
공(公)이 퇴궐 후, 즉시 그 딸을 평장사(平章事: 중서문하성의 정2품 관직인 재상) 김전(金佺)의 아들 김변(金賆)에게 출가시키니 임연(衍)은 그 일을 두고 공(公)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 해 임연(衍)이 고려 제24대 임금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倡)을 임금으로 세우는 임연지란(林衍之亂)을 일으키며 김준(金俊: 고려 무신)을 죽일 때 많은 문신과 무신들도 함께 해(害)를 입혔는데 공(公)은 때마침 아내의 장례를 치르려고 양천현에 가 있었다. 장례 후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통진현(通津縣: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에 와서 이 변란 소식을 듣고, 자신도 해(害) 입는 것을 우려하여 강에 투신해 자살하려 하다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생각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임연이 조정의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나니, 관리의 선발을 함께 의논할 만한 사람들이 없는지라 측근들에게 허공(珙)이 귀경했는지를 물었다. 공(公)이 그 말을 듣고 임연의 집으로 갔더니 임연이 크게 기뻐하며 공을 맞아들여 자리를 권한 후, “일이 있어 장례에 가지 못했으니 나무라지 말기를 바란다”며 사과하고 공에게 관리의 선발을 맡겼다.
임연(衍)이 임금을 폐위시킨 후 ‘병 때문에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거짓말로 원나라에 표문(중국의 왕에게 보내던 외교 문서)을 보내니. 원나라는 그 표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왕이 직접 원나라에 입조(入朝)해 진상을 말하라’고 재촉했다. 왕이 원나라로 가는 길에 송참(松站)에 이르자 호종(보호하며 따라감)하는 신료(臣僚)들에게, “동경행성(東京行省)에서 임연이 마음대로 왕을 폐립한 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는가?” 라고 의논하자 공(公)과 대장군 이분희(李汾禧), 장군 강윤소(康允紹) 등이 임연의 뜻에 따라 표문에 적힌 대로 대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한편 당시 유초(庾超)란 자는 승선 유홍(庾弘)의 아들로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해 이장용(李藏用)의 손녀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이장용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고려의 승선 허공(許珙), 상장군 강윤소(康允紹), 장군 공유(孔愉)가 공모해 원나라를 배반하려 한다’고 무고했다. 황제가 부카(不花)를 시켜 공(公) 등을 체포해 유초와 대질 심문을 시켰더니 유초가 거짓말이라고 자복하므로 그를 장형(杖刑: 다섯 가지 형벌 중의 하나로 죄인의 볼기를 치던 형벌)에 처했다.
공(公)은 40세인 고려 제24대 임금 원종 13(1272)년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중용되었으며 곧 추밀원부사(樞密院副事)가 되었다. 첨서추밀원사와 추밀원부사는 왕명을 출납하는 추밀원의 관원으로 벼슬은 정3품인데 부사는 현재의 차관과 같은 직급이다. 제25대 임금 충렬왕 1(1275)년 에 관제개정으로 감찰제헌(監察提憲)에 제수되었고 동지추밀원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감찰제헌은 정3품 직으로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맡았던 어사대가 감찰사로 명칭이 바뀌면서 부르던 호칭으로 감찰사(監察司: 현재의 검찰청)의 으뜸 벼슬(현재의 검찰총장)이다. 동지추밀원사는 왕명출납을 담당하던 추밀원의 종2품 관직이다. 4년 후인 충렬왕 5(1279)년 2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첨의부의 종2품 벼슬)가 되었고,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전함의 건조를 명하자 9월에 경상도 도지휘사로 부임하여 전함 90척 건조를 신속히 마치니 그 유능함에 크게 탄복하였다. 12월에는 동수국사(同修國史)가 되었다. 동수국사는 사관의 관직으로 수상이 겸하는 감수국사와 종2품 이상의 관원이 겸하는 수국사 다음에 위치한 관직이다.
충렬왕 6(1280)년 12월에 참문학사세자보(參文學事世子保)가 되고, 4년 뒤 충렬왕 10(1284)년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한강(韓康), 원부(元傅) 등과 더불어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했다. 참문학사는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관직인 정당문학의 후신으로 종2품 관직이고 수국사는 고려 시대 정사(政事)의 기록과 역사서 편찬 업무를 맡아보던 사관의 종2품 관직이다. 세자보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직책이다. 3년 뒤인 충렬왕 13(1287)년에 현재의 국무총리(수상) 격인 첨의부의 종1품직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승진되었다. 첨의중찬 정원은 좌·우 각 1인이다. 충렬왕 1(1275)년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려의 관제가 격하될 때 중서문하성의 명칭이 첨의부로 바뀌면서 수상격인 문하시중의 명칭도 첨의중찬으로 바뀌었다.
충렬왕 16(1290)년 왕이 원나라에 계실 적에 공(公)은 홍자번(洪子藩)과 더불어 개경을 지키고 있었다. 원에 대한 반란군 중 카다안(哈丹: 합단) 부장이 동비(東鄙: 동쪽 변방)로 침입했는데, ‘적이 이미 우리 땅 깊이 들어왔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전국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홍자번 등이 강화도로 천도(遷都: 도읍을 옮김)를 논의함에 공(公)과 최유엄(崔有渰)만은 “지금 주상께서 원나라 수도에 계신데 어찌 유언비어를 믿고 마음대로 도읍을 옮기겠는가?”하며 ‘불가’를 주장했으나 홍자번 등이 원로 재상들을 모아 놓고 의논한 후 다들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니 공(公)이 어쩔 수 없어 당리(堂吏) 문증(文証)에게 “중론이 이러하니 막을 도리가 없다. 나와 그대가 수도를 지키며 왕명을 기다리자”고 했다.
이에 재상들이 모두 나서, “사람들은 허중찬(許中贊)이 나라를 안정시켜 왔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나라를 그르치려 하는가” 하며 비난했다. 공(公)은 귀가하여 자손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개경에 있을 것이다. 만약 너희들 가운데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비록 내 자손이라도 반드시 법으로 처단하겠다”고 하며 개경에 머물렀다. 얼마 안되어 인후(印侯)가 원나라로부터 와서 다시 강화도로 천도한다는 말을 황제가 듣고, 왕에게 명하여 “그것이 사실이라면 주모자를 잡아오라” 분부했다고 말하니, 그제야 나라 사람들이 공(公)의 지혜와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이듬해(1291년) 원(元)이 군대를 보내 카다안(哈丹) 토벌에 나서자 공(公)도 군사를 동원해 협조했다. 몇 날 동안 계속 말을 타다 병에 걸렸으나 버티면서 여러 달 동안 응전하다가 8월에 병이 위독해져서 별세하니 향년 59세이었다.
배위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극민(克敏)의 맏딸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한 철원 최씨(鐵原崔氏) 최징(澄)의 여섯째 딸인 창원군부인(昌原郡夫人) 두 분 이시다. 영평군부인으로부터 첫째 아들 허정(程), 둘째아들 허평(評), 셋째아들 허관(冠)과 문신공(文愼公)으로 추증된 언양김씨(彦陽金氏) 김변(賆)에게 시집간 맏딸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및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순(恂)과 혼인한 둘째딸 이렇게 3남 2녀가 있고, 창원군부인에게서 넷째 아들 허총(寵)과 다섯째 아들 허부(富) 그리고 종실인 평양후(平陽侯) 왕현(王昡)에게 시집간 셋째 딸과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평양조씨(平壤趙氏) 조련(璉)과 혼인한 막내 딸 이렇게 2남 2녀가 있다. 군부인은 외명부 정4품의 작호(爵號: 관작의 칭호)다.
충렬왕은 공에게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내리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김현(金儇)에게 명하여 제문(祭文)을 짓게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성품이 유순하고 검소하여 경제적 풍요를 일삼지 아니했다. 고관이 되어서도 한 그릇의 밥, 포의(布衣: 베옷)에 만족하고 늘 즐거운 기색을 잃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는 언제나 말을 삼가했고 한가히 지낼 때라도 기대어 있지 않았으며 마치 귀한 손님을 마주 대하듯 자기를 낮추며 행동을 조심했다. 공은 젊었을 때, 항상 종 한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죽은 사람의 시신과 뼈를 거의 매일 묻어 주고 버려진 시체를 보면 몸소 져다가 묻어 주었다. 한 번은 어느 달밤에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이웃의 처녀가 담장을 넘어 달려왔으나 공이 가까이 하지 않고 예의로써 타이르니 그 처녀가 부끄러워하며 뉘우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