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 [許載]

이름허재 [許載]
세수5 세
생몰년1062년 ~ 1144년
대표관직 [ 행직 ]수사도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몹시 빈곤하게 자랐으나 외고조부인 삼한공신(三韓功臣) 김긍렴(金兢廉)의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가 하급관리인 서리 벼슬로 시작해 차츰 공적을 쌓아 철주방어판관(鐵州防禦判官)에 이르렀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벼슬길에는 언제나 청백하고 백성을 돌봄이 지극하였으며 9성(九城) 전역(戰役: 전쟁)을 치른 후 중군녹사(中軍錄事: 전·후·좌·우·중앙 중 중앙에 위치한 군사편제의 녹사-정7품 또는 8품의 벼슬)로 길주성(吉州城: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는 성으로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9성 중의 하나)을 맡아 지킬 때 여진족이 침입함에 공(公)은 병마부사(兵馬副使: 4품) 이관진(李冠珍) 등과 더불어 여러 달 동안 성을 고수하였으나 끝내는 거의 함락 지경에 달했다. 그러나 군사들을 독려해 하룻밤 사이에 다시 중성(重城)을 쌓아 적을 막아내니 이후 오랑캐는 물러갔다. 그 공으로 사헌부의 감찰어사(監察御使: 종6품 관직-사헌부는 현재의 검찰청이다)가 되었고 이어서 행 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5·6품의 지방 관직)이 되어 김의원(金義元) 등과 더불어 여진을 길주관(吉州關) 밖에서 격멸하고 소, 말과 함께 병장기(兵仗器: 무기)를 노획하였다. 
 
고려 제16대 임금인 예종(睿宗)이 11월 경신일에 팔관회(八關會: 국가행사로 치러진 종교행사로서 호국적인 성격이 짙은 행사)를 베풀고 구정(毬庭: 궁중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의 큰 집에 있던 넓은 격구장)에서 돌아와 궐문 앞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글을 창화(唱和)할 때 광대로 하여금 장내에서 가무(歌舞)를 추게하며 삼경(三更: 밤 12시경)에 달함에 공(公)이 어사잡단(御使雜端)으로서 간하니 임금 또한 이를 가상하게 여겨 공(公)의 말을 따랐다. 어사잡단은 고려 시대에 관리들의 규찰기관인 어사대(현재의 검찰청)의 종5품 관직이다. 예종 12(1117)년 1월 24일 동북면(東北面) 병마부사(兵馬副使: 4품), 이듬해 8월 동북면 병마사(兵馬使: 3품), 4년 뒤인 예종 17(1122)년 1월 서북면(西北面) 병마사(兵馬使: 3품)가 되었다. 17대 임금 인종 3(1125)년 12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문하부의 종2품 관직으로 6부의 판사를 겸임했다), 이듬해인 인종 4년 4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문하성의 종2품 관직)로 6월에는 풍주방어사(豊州防禦使: 병권을 갖고 각도에 배속되어 요지를 지키는 종2품 관직)로 여러 외직을 두루 거쳤다.   

세 번이나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 양계는 동계(東界)와 북계(北界)를 함께 일컬으며 병마사는 군사와 행정을 함께 관장한다]가 되어 변방에 오래있으니 적의 정세를 잘 알았다. 이러한 연유로 변방지킬 계책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양계제진사(兩界諸鎭使)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여 준용토록 하였다. 성품이 강직했던 공(公)은 이자겸(李資謙), 척준경(拓俊慶) 집권 시 신임을 얻어 재상 벼슬인 정2품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 인종은 붕당(朋黨)함을 미워했는데 이자겸이 붕당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키우며 반역했다가 잡혀서 귀양가니 이자겸이 공(公)을 신임했었다는 이유로 간관(諫官)이 상소하여 공(公)의 죄를 극단적으로 말하였으나 공(公)은 무사하였다. 그러나 이후 공(公)은 풍주방어사(豊州防禦使)로 좌천되고 그 아들 허순(純) 또한 내침을 받아 전주방어판관(全州防禦判官)이 되었다.   
 
공(公)이 풍주방어사 임기를 다하자 인종이 공(公)에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제배(除拜)했는데 공(公)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려 하였다. 그러나 대간(臺諫)이 공(公)에게 병부 상서를 재배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니 때마침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 고려 시대 지방 행정 조직인 5도에 파견한 지방 관리-현재의 도지사)가 인종에게 아뢰기를 “공(公)이 풍주(豊州)에 있을 적에 치적이 있으니 가히 내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인종은 공(公)에게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제수하여 봉직케 했으며 이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를 더하였다. 개부의동삼사는 고려 시대 문관의 가장 높은 품계의 명칭이다. 고려 제11대 임금 문종 30(1076)년에 종1품으로 정해진 ‘개부의동삼사’는 정1품 관계(官階: 관등의 계급)가 없었던 당시, 전체 29계 중 최고의 등급이었다. 공(公)은 83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배위는 광평군군(廣平郡君) 이씨로 성산 이씨(星山李氏)다. 군군(郡君)은 군대부인(郡大夫人)과 함께 정4품의 외명부 작호(작위의 칭호)이다. 외명부(外命婦)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여성을 대상으로 봉작(관작을 줌)을 주었던 명부인데 왕족이나 문관·무관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자식과 남편의 품계에 따라 부여되었다. 궁중의 여성들에게 봉작하는 품계는 내명부(內命婦)라 했다. 조선 시대와 달리 고려 시대의 외명부 작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군군이나 군대부인 앞에 붙는 명칭은 보통 관향(貫鄕: 시조가 난 곳)이나 살고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공(公)의 석관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석관 외벽에는 불상문양 뿐 아니라 태극문양도 함께 조각되어 있다. 한편 석관 내벽에는 공(公)에 대한 지문(誌文)이 자세히 적혀 있다. 지문(誌文)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날, 행적(行跡: 평생 동안 한 일), 무덤의 위치와 좌향 등의 내용을 적은 글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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